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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리커버 특별판)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오직 두 사람을 읽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알라딘에 검은꽃 리커버 한정판 알람이 떴다. 한정판 이런 것에 얽매이고 그런 스타일 아닌데 그날따라 냉콤 장바구니에 담아 빛의 속도로 결제를 했더랬다. 책장에 방치한 채 몇 달을 지내놓고 펼쳐 들었을 때, 남편은 대뜸 우울한 소설 아니냐고 물었다.
우울하다는 표현만으로는 한없이 부족한, 속상하고 화가난다는 표현만으로도 모자란, 그 시대를 지나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걸 감사하다고 하기에도 죄스러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뒤섞여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1904년 4월 4일, 대륙식민회사에 속아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로 향하는 일포드 호에 몸을 싣는다. 주변의 열강들이 동아시아의 운명을 놓고 사생결단의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많은 돈을 벌어 꼭 조선에 돌아가리라는 단꿈에 부풀어서. 암묵적으로 남아 있던 조선의 신분제가 화물칸 밖에 없는 선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거대한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서로의 몸을 맞대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한 달 반이 걸려 도착한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밟고 나서야 그들은 알게 된다. 속았다는 것을. 그 어디에도 학교며 시장이며 도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제물포보다도 못한 유카탄으로 오겠다고 그 험한 길을 왔다는 것을.
에네켄 농장의 노예로 팔려 간 그들은 악마의 발톱 같은 에네켄 잎을 잘라내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한낮의 햇볕은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말과 소에게나 휘두르는 줄 알았던 채찍을 맞아가면서 말이다. 비교적 구체적이지만, 담담히 그려지는 이들의 삶이 그저 소설 속의 일화일 뿐이었을까.
속았다 한탄하고 원망해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서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하며 그들은 여자도 아이도 할 것없이 엄청난 작업량을 해낸다. 오직 악착같이 돈을 모아 에네켄 농장을 벗어나리라는,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그 생각 하나로 버티고 견딘다. 그렇게 험난하게 버틴 4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돌아갈 고국은 이미 없다. 멕시코 혁명에 내몰려 죽음을 맞거나, 콰테말라 게릴라군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이들을 구원해 줄 나라가 없다.

약하디 약한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이
살고자 떠난 곳에서조차 대우받을 수도 없고,
도움을 청할, 그들의 입장을 보호해 줄 나라도 더이상 없는 그 상황에 가슴이 미어진다 해야할까,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해야할까. 속수무책으로 빼앗긴 나라를 탓해야할까, 자유가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품고 지도상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따라 배에 오른 백성들을 탓해야 할까.

분명 기가 찰 노릇의 엄청난 상황인데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제3자의 객관적 입장을 고수하는 문체 덕분에 오히려 가슴이 더 먹먹하고 아렸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다는 건 책을 펼치자마자 이정의 죽음이 묘사되는 부분을 읽고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실화가 바탕인 소설이라 현실은 더했겠지 싶어 해피엔딩을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는 게 더 씁쓸하다.


p.277
고국의 물정을 잘 모르던 멕시코 이민자들은 돌아갈 나라가 아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작은 종이쪽지를 꺼내들었다. 유카탄의 건조한 기후와 유랑생활로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그들을 한 달이나 제물포 항구에 붙들어놓았던, 대한제국 정부가 발행한 조악한 여권들은 이로써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p.295
이정은 가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이 시작되고부터 이미 멕시코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화폐를 찍고 다른 돈을 쓰는 자는 죽인다. 살육이 살육을 부른다. 힘을 가진 자들은 모두 멕시코시티로 진격한다. 그것이 곧 이 길고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벌써 수십만이 죽었다. 이것은 국가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아니면 국가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대한제국이 있었지만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나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더 센 국가가, 일본이, 그리고 미국이, 약한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내전을 지원한다.

p.298
알고 있겠지만 멕시코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1910년부터 모두 일본인으로 국적이 바뀌었어.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예를 들어 여권이 필요하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했다든지 하면, 일본 대사관으로 찾아오라고.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게 공관의 임무니까.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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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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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흡입력을 지닌 소설.
읽는 내내 스카웃의 귀여움에 반해 키득거렸고, 애티커스 핀치의 생각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기울였다.

1930년 미국, 북부와 비교해 흑인이 눈에 띄게 많은 남부, 그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지역 앨라배마 주의 메이콤(가상마을)이라는 시골이 배경인 이 소설은 출간 당시 미국사회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였던 인종차별 문제를 부각시킨다. 단순히 부각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사건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정의, 양심, 약자를 향한 배려 등등을 자연스럽게 고민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인생관을 바꿨다고도 하지만 여전히 지금도 사회적 약자를 향한 편견과 그로 인한 고통·차별·대립의 문제는 계속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의 주인공이면서 화자인 스카웃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내가 소설을 읽는 내내 주목했던 사람은 애티커스 핀치였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어느 육아서 지침 못지 않게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가 젬과 스카웃에게 가르치고 싶어했던 삶의 기본 가치들 하나하나 모두 나 역시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들이라 인상적이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시작은 학교에 다녀와 선생님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는 스카웃과의 대화에서 부터다. 단순히 6살짜리가 학교 가기 싫어 부리는 투정이나 꾀로 보기에는 선생님의 행동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나 역시 생각하는데 애티커스 핀치는 스카웃의 말을 다 듣고나서도 선생님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라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아빠의 말을 스카웃이 곧바로 고분고분하게 듣지 않는다. 네?? 라고 황당하다는 듯 반문한다. 6살 아이답게. 그리고 여전히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애티커스 핀치는 단호하지만, 아빠의 권위를 이용해서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밀어부치지 않는다. 스카웃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내어 아이의 마음을 설득한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용기

애티커스 핀치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중대한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된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위협받으면서도 그가 생각하는 정의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의연함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옳은 행동이 교만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도, 생각이 다른 그들과 편을 가르지도 않는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패배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건 앞에서 그래도 도전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머리로는 백번 천번 끄덕여지는 것들을 우리 아이들이 가슴으로도 느끼고 깨달아서 자신들의 삶을 그렇게 살아내도록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정과 의도보다도 결과가 칭송받는 세상에서 진정한 용기의 가치를 발견하는 지혜가 모이면 세상이 좀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부모가 주고 싶어하는 신뢰

애티커스 핀치가 사건의 변호를 맡고 자신의 동생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한다. 젬과 스카웃이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고 아빠인 자신에게서 답을 구하기를 바란다고. 아빠를 충분히 믿어주기를 바란다고.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 자체가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편견과 왜곡에 사로잡혀 있는 터라 그에 대한 걱정에서 뱉은 말이었지만, 이미 충분한 신뢰를 바탕으로 아이들과 지내왔다는 것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에 읽으면서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애티커스 핀치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자상한 아빠는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집에 돌아와 잠들기까지의 시간에는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게 다일 뿐이다. 하지만 누가 보든 안보든 행동이 한결같다는 모디 아줌마의 평가를 통해서도, 누구도 꺼릴 사건의 변호를 맡을 유일한 사람으로 테일러 판사가 지목했다는 것만으로도 애티커스 핀치의 진정성은 아이들에게 신뢰로 연결되기에 충분하다. 아이들에게 나는 부모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의 진심을 통해 지지할만한 믿음을 주고 있는지, 줏대 없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읽는다면, 나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재미와 감동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답답한 듯 느껴지는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좀더 기다려야 하지만, 아이들과 같은 작품을 읽고 생각을 나눈다는 상상만으로도 들뜨고 신난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65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149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150
하지만 이걸 꼭 기억하거라. 그 싸움이 아무리 치열하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 친구들이고 이곳은 여전히 우리 고향이라는 걸 말이야.

◆170
젬과 스카웃이 읍내 사람들 말을 듣지 말고 나한테 와서 답을 물어보기를 바랄 뿐이지.그 애들이 나를 충분히 믿어 주면 좋으련만.

◆200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207
누가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말로 불린다 해서 모욕이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욕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가를 보여 줄 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해.

◆213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517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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