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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 여성주의로 읽어 본 대중문화 여이연이론 12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정신분석세미나팀 엮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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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라는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비틀어 쓰고 있는 이 책은, 꼬리아홉달고 남자들의 심장과 간을 파먹음시롱 사람되고 자파 안달난 구미호가 사실은 남자들이 맹글어낸 여성이라는 점을, 즉 가부장제 속의 남성들이 맹글어낸 착각속에나 있는 여성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여성을 구미호라고 말하는 이 이야기는 '여자들이여, 잘나고 우월허신 남자가 되려고 애쓰라. 그러나 결코 너는 그렇게 되지 못할 운명'이라고 가르친다.

이 책의 저자들인 혜화동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여우'들은 꼬리 아홉달고 열 세개의 눈을 가지고서 왼갖 변신을 꾀한다. 이 여우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남자들이 맹글어낸 구미호 이야기는 결국 밤중에 왼갖 난리를 떤다고 인간이(man, 즉 남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남자가 될수도 없거니와 되어서도 안된다는 점을 가르치는 가부장적 이야기라는 점을. 이런 교훈질하는 남자들이 실은 여우가 아니라 자기 침대밑의 악어에게 잡혀먹는 불안에 떠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열 세개의 시선을 가진 이 여우들은 그라고 왜 어떻코롬 이런 불안에 시달리는지를 꿰뚫어본다. 무섭지? 재밌다.

비(주)체로 타자화된 이들의 여유와 유머로 무장한 이 책은 대중문화 분석의 탈을 쓴 페미니즘 무협이자 페미니스트 정신분석 지침서이고 동시에 쉽고 재미나게 배울 수 있는 페미니즘 이론서이다.  (더 자세한 서평은 여이연 홈페이지 오픈 포럼에 걸려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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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 우머니스트 산문
앨리스 워커 지음, 구은숙 옮김 / 이프(if)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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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앨리스 워커는 '여성주의'(womanism)를 주창한다. 워커가 말하는 '여성주의'는 책임성을 그 핵심으로 한다. '여성'(woman)이란 '지멋대로 굴고 무책임하며 공상에나 빠져 사는' 소녀가 아니라 "충실하고 신실하며 책임성있고 감행하며...." 등 책임성과 공동의 윤리를 그 핵심으로 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의 성정치학에 인종, 계급의 차원을 절합하려는 워커의 작업을 보여주는 탁월한 책. 미국 1960년 흑인 인권 운동과 1970년대 다양한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미국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개입실천이기도 한 책.

이 책의 핵심글이라 할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나오는 "여성전통"에 필리스 휫틀리와 같은 흑인 여성들이 빠져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흑인 여성들의 예술적 전통과 창조성의 근원을 '다시' 본다. 흑인 여성들의 경우 문학적, 예술적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능은 흑인노예살이와 인종억압 때문에 "제도적으로" 꽃피지 못했으며, 이런 억압속에서 이들의 재능은 퀼트와 정원가꾸기등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워커가 말하는 "어머니의 정원"은 흑인 여성들의 (예술적) 창조성의 전통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자, 후대 흑인여성들에게 영감과 지지의 샘을 표상하는 공간.

이 글과 연결하여,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의 저자인 조라 닐 허스톤을 흑인여성문학 전통의 '대모'로 다시 읽어내는 다른 글 또한 볼만한 대목. 허스톤에 대한 글은 원래 1976년 <미즈>지에 실었던 것이기도 한데, 할렘 르네상스시절서부터 1940년대까지 가장 탁월한 흑인(여성)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리차드 라잇이나 랄프 엘리슨 등의 흑인 남성작가들만이 조명을 받는 동안 까맣게 잊혀졌던 작가인 허스톤은 워커의 이 글때문에 70년대 후반, 80년대에 '다시 발견'되고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되기에 이른다.

이 책을 관통하는 워커의 '여성주의'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되, 그것을 피해의식에 기반해서 하는 류의 인종차별주의 및 피해자주의성 흑인중심주의를 넘어서려는 절실한 시도이기도 하다. 

"백인이 나를 억압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작태가 정당화되거나 구실이 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그 다른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동물이든 나무든 간에 말이다.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자아는 그 누구에게 소유되기를 거부한다."

고 1970년에 다른 책에서 말한 바 있듯, "노예"된 입장에서 인종억압을 족쳐바야 또 다른 노예들을 양산할 뿐이라는 인식과 정치적 경험에 기초하여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중심"에 세우고 자기 역량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향해가야 한다. 이것이 이 책내내에서 워커가 말하는 것이다.

21세기에 읽자면, 좀 '오래'된 시기인 1960년대와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책이라, 독자에 따라서는 다소 재미없을 수도 있을 듯. 하여, 역사적 맥락을 꼭 염두에 두고 즐독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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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위안부
노라 옥자 켈러 지음 / 밀알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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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993년 하와이 대학에서 있었던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 때문에 쓰여지게 된 소설이다. 이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 작가 켈러는 몇 년에 걸쳐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녀의 원래 계획은 이에 관한 역사적인 글을 쓰는 것이었지만, 대신 소설이라는 허구적인 장르를 택한다.

이 소설에서 켈러는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착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과거를, 특히 트라우마를 남기는 폭력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 하여 켈러가 선택하는 방식은 상상력 망빵의 재구성이다. 이 상상적 재구성에는 애드리안 리치가 페미니즘적 역사쓰기에 필수적이라고 했던 바 있는 '교육된 추측'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삶은 말 그대로 가장 많이 기록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켈러의 소설은 과거지사 운운함시롱 역사적 망각에 빠져드려는 의도적인 무시, 무지에의 의지, 스피박이라는 "인가된 무지"라할 작태에 맞장을 뜨는 비판적 작업이다. 또한, 이 소설은 침묵속에 갇힌 '서발턴' 아카이브를 뒤져 또 하나의 다른 역사를 기억하는 작업이자, 종속된 지식들을 풀어내는 대항기억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진부하지만 필수적인 또 하나의 페미니즘 상식과 만난다. 재현이란, (알고보면 사이비인) 보편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이자 '감정이입'이니.

문학적 재구성을 통해서,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까지 인식의 공간을 협상해냄시롱 더 나아가 감정이입과 대항기억의 지평을 넓히는 이 작품은, 역사적 망각에 맞서 끊임없이 재기억의 제식이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다는 점을 다시금 일러준다.

트린 민하가 지적한 대로 "세계 최초의 아카이브 혹은 도서관은 여성들의 기억"이었고,

차학경이 <딕테>에서 말한대로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냐고?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래된 상처를. 오래된 감정을 또다시 말이다.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지금 그것을 명명함으로써 다시는 망각 속에 잊혀진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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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 페미니즘, 서구문화, 몸
수전 보르도 지음, 박오복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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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몸읽기 기본필수강좌 101." 이 책이 출간된지 10주년을 기념하여 저자가 2003년 서문에서 이 책을 소개한 말이다. 몸에 대한 "인식 페다고지"라고.

여성들의 불량한 먹기는 20세기 후반 문화적 불만의 중층결정적 결정판

여성들의 불량시련 먹기(eating disorder식습장애)야말로 우리 시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결정판이라는 게 보르도의 핵심 논의 중 하나이다. 거식증 환자의 80%가 여성인데, 우선 거식증을 개인적으로 병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보르도는 이미지들의 제국, 소비문화 사회에서 (여성)자아가 구성되는 방식을 재미나게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통제윤리를 요구하는 소비자본주의의 모순적 긴장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험하고 자아를 구성한다.

얼짱, 몸짱이 될라고 왼갖 난리를 떠는 여성들은 이런 소비자본주의에 쉽사리 넘어가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이런 개같은 세상에서 무엇이 성공으로 연결되는 길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다.

이것은 거식증만이 아니라 바디빌딩도 마찬가지인데, "우리시대 몸-페티시는 점점 더 관리불가능해지는 문화에서 자기-지배관리라는 환상"을 나타낸다. 얼짱, 몸짱이란 우리 시대 몸에 대한 강박이 철저하게 젠더권력 관계를 따르고 있으며, 이런 것으로써 날씬한 몸이란 탈중심화된 우리 시대 권력이 순응적인 신체들을 맹글어내고 정상화하는 기제들 중 하나라는 게 보르도의 논의.

재생산권: 생명이나 선택이냐는 여성의 인간성성취에 대한 공격

법과 의료테크놀러지가 만나는 지점.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세계가 의식적 주체들과 단순한 몸뚱아리로 쪼개어지는 역사깊은 현상을 목도한다. 무엇보다, 여성의 임신을 둘러싸고 여성은 온데간데 사라져줘야 허는 소멸점이 된다. 임신한 여성은 "태아의 인큐베이터"이자 그것의 "감옥"이라는 널리퍼진, 그러나 보수적인 견해를 따져 보자면, 법적인 온전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아직 햇빛을 받아보지도 못한 태아!다. 재생산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논쟁은 임신한 여성의 주체권을 박탈하는 이런 방식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적 통일성과 도덕적 자율성을 다시 챙겨오고, 임신을 단순한 '태아배달'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심오하고도 경험적인 사건으로서 보는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몸들: 초월하려고 지랄 좀 떨지 마라.

포스트모던한, "쿨"한 시대에 객관성, 중립성, 보편성은 (최소한 이론적으로) 불신받는 개념들이 되었다. 이런 개념들의 젠더편향성과, 모든 지식의 근본적인 편파성을 밝히는데 아마도 페미니즘의 공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객관성이니 중립성, 보편성을 대신해서 들어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프로정신'이다. 이 '프로정신'은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진입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20세기 후반, 21세기 초 우리 시대 판본의 젠더 훈육 코드이다. 결국,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가치들을 "초월"하여 남성들만큼/보다 더 잘해보라는 그럴 듯하지만 순 착취논리.

자신이 연루된 곳에서, 초월하려고 지랄하지 말고 꽃피어라(Bloom rather than transc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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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페미니즘
리타 펠스키 지음, 김영찬 옮김 / 거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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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급진 운동과 이론의 핵심 동력은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은 현대성(이 책에서 '근대성'으로 번역됨)이 늘상 남성성과 연결되었다는 것이야말로 현대성 및 모더니즘 연구를 둘러싸고 젠더 정치학이 분명하게 작동되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게다가, 현대성(근대성)에 관해서라면 꼭 읽어야 하다시피 된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와 데이비드 하비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한울)을 보라. 이 두 권의 책이 현대성,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티/즘을 이해하는데 탁월한 책인게 분명해도, 버만과 하비의 논의 역시 젠더 문제로만 가면 그 맹점을 분명히 노정한다. 예컨대, 버만의 책은 경쟁력있고 그래서 상호경쟁하는 모던 맨들(괴테, 파우스트, 맑스, 보들레르 등)로 가득차 있고, 유물론적 시각에서 쓰여져서 그나마 봐줄만한 하비의 책에서도 근대성과 탈근대성(포스트모더니티) 형성 과정에서 분명하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여성들에 대한 언급과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여성들만의' 현대성을 운운하는 것 또한 본질주의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즉, 남성성/여성성 한쪽만의 일방성이 실제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실재계의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성이 사실은 수정(revision)과 경합(contestation)이라는 끝없는 과정에 열린,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점, 즉 우리의 재구성에 열린 것이라는 점을 설득력있게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펠스키는 현대성과 이를 둘러싼 담론들에 젠더, 젠더 정치학이 뒤엉켜 있으며, 현대성을 젠더로 표상, 분석하는 젠더 상징주의가 불가피하게 현존하며, 또한 젠더 형상화의 위력 역시 현대성에서만큼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다는 진단으로 시작한다. 펠스키의 작업은 그간 매우 남성중심적인 (그러면서도 그 젠더 맹안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성/모더니즘 이론들을 해체시켜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펠스키가 (페미니즘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띨띨하게스리 "여성적인" "여성만의" 현대성이라는 대항이론을 세우려는 오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펠스키는 현대성과 젠더 정치학을 읽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꼼꼼히 읽어낸다. 그러면서, 여성성, 남성성을 환원적으로 다루는 작태나 여하한 총체화하는 (그러므로 은근슬쩍 목적론적인) 서사에 반대하면서 현대성의 복잡성, 그리고 딱 하나로 똑부러지게 잡히는 것이 아닌 다가성을 강조하는 접근을 선택한다. 문화사와 문화이론을 탁월하게 절합함으로써.

서구 제1세대 페미니즘과 여성투표권 옹호론자들이 식민지 제3세계를 향해서는 겁나게스리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꼼꼼이 밝히는 장 또한 재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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