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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살와 바크르 지음, 김능우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핍박받는 사람들의 구성진 이야기는 언제나 좋은 이야깃거리다.
우리는 흔히 눈물을 흘리며 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도 '재미있었다'고 회고하지 않던가.
책으로 쓰여진 이야기, 특히 소설은 그 안의 언어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재미있게 읽혀야 좋은 소설로 기억될 수 있다.
이 책이 그래서 나는 '슬프고도 재미있었다'는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
한국만큼 여자들이 살기 좋은 나라도 없다는 말이 일부 피해의식에 빠진 남자들이 하는 소리라고 치부해 왔건만
확실히 이 책에 등장하는 아랍권의 여인들의 사연을 보다보니
내가 이 시대, 이 나라, 내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아지자를 비롯해 다른 여성 수감자들의 가지각색 사연들이 얼마나 원통하고도 애절한지..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여성성 밖에는 없는 사연 속 주인공들이 그 여성성으로 인해 고통받게 되고, 그 고통을 이겨내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한 죄로 감옥에 들어오게 된 원인의 배후에는 바로 '이집트'라는 공간적 배경이 있었다.
아랍권 문화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여성 수감자 전용 감옥 안에서도 히잡을 써야 할 정도로 보수적인 그 나라에서
여인들은 부모 때문에, 형제 자매 때문에, 자식 때문에 자신을 버려야 했으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는 순간 그녀들은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온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새 남편을 사랑해서, 남동생의 죄를 대신해서, 재혼을 허가받지 못해서, 찢어지는 가난을 구제할 길이 없어서, 남편의 폭행을 견딜 수 없어서, 자식을 먹여살려야 해서 등등
갖가지 이유로 감옥에 들어온 여자들에 대해
아지자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들을 동정하고 그녀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녀들의 노고와 착한 마음씨를 치하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황금마차에 올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오직 '타인'에 의해 괴로움을 겪은 여인들이 온전한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과 함께 동승할 여인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태울 것인지 결정이 끝나고 나면 당사자에게 가서 은밀하게, 아주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때가 됐어요. 준비하세요. 내가 당신을 황금 마차에 태워 하늘로 데려갈 거예요."
아, 난 아지자의 그 기분을 알 것만 같다.
비록 현실이 아니더라도, 나의 상상 속에서라도 자유를 주고, 풍요로움을 주고, 웃음을 줄 수 있는 그 누군가에게
나의 이성과 맞바꿔서라도 그들과 함께 행복해 지는 상상을 하는 그 기분을 왠지 알 것만 같다.
하지만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그녀들의 유토피아는 결국 실현되지 않는다.
그녀들의 행복은 그녀들 이외의 존재가 전부 사라지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의 문체 사이사이에서 빛나는 이집트 사회를 꼬집는 위트는
비단 고통받는 50-70년대 이집트 여성들 뿐만 아니라
비슷하게 순결과 정조를 강요받았던 우리의 옛 조상들의 아픔까지 떠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문장의 사이사이에서 세밀하게 묘사되는 이집트 사회의 부조리와 악습의 잔재 등은
이 상처받은 여인들을 범죄의 소굴로 내몬 것이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사회와 남성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성으로 태어난 죄를 톡톡히 물어야 했던 그 시대 이집트와 우리의 옛 조선.
21세기 오늘날에도 아프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어야 하는 여인들의 기구한 운명은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 있을 것이다.

수감 여성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늘어놓는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띄엄띄엄 읽어도 부담이 없고
아지자의 황금마차에 누가 오를 수 있을 것인가라는 궁금증은 책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처음 읽어본 아랍권 소설, 그것도 여성 작가의 시선.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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