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시절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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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는 세계 어느 곳이든 혼란스럽고 무기력했다.
특히 이 소설 속 소녀 엔리카가 살아가는 이탈리아의 어느 소도시도 그랬을 것이다.
희망보다는 체념과 묵인이 살아가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을 그 시공간 속에서
소녀의 육체는 나약했고 유혹에 쉽게 흔들렸다.
이 소설을 설명하는 문구에서처럼 이 소녀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판단을 내릴 시간이 없이 시간에 등떠밀려
먼저 어른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잔소리가 심했지만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보험회사 직원이지만 새장을 만드는 데 더 열심인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언젠간 저 새장 안으로 들어가고 말거다'라고 말한다.
엔리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허술하게 쳐 놓은 새장 밖으로 드나들며
자신의 성을 팔고 미래가 없는 남자를 사랑하며 아이를 가졌다가 지운다.
그리고 어느날 드디어 그 새장 밖으로 정말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무의미한 사랑을 하고 인생을 돌보지 않는 어른들 틈에서 빠져나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열일곱을 살아왔던 소녀에게
사회는 어떤 미래를 가져다 주었을까.
이것이 단지 잠시잠깐 스쳐가는 '방황의 시절'이었길 바라고 싶지만
소녀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고 스쳐보낸 것은 아닌지...

섹스 이후의 임무에 여전히 소홀한 남성들의 이기심과
허무맹랑한 사랑의 환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현실감각 제로인 백작부인,
장례를 돕는 척 하면서 어머니의 물건을 모두 훔쳐가 버린 윗층 아줌마와
스스로 만든 새장 안에 갇혀 밖을 돌보지 않는 무능력한 아버지,
순수했지만 소녀의 마음을 열기에는 부족했던 소년 카를로.
모든 것이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녀는 축 늘어진 가슴과 뱃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 위해, 초점 없는 눈빛에 술잔을 손에 든 백작부인의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내일 새벽이면 백작부인의 집을 나가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설 것이다.
우울한 잿빛을 연상케 하는 60년대를 벗어나는 새로운 세대들의 도약은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엔리카의 앞날에,
그리고 그다지 다를바 없는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의 앞날에 상처보다는 행복이 있기를.


유럽의 잿빛 하늘 아래 소녀들 - 관련 영화 :

2009/01/08 - [신씨의 리뷰/영화] -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 (2007, 크리스티앙 문주)_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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