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원고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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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고는 2022 신춘 문예에 입상한 등단 작가 5명이 만든 앤솔로지이다. 각기 다른 단편 5개가 엮여있는데, 다 읽고 난 뒤의 첫 감상은 오랜만에 정말 재밌는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실제적으로는 작가들의 두 번째 원고가 아니겠지만 입상 이후, 다시 세상 밖으로 내보내지는 단편작인 점에서 '두 번째 원고'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첫 단편은 함윤이 작가의 규칙의 세계인데, 규칙과 미신 등이 나온다. 우리가 평소에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런 미신들이다. 문지방, 문턱을 밟으면 그 집안의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의 목을 밟는 것과 같다고 좋지 않다는 미신부터 시작해서 밤에는 산을 오르면 안 된다, 가구나 거울 등은 밖에서 함부로 주워오면 안 된다, 밤에 휘파람을 부르면 뱀이 나온다든가 그런 미신들이 차례로 다뤄진다. 재밌는 건 다루는 미신이나 규칙들이 전부 한국의 미신들인데 이 미신과 규칙을 끙끙 신경 쓰는 것은 각개각국의 룸메이트들이라는 것이다. 규칙과 미신을 어겨 낭패를 보기도 하고, 역으로 이용하기도 하는 '규칙의 세계'이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첫 단편을 재미있게 읽으니 다음 단편들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릴러를 참 좋아하는 내게는 제목부터 강하게 끌렸던 '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 임현석 작가의 작품이다. 이 단편은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다. 받는 이인 '교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하소연하며 시작되는 이 내용은 한편의 편지이기도 하고, 협박문이기도 하며, 일종의 고백이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짤막하게 이렇게만 적어 본다. 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구구절절 하소연하며, 자신의 스승인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차분히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어느정도 결말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결말에는 처음과 다른 분위기가 감돈다. 과연 현대문학 강의는 말 그대로 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될까?

세 번째 단편은 유주현 작가의 꿈과 광기의 왕국이다. 첫 도입부부터 너무 나를 사로잡았다. 언덕 위의 그 불길한 집을 향해,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처벅처벅 걷는 그 도입부부터가 너무. 그 집에서는 집과 관련된 괴담이 으레 그렇듯 사람이 계속 죽어나간다. 처음에는 집을 지은 집주인이, 그 다음에 들어온 집주인은 목을 매달고, 세 번째의 신혼부부도 끔찍한 결말을 맞고..... 그리고 네 번째 입주자가 생겼으니 마을 반장 격인 화자의 고민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렇게 그 집으로 향하는데 거기에는 상상 이상의 괴인(?)이 살고 있는 것이다. 20대의 젊은 여자. 혼자서 그 집에 살겠다고 들어왔고, 그 집에 앞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었는데도 '오히려 좋아'라며 입주를 택했다는 그 20대의 젊은 여자는... 단언컨대 내가 이 날 이때껏 읽어온 한국 소설 중에 단연코 괴이하고 입이 쩍 벌어지게 놀라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당황으로 시작한 이 여자와의 만남은 사람들 앞에서 단 한번의 기 눌림도 없던 (당연함. 마을 반장 격임.) 화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몰아세우고 그곳에서 도망치게끔 만든다. 처음에는 그냥 오버스러운 캐릭터인가 싶었지만 마지막에 화자 앞에서 칼을 들고 보였던 몸짓에는 내가 다 기가 질려서 차라리 화자가 그 집에서 한시바삐 삐질삐질 도망쳐 나오길 원할 정도였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에 그 집에서 나온 화자가 다른 인물과 나누는 대화가 정말 압권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번째 단편, 박민경 작가의 긴 하루는 최근 SF만 읽기 바빠 잠시 잊고 있었던 한국 소설의 어떤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이 짧은 단편에서조차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다니. 단편은 무조건 짧고 굵은 재미로 읽는 게 아니겠냐는 내 편협함을 깨주었다. 읽으면서 나는 중년의 화자에 이입하여, 아버지에게 전부나 다름 없는 차를 달라고, 그거 가지고 책이나 여기저기 팔러 다니며 여행이나 다니겠다는 소릴 하는 아들을 참 갑갑하게 바라보았다. 요즘 MZ세대이다, 젊은 90년대 생들이 온다는 얘기가 참 많은데 나는 MZ가 아닌가? 하지만 친구랑 얘기해도 다들 나와 비슷한 가치관과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다지 파격적이거나 '답도 없는 철딱서니 어른이'는 아닌데. 집시처럼 사는 게 희망이면 모르겠지만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서 무슨 책을 팔러 다니겠다는 건지. 심지어 책을 읽는 나조차도 책은 동네 서점 아니면 온라인 플랫폼으로 구매하는 게 다이거늘. (가끔 당근!) 낡은 스타렉스에 책을 싣고 여행이나 다니겠다는 말이 하도 갑갑해서 참 인상적으로 남았다. 코로나19 이후에 차박이니 카 캠핑이니 그런 게 늘었다는 것도 알지만. 돈은 어디서 계속 나오고? 책이 정말 생활할 만큼 팔릴까? 차도 당장 없어서 낡아빠진 아버지 차 달라고 하는 신세에? 내가 화자인 듯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결국 결말도 예상한 대로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무엇보다도 화자는 노인 혐오를 두려워 하고 있었다. 늙으면 면허증 뺏어버려야지. 고령 운전자가 차 사고를 내면 으레 그런 댓글들이 뉴스며, 커뮤니티 댓글란에 차곡히 쌓인다. 나 역시 그런 뉴스들을 자주 접하며 고령은 정말 금방 뭐 하나 깜빡하기 쉬운 나이고, 다리에 힘도 잘 안 들어가는 나이 아니겠냐며 그런 댓글에 쉽게 동의했던 기억이 있다. 다들 알아서들 반납 좀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고. 하지만 모든 노인이 알츠하이머를 앓는 게 아닌 것처럼, 모든 노인이 운전에 다 미숙해지고 사고를 일으키는 게 아닌데. 요즘은 몇 개의 큰 사건들로 전체를 일반화한다. 비단 이런 주제 뿐만이 아니라도 말이다. 하나, 둘 더해지는 일에 말도 하나, 둘 얹히면 그렇게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언젠가는 노인이 될 텐데, 별 문제 없이 살고 있어도 노인이라는 이유로 타인으로부터 쉽게 무언가를 포기하라거나 으레 못하겠지, 힘들겠지 지레 짐작을 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젊은 지금은 노인들에게 그런 지레 짐작을 하지 않는 젊은이가 되어야겠지.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단편이었다.

다섯 번째 단편은 태엽은 김기태 작가의 12와 2분의 1바퀴인데, 난해한 제목을 보고 사실 지레 겁을 먹었더랬다. (숫자와 안 친하다.) 근데 정말 태엽은 12와 2분의 1바퀴... 문장 그 자체였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 화자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의 한 곳을 장식한 오래된 괘종시계의 태엽 얘기다. 세월을 먹으며 느슨해졌는지, 12바퀴쯤 돌리면 태엽이 끝까지 감기던 시계가 지금 돌려보면 12바퀴하고도 반을 더 돌려야 끝까지 감기는 것이다. 한 자리에서 오랜 세월 여관부터 게스트 하우스까지 운영하던 화자와 예전, 여관이던 시절에 묵었다는 손님이 세월이 흘러 다시 묵으러 온 큼지막한 이야기 사이에 세월에 관한 화자의 이야기가 촘촘히 담겨있다. 딸에 대한 애정이 그중 가장 돋보였고. (화자 같은 아버지를 두다니, 화자의 딸이 부러웠다.) 본편의 이야기와는 달리 도입부를 장식한 콤비의 이야기가 너무 즐거웠다. 보자마자 한참 웃었고 친구에게 이 책 너무 웃기다고 보여주기까지 했다. 통감자! 하고 외치던 부분부터 시작해서 차 위에 통감자를 두고 탔다고, 아직도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 정말 많이 웃었다. 휴게소 가고 싶다. 짭조름하게 졸인 알감자 맛있는데.........

서평과는 다른 얘기지만 사계절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그믐'이라는 컨텐츠가 너무 좋았다. 내가 재밌게 본 작품의 작가와 직접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니! 모두 사계절 출판사에게 박수를....!! 너무 귀하고 좋은 컨텐츠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심소심하게 가서 작가님 너무 재밌어요... 너무 잘 읽었어요... 항상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주절주절 덕심으로 떠들고 와도 너무 좋고..... 다들 그믐 해보세요...!

*이 서평은 출판사 인디고(글담)에게 도서를 제공 받아 쓰여졌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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