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쁨 기록 생활 - 행복은 셀프. 좋은 순간을 채집하는 행복 기록 일기장
김혜원 지음, 림예 그림 / 인디고(글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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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아기자기한 책이 왔다.

이런 책을 서평 도서로 받은 건 처음이라 조금 설레기도 했다. 어떤 내용을 적으면 좋을까?

사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MBTI(라는 인터넷에 널린 불확실한 사람 유형 16가지 분류에 따르면)는 INFP라는데 귀찮음과 게으름이 상상의 나래를 종이에 마음껏 펼쳐놓는 것보다 강한지, 나는 기록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중요한 일정이나 가끔 해야 하는 메모 같은 건 충실하게 하는 편이지만 매일이 별 다를 게 없고 시시하고 허무하다고 많이 느끼는 통에 어느 순간부터는 좋아하는 다이어리도 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연말을 내 생일보다 좋아한다. 겨울이고, 눈이 오고, 세상이 반짝거리고 들떠있고, 크리스마스가 있고, 새해가 있다. 그런 이유로 연말연초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1월 페이지를 펼치고 대충 10일 정도만 열심히 쓰고 그 뒤부터는 내내 백지인 다이어리의 미래를 알면서도 교보문고 핫트랙스 등에 가거나 온라인의 예쁜 팬시 문구 용품을 파는 곳들을 시간 들여 들어다보던 내 취미도 그렇게 증발했다. 올해 2023년의 내 다이어리는 회사의 세무를 맡고 있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나눠 준 업무용 다이어리와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게 너무 많다며 준 현대해상(나는 현대 보험도 없는데) 다이어리가 되시겠다.

그렇지만 나는 책에 대한 애정을 아직 놓지 못했다. 놓지 못하기는커녕 더 집착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디서 허리케인이라도 불어와서 내 방을 통째로 어디 무인도로 실어간다면 나는 기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2030년이 될 때까지 방에서 절대 나오지 않고 책만 주구장창 읽어도 될 정도로 책을 모으고 있다. 종이책, 이북,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이 책도 나의 수집 도서에 한켠을 차지하게 되었다.

도서가 온 날, 제일 먼저 책을 촤라락 훑어보았다. 특이했다. 책이 아니었다. 아이들 교육용 책자처럼 이렇게 저렇게 해보세요, 하고 넌지시 권유하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붙은 만년 다이어리었던 것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이렇게 작은 책이 앞뒤 판이 단단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디에서라도 적으라는 얘기겠지. 침대 밖으로 한발짝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도 침대에서 적을 수 있도록 판이 단단한 것이리라.

작은 기쁨을 기록하라는 책의 내용과는 다르게 나는 요즘의 불투명한 내 미래와 눈밭에 파묻힌 것처럼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내 사정과 나의 조국의 사정과 나아가 세계의 사정 걱정만을 착실히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나인 것을 어쩌랴. 기록하는 곳에 거짓을 옮겨 담지 않으려는 데에도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적어보지 않은 자들은 모른다. 나만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을 적어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일이 얼마나 잦은데.

공들여 예쁘게 적지 않는다. 꾸미지 않는다. 그런 건 내게 사치였다. 공들여 꾸미려면 예쁜 토끼 스티커와 각양각색의 펜들로 별 말을 다 써야 하는데 나는 아직 2023이라는 숫자와도 친해지지 않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연말연초를 행복하게 느끼고 있지도 않다. 완전히 엉망인 요즘의 내 삶에 반짝반짝한 것은 없다. 나는 꺼내려던 펜을 도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건 다이어리가 아니잖아요? 책이 나에게 건네는 말 같았다. 파스텔톤의 조금은 진한 하늘색 책이, 작은 파랑새처럼 "작은 기쁨을 실천해보고 기록하라니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아. 이거 일기장 아니지.

나는 펜을 다시 꺼내서 내가 기록한 요즘의 삶에 군데군데 작게나마 색을 입혔다. 아주 죽으란 법은 없다고, 작은 기쁨은 반드시 있었다. 나는 컵을 좋아한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독서용품, 이를 테면 책갈피를 좋아한다. 최근 예쁜 책갈피를 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해주려고 두 개를 샀다. 다음주에는 내 선물을 받을 당사자를 만나는 약속도 있다. 뿐인가, 나는 요즘 고양이들에 푹 빠져있다. 내가 기르는 것은 아니고, 아니지, 내가 기르는 건가? 길고양이인데, 완전한 길고양이는 아니고, 내 손을 타버린 사무실 마당의 고양이들이다. 원래 내가 가끔 밥을 주던, 회사에 자주 출몰하던 삼색 고양이가 하나 있었다. 안 지 오래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떡집에서 파는 콩떡처럼 하얀색, 갈색, 검은색 3색이 섞인 삼색 고양이은 대부분 암컷이라고 한다. 그 고양이도 암컷이었다. 내게 밥도 그렇게 많이 얻어먹지 않았는데 살이 좀 쪘다 싶더니, 임신이었던 것이다. 새끼를 넷이나 낳은 콩떡이는 새끼들이 태어난 지 한달을 넘기자마자 동네 개에게 물려 죽었다.

새끼 고양이 네 마리 만이 남았다. 콩떡이에게 착실히 '인간을 경계하라'는 교육을 받았는지 내게 절대 다가오지도 않고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하악질부터 하는 성격 더러운 새끼 고양이 네 마리 만이.

나는 당장 고양이 사료부터 검색했다. 연령에 관계없이 새끼부터 성묘까지 다 먹을 수 있는 고양이 사료, 간식 등을 정신없이 샀다. 어미 잃은 새끼들이 죽을까봐 너무 걱정되었다. 콩떡이는 다 큰 성묘였고 길에서 아무거나 주워먹는 영락없는 길냥이였다지만 쟤넨 너무 아기였다. 너무 어렸다. 아무거나 대충 먹게 둘 수 없었다. 회사 근처의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다른 고양이와 다투는 것도, 동네의 큰 개들을 마주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너무 위험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한겨울까지 왔다.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같이 있다보니 고양이 사남매는 이제 내게 하악질을 하지 않는다. 내 손에 제 이마를 들이밀고 쓰다듬을 요구하거나 야옹야옹 울면서 엉덩이를 두들겨 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그 아이들이 요즘 내 삶의 최고 기쁨이자, 관심사다.

나는 서둘러 책에 고양이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형광펜으로 예쁘게 색도 입혔다. 그리고 엊그제는 눈이 내렸다. 나는 비를 지나치게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눈은 또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지나치게 좋아하는 눈이 내렸으니 그것도 작은 기쁨이다. 책에 서둘러 눈이 내렸다고 적었다.

그렇게 완성한 지난 주 페이지는 이렇다.

 
 

이 책에 쓰여있는, 매일 쓰는 물건이 예뻐야 한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매일 쓰는 물건이 예뻐야 한다고, 그래야 일상이 반짝거릴 수 있다고. 매일 쓰는 안경, 매일 쓰는 물컵, 매일 쓰는 수건, 매일 쓰는 수저, 매일 쓰는 침구, 매일 보는 인형, 매일 손에 쥐는 핸드폰 케이스. 분명 큰 돈 들지 않는 작은 것이지만 내 취향으로 채우면 분명 순간 순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그냥 예뻐 보이는 것은 안 된다. 내 취향과 철학을 오롯이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컵을 예로 들자면, 단순히 디자인만 예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손에 쥐는 그립감은 어떤지, 손잡이에 손을 넣고 잡으면 어떤지. 입술이 닿는 부분은 두꺼운지 얇은지. 전자레인지나 식기세척기를 쓸 수 있는 내열 강화 재료로 만든 것인지, 아닌지. 견디는 온도는 몇 도에서 몇 도까지인지. 물론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물품을 만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 합격점에 가까운, 좋은 물건을 고르면 된다. 나는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달그락 거리는 컵의 소리를 좋아한다. 머그컵, 유리켭 가리지 않고. 요즘은 변색컵에 관심이 많다. 골드림을 두른 컵을 좋아한다. 입에 닿는 부분이 두꺼운 걸 좋아하지만 너무 두껍거나 무거운 건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나의 취향과 철학을 오롯이 반영한 물건을 찾아 곁에 두고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루의 행복을 만드는 작은 순간 순간이라고, 나도 동의한다.

밖에서 하루종일 추위와 피곤에 싸워 지쳐서 다크서클이 내려온 채로 집에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다 내팽겨치고 싶고 옷도 갈아입기 싫어서 그대로 확 누워버리고 싶은 충동과 욕구를 억누르며 옷을 갈아입고, 손발을 씻고, 짐을 정리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오후 10시 이후다. 몸이 저릿하게 익도록 뜨거운 물로 씻고 몸의 물기를 꽉꽉 눌러짠 나에게서 풍기는 향기로운 향에 감싸이는 시간 말이다. 그렇게 샤워를 마친 뒤에는 내가 좋아하는 컵에 좋아하는 티백을 담고 따뜻한 물을 담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 옆에 읽는 중인 책을 둔다. 예쁜 책갈피를 고르고 좋아하는 필기구와 노트를 그 옆에 두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핸드폰과 연결해 잔잔한 음악을 튼다. 그리고 비로소 책장을 열고, 넘기는 데에 푹 빠지는 것.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시간이다.

요즘의 내 생활은 완전히 엉망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언가를 공부하기에는 의지도 노력할 기운도 없고, 잔고는 늘 아슬아슬하고, 뉴스와 인터넷 기사로 접하는 세상은 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분노케 한다. 정리되지 않은 방에서 책이며,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서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혀 있고, 서른을 앞두고 대체 어떻게 살 지 도대체가 감이 서지 않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인정한다. 하루에는 분명 작은 기쁨의 순간들이 별처럼 톡 하고 튀어나오듯 있다.

따뜻한 밥을 입 안에 넣을 때, 좋아하는 반찬을 씹을 때, 온종일 추위에 떨다가 마시는 칼칼한 국물이라든가, 따뜻하고 향긋한 차라든가. 발밑에서 야옹야옹 울며 쓰다듬기를 요구하는 고양이와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노래를 랜덤 플레이리스트에서 발견하는 순간 같은 것.

인지하지 않으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정말 작은 기쁨과 행복이라 놓칠 수 있지만, 다시 되돌아보고 떠올려보면 분명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기뻤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걸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주에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기분이 정말 별로라면, 치약이나 칫솔을 바꿔보는 게 어떻냐고. 그냥 매운 치약 말고 누군가 효과가 좋다고 추천하던 허브 향이 나는 치약은 어떠냐고. 칫솔모가 다 뻗친 칫솔을 새 거로 바꿔보지 않겠냐고. 퇴근할 때의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보면 어떻냐고. 그날 먹었던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인지 떠올려 보라고. 거창하게 하루에 있었던 온갖 일들을 쓰라는 게 아니라고. 그냥 그날 있었던 가장 좋았던 순간을 적어보라고. 그 순간이 왜 좋았느냐고. 갖고 싶던 걸 사서, 오래 찾았던 걸 드디어 발견해서, 오랜 친구와 약속을 잡아서, 길을 걷다가 귀여운 강아지가 산책하는 걸 봐서. 그런 자잘한 순간들을 기록하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반복해서 좋다고 적었던 것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취향을 찾을 수도 있고, 정말 별일 없는 허무한 하루라고 생각했던 날에도 그래도 그날 무엇을 했었지, 하다못해 처음 가보는 카페에서 아무렇게나 골라 마셨던 음료가 참 괜찮았지 라고 적을 수 있을 거라고.

빈칸과 빈 공백을 전부 글자로 채울 필요도 없고 예쁘게 꾸밀 필요도 없다. 이미 예쁘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잔뜩 그려져 있으니까. 그냥 펼쳐서 오늘 문구점 가서 예쁜 연필 한 자루 샀다 라고만 쓰고 덮어도 좋다. 나중에 들춰보면 그런 작은 기록들이 모여서 내가 일년에 이만큼 좋은 일이 많았다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부담없이 빈 곳이 늘어나도 죄책감 없이 이런 거 저런 거 적어보자. 내 하루가, 일상이, 삶이 작은 기쁨에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이 서평은 출판사 인디고(글담)에게 도서를 제공 받아 쓰여졌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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