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고 아기자기한 책이 왔다.
이런 책을 서평 도서로 받은 건 처음이라 조금 설레기도 했다. 어떤 내용을 적으면 좋을까?
사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MBTI(라는 인터넷에 널린 불확실한 사람 유형 16가지 분류에 따르면)는 INFP라는데 귀찮음과 게으름이 상상의 나래를 종이에 마음껏 펼쳐놓는 것보다 강한지, 나는 기록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중요한 일정이나 가끔 해야 하는 메모 같은 건 충실하게 하는 편이지만 매일이 별 다를 게 없고 시시하고 허무하다고 많이 느끼는 통에 어느 순간부터는 좋아하는 다이어리도 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연말을 내 생일보다 좋아한다. 겨울이고, 눈이 오고, 세상이 반짝거리고 들떠있고, 크리스마스가 있고, 새해가 있다. 그런 이유로 연말연초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1월 페이지를 펼치고 대충 10일 정도만 열심히 쓰고 그 뒤부터는 내내 백지인 다이어리의 미래를 알면서도 교보문고 핫트랙스 등에 가거나 온라인의 예쁜 팬시 문구 용품을 파는 곳들을 시간 들여 들어다보던 내 취미도 그렇게 증발했다. 올해 2023년의 내 다이어리는 회사의 세무를 맡고 있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나눠 준 업무용 다이어리와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게 너무 많다며 준 현대해상(나는 현대 보험도 없는데) 다이어리가 되시겠다.
그렇지만 나는 책에 대한 애정을 아직 놓지 못했다. 놓지 못하기는커녕 더 집착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디서 허리케인이라도 불어와서 내 방을 통째로 어디 무인도로 실어간다면 나는 기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2030년이 될 때까지 방에서 절대 나오지 않고 책만 주구장창 읽어도 될 정도로 책을 모으고 있다. 종이책, 이북,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이 책도 나의 수집 도서에 한켠을 차지하게 되었다.
도서가 온 날, 제일 먼저 책을 촤라락 훑어보았다. 특이했다. 책이 아니었다. 아이들 교육용 책자처럼 이렇게 저렇게 해보세요, 하고 넌지시 권유하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붙은 만년 다이어리었던 것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이렇게 작은 책이 앞뒤 판이 단단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디에서라도 적으라는 얘기겠지. 침대 밖으로 한발짝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도 침대에서 적을 수 있도록 판이 단단한 것이리라.
작은 기쁨을 기록하라는 책의 내용과는 다르게 나는 요즘의 불투명한 내 미래와 눈밭에 파묻힌 것처럼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내 사정과 나의 조국의 사정과 나아가 세계의 사정 걱정만을 착실히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나인 것을 어쩌랴. 기록하는 곳에 거짓을 옮겨 담지 않으려는 데에도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적어보지 않은 자들은 모른다. 나만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을 적어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일이 얼마나 잦은데.
공들여 예쁘게 적지 않는다. 꾸미지 않는다. 그런 건 내게 사치였다. 공들여 꾸미려면 예쁜 토끼 스티커와 각양각색의 펜들로 별 말을 다 써야 하는데 나는 아직 2023이라는 숫자와도 친해지지 않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연말연초를 행복하게 느끼고 있지도 않다. 완전히 엉망인 요즘의 내 삶에 반짝반짝한 것은 없다. 나는 꺼내려던 펜을 도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건 다이어리가 아니잖아요? 책이 나에게 건네는 말 같았다. 파스텔톤의 조금은 진한 하늘색 책이, 작은 파랑새처럼 "작은 기쁨을 실천해보고 기록하라니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아. 이거 일기장 아니지.
나는 펜을 다시 꺼내서 내가 기록한 요즘의 삶에 군데군데 작게나마 색을 입혔다. 아주 죽으란 법은 없다고, 작은 기쁨은 반드시 있었다. 나는 컵을 좋아한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독서용품, 이를 테면 책갈피를 좋아한다. 최근 예쁜 책갈피를 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해주려고 두 개를 샀다. 다음주에는 내 선물을 받을 당사자를 만나는 약속도 있다. 뿐인가, 나는 요즘 고양이들에 푹 빠져있다. 내가 기르는 것은 아니고, 아니지, 내가 기르는 건가? 길고양이인데, 완전한 길고양이는 아니고, 내 손을 타버린 사무실 마당의 고양이들이다. 원래 내가 가끔 밥을 주던, 회사에 자주 출몰하던 삼색 고양이가 하나 있었다. 안 지 오래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떡집에서 파는 콩떡처럼 하얀색, 갈색, 검은색 3색이 섞인 삼색 고양이은 대부분 암컷이라고 한다. 그 고양이도 암컷이었다. 내게 밥도 그렇게 많이 얻어먹지 않았는데 살이 좀 쪘다 싶더니, 임신이었던 것이다. 새끼를 넷이나 낳은 콩떡이는 새끼들이 태어난 지 한달을 넘기자마자 동네 개에게 물려 죽었다.
새끼 고양이 네 마리 만이 남았다. 콩떡이에게 착실히 '인간을 경계하라'는 교육을 받았는지 내게 절대 다가오지도 않고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하악질부터 하는 성격 더러운 새끼 고양이 네 마리 만이.
나는 당장 고양이 사료부터 검색했다. 연령에 관계없이 새끼부터 성묘까지 다 먹을 수 있는 고양이 사료, 간식 등을 정신없이 샀다. 어미 잃은 새끼들이 죽을까봐 너무 걱정되었다. 콩떡이는 다 큰 성묘였고 길에서 아무거나 주워먹는 영락없는 길냥이였다지만 쟤넨 너무 아기였다. 너무 어렸다. 아무거나 대충 먹게 둘 수 없었다. 회사 근처의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다른 고양이와 다투는 것도, 동네의 큰 개들을 마주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너무 위험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한겨울까지 왔다.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같이 있다보니 고양이 사남매는 이제 내게 하악질을 하지 않는다. 내 손에 제 이마를 들이밀고 쓰다듬을 요구하거나 야옹야옹 울면서 엉덩이를 두들겨 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그 아이들이 요즘 내 삶의 최고 기쁨이자, 관심사다.
나는 서둘러 책에 고양이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형광펜으로 예쁘게 색도 입혔다. 그리고 엊그제는 눈이 내렸다. 나는 비를 지나치게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눈은 또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지나치게 좋아하는 눈이 내렸으니 그것도 작은 기쁨이다. 책에 서둘러 눈이 내렸다고 적었다.
그렇게 완성한 지난 주 페이지는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