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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밭을 새로 가는 사람 - 교육상생의 길을 찾아 확장한 김영효 자서전
김영효 지음 / 우리교육 / 2024년 1월
평점 :
강호의 고수가 나셨다. 교육 정글에 정의롭고 지혜로운 걸출한 고수다. 위인전을 보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지만 이 영웅은 제법 여유로운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다. 하지만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공짜는 없는가 보다. 가세가 기울고 기운 가세 때문에 고초를 겪으며 생활한다. 늘 고수에겐 탁월한 스승이 있는 법.
"네 이놈, 네 눈에 내가 불쌍하게 보이느냐? ...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 "
저자는 중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의 호통을 기억한다. 저자가 평생 화두로 삼았던 말이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타고난 신체적 우월함 덕에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곤궁한 경제적 여건 속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경험한 학교는 정글이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학생의 형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직 실적과 성과 내기가 전부인 학교였다. 장기 결석이 이어지고 급기야 학교를 포기하고 생계유지를 위한 일들에 전념한다. 이 경험이 교육 정글 정화를 위한 교육 운동과 대안교육 활동의 바탕이 된다. 교육 운동에서 초식을 펼치는 기본기를 단련한 과정이다. 읽어 보시라 재미난 무협지를 능가한다.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다진 기본기는 교사로 임용되자 '벌떡 교사'로 벌떡 선다. 책을 나는 삼 일 동안 읽었다. 이 책은 처음 무협지처럼 읽힌다. 대안 학교 이야기 부분에선 묵직한 교육학 책으로 변한다. 퇴임 후 이야기에선 산중 선승의 격언처럼 삶을 성찰하는 맑고 향기로운 느낌을 준다. 한 권의 책이 세 권의 느낌이 난다. 375쪽에 펼쳐놓은 김영효의 삶이다.
1980년이다. 군사 정권의 종말인가 했지만 군사 쿠데타와 광주민중 학살로 군사독재가 시작되던 시기다. 연줄과 뇌물 부조리가 공공연한 비밀이던 시기, 우리 강호의 고수의 활약이 시작된다. 이 시기 학교에는 젊은 교사들이 많았다. 경험이 부족했다. 부족한 경험은 더불어 함께 힘을 모아 해결했다. 학습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지원도 없었지만 서로 배우며 어러움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행정 권력은 강자 편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했고 부정의와 불공정, 권위주의, 관료주의가 공공연히 행해지던 시기다. 벌떡 교사들이 회의실에 나타났다. 교협이 조직되고 이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지난한 대정부 투쟁이 시작되었다. 선생님들은 대량 해직되었고 해직된 선생님들 중심으로 교육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해직된 저자는 전교조 결성 과정과 대정부 투쟁 활동은 가히 무협지에 등장하는 약자를 돕고 정의를 사수하는 강호 고수를 능가하는 전술 지휘관이 된다. 길다면 긴 시간의 해직 기간을 보내며 봉고차에 생활 도구를 싣고 조직을 이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돌아온 학교는 여전히 정글이었다. 해직까지 감수하면서 부수고자 했던 반교육의 벽은 아직도 굳게 버티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밭을 가는 과정이었다. 밭에 씨 뿌리고 가꾸는 일을 시작한다. 행정을 탓하고 부패한 관료주의를 험담한다고 참교육이 저절로 이뤄질 수는 없다. 저자는 대안교육 활동에 관심을 갖는다. 교육 정글에 대한 구조적 한계는 올바른 가르침과 배움으로 충만한 학교를 만들어야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꿈을 꾼다. 전남 최초 공립 대안학교인 청람중학교 개교에 참여한다. 이제 교사로서 교육 활동을 펼친다. 지금까지 교육 정글을 일구어 만든 밭에 씨를 뿌린다.
대안 교육에 대한 가감 없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교육은 프로그램 한두 가지를 적용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생활이 곧 교육이고, 가르침은 배움의 상호작용 과정이며, 그 바탕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공감과 신뢰라는 철학으로 임한다. 저자는 어떤 교육 프로그램도 한두 번 적용으로 배움이 일어날 수 없음을 사례를 통해 논증한다.
어떤 교육학 책보다 쉽게 이해되는 사례 중심의 학술서다. 그냥 따라 하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따라 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한 교육 프로그램은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있으나 대상인 아이들의 상황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아이들에게는 가장 적합한 것이었지만 새로운 상황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또 다른 우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현실에 맞는 행동'을 삶의 열쇠로 삼아 어려움과 힘든 곡절을 견딘 방편이기도 하다.
세월은 멈추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저자는 퇴임한다. 세 번째 퇴임 후 이야기가 펼쳐진다. 치열한 삶을 돌아보는 자유로운 영혼의 성찰 일기다. 성가신 잔소리가 아니다. 묵직한 삶의 흔적을 관조하면서 혼자 읍조리듯 내뱉는 성찰이다. 늘 화두처럼 두고 곱씹어 볼 생각들이다. 퇴임 후 장흥에 정착한 저자는 장흥지역 마을 학교 운동을 이끌고 있다. 마을학교 이야기를 읽는 맛도 참 쏠쏠하다.
저자와 나는 작은 생활의 인연이 있다. 대안학교인 청람중학교가 개교하고 2년 차 되던 해였다. 내가 발령받은 학교는 교원사택이 부족했다. 2년 차인 청람중은 기숙사와 교원 숙소가 이미 완공된 상태였다. 2학년까지 재학하고 있었기에 교원 사택에 여유가 있었다. 이런 사유로 일 년 동안 청람중 사택에서 생활했다. 퇴근이 다시 출근이다. 매일 학교에서 보이니 아이들은 나를 청람중 선생님으로 여겼다. 수업에는 들어오지 않는데 늘 아침저녁으로 함께 한다. 왜 수업에 들어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빙긋 웃어주었다. 저자의 교육 활동과 상담은 일과 후 밤 시간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 산책, 백팔배 사제동행, 병영성 걷기, 다모임, 텃밭 가꾸기, 사제 명상, 절 명상 등 작고 소소한 일들이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이어졌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안학교의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필 수 있었다. 내가 본 저자는 학교의 중심에 있었다. 교육은 '기다림'이란 저자의 철학을 체감하고 배웠다. 하지만 행동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정의롭고 지혜로운 고수들은 많다. 김영효 선생님, 내 생각에 최고의 고수다. 삶 자체가 그렇다. '몸으로 쓴 샘물 같은 삶의 이야기, 세속에 사는 도인, 마법사, 영웅의 풍모를 가진 인간 김영효, 발로 뛰는 큰 일꾼' 등의 수사가 넘친다. 직접 보시라. 후배 선생님들께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일흔을 넘겼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주는 목소리는 책의 내용과 가르침처럼 크고 힘차다. 당신의 생각을 한없이 풀어 보낸다. 말 섞기 힘들 만큼 우수수 쏟아져 온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가 보다. 산속을 오가며 멧돼지. 꿩, 고라니, 개구리 등 자연의 온갖 생명과 풀숲에서 썩어 거름으로 거듭나는 부엽토까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분이다. 늘 건강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