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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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도, 도시도, 마을의 이름도 정확하게 명시되지 않은 채 '곰'에 대한 간접적 연관성으로 둘러싸인 (아마도 스웨덴) 시골의 어떤 마을에서 벌어지는 <베어타운>은 시작부터 환상적이겠구나 했다. 이런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설의 도입부에 새겨진 '탕, 탕' 하며 연발하는 하키 퍽의 소리 때문이었다. 고립된 시골 마을에서 울려 퍼질 소리라고는 퍽 소리, 그리고 이 소리를 만드는 하키 선수-아이들의 스케이트 소리뿐일 것 같았으니. 소설의 첫 장을 펴기 전 까진 하키에 대한 아이들의 열정과 눈물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일 것 같았다.


물론 뒤표지에 쓰여있는 소개문을 보면, 이 같은 상상대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어두운 밤 마을 전역에 소리 없이 내린 눈처럼, 마을 전역을 뒤덮을 불안한 사건의 소리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간에 이 모든 궁금증을 가지고 첫 장을 펼쳐본다. 조용하고 한적한, 하얀 눈이 동화처럼 쌓인 공간이 펼쳐진다. 생각해보면 <베어타운>의 도입부에 깔린 이런 전격적인 묘사는 이 마을의 '고립성'을 극적으로 묘사한 셈이 되었다.


<베어타운>의 시공간에 오로지 단 하나로 울려 퍼지는 이 퍽 소리는, 결국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가 되면 무언가 공포스러우면서도 하키라는 절대적인 목표만 있을 뿐이라는(그 외의 것들은 희생될 수도 있다는) 씁쓸한 암시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을 지명에 흔적처럼 남은 게 아닌 정말로 곰 혹은 자연과 공존하는 마을이 바로 '베어타운'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이소설은 이렇게 자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베어'는 도시를 상징하고, 도시의 대표 문화 상품인 '하키'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곰과 같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가진, 절대적으로 추앙받고 우선되어야 하는 이 마을의 목표 가치의 절대적인 '힘'을 뜻하기도 한다.


<베어타운>을 읽어 내려갈수록, 소설이 그리고 있는 '힘'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 사회를 거울 비추듯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베어타운 청소년들의 성폭력 사건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까지 어른 사회의 '이기주의'가 얽히는 것을 목도면서는 이창동의 몇 영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순히 흥미진진한 플롯을 가졌다, 긴장감 있는 전개가 재미를 준다, 라고 이야기하기엔 씁쓸한 순간들이 너무 많다. '베어타운'의 주요 사건이 터지고 서서히 폭발해 가는 지점부터 이 소설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알레고리와 은유로 점철된다. 빈부의 격차, 사회적 지위의 격차, 그리고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런 '격차'가 이내 어린 주인공들의 친구 관계나 생활에 전이되는 것까지. 그래서 <베어타운>의 풍경은, 도시도 마을도 정확히 어딘지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사실 이 세계의 보편적인 묘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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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
지바 마사야 지음, 박제이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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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듣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온 세상의 지식 성애자와 공부 성애자들이 평생을 갈망하고 원하는 바로 그 문제의 '궁극'만을 모아 제목으로 만들었다는 것. 그러니까 모든 지식 성애자들이 원초적으로 탐구하고 싶어 하는 주제를 제목으로 사용해서 붙였다는 것. 둘째, 제목을 너무 쉽게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아닌 의심. 과연 이 작고 심플한 책이 이 궁극의 문제를 온전히 다루고 있기는 할까?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감상은 이러하다. 위 두 가지 의문을 풀어줄 해답이 그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부의 철학>에는 그 해답이 존재하기는 한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사고의 기술'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은 후 일종의 공부하는 방법론을 얻기는 얻었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기술론을 설명하고 있는 이 책 <공부의 철학>은 제목이 아주 틀리지는 않다는 것이다.



제목이 주는 숭고함 혹은 막연함과는 달리 <공부의 철학>은 일종의 방법론을 깨나 구체적이고 소박한 방법으로 요약해서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저자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은 상당히 개인적인 경험과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다.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지점에서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동기를 찾야아하는지, 그리고 그 지점을 찾아냈다면 거기서 어떤 사고의 연쇄작용을 통해 공부를 끈기 있고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근육을 만들 수 있는지 하는 점을 자신이 돌파한 방법으로 안내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수단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 수단으로써 '언어'를 든다. 언어로 사고하며, 언어로 생활하고,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넓혀 나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애초에 이 방법론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인간의 사고체계는 언어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철학적 이론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비트겐슈타인과 들뢰즈, 가타리의 이론을 사전에 이해하고 있다면-이 책의 방법론은 상당히 쓸모 있는 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않고, 사고하지 않고 있다면 이 책의 방법론은 사실 써먹기가 좀 힘들다. 하지만 이 도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저자의 방법론을 따라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일본인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도구적 언어가 지배하고 있는 일상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일상 언어 체계와 의사소통 상황에 일종의 '딴지'를 걸 줄 알아야 한다(일본에서는 이 같은 행위를 '츳코미'라고 한다). 굳이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대화하고 있는 주제를 빗겨서 생각할 수 있는 아이러니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아이러니만을 좇다 보면 결국에는 진리에 닿을 수 없이 아이러니의 무한 루프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필요한 것은 아이러니를 유지하면서 '유머'(일본의 문화적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보케')로 확장하는 것이다. 유머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데, 이런 계기는 내가 새롭게 공부할 수 있는, 몰두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렇게 일상에서 시작할 수 있는 쉬운(?) 방법들을 <공부의 철학>은 설파하고 있다.



물론 단점도 존재한다. 이런 방법론은 사실 너무나 일본적인 방식이라서 한국인인 나로서는 조금 오그라들고 민망(?) 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망함이란 일본의 형식화된 예능이나 교양프로를 볼 때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아주 어렵지 않게, 일상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단서 찾기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 책은 그래도 친절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공부의 철학>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는 단서와 계기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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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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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시리즈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읽고) 있다. 장편 소설을 흥미롭게 읽는 일은 마치 연속극을 챙겨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와 2권 <아주 새로운 이야기>의 연속은 바로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내용적으로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작가의 필력 또한 그러하다. 더군다나 연속극(soap-opera)이라는 장르에 기대하게 되는 통속적이면서도 은밀한 치정의 묘사는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 왜 인기를 끌고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나폴리 시리즈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1권과 2권의 순수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과는 언뜻 다른 느낌을 준다. 이들 주인공이 청년기를 거친 후 어떤 '독립'의 기점에 도달한 중년기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더불어 2권까지 이어졌던 레누와 릴라의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질 수 없었던, 자발적인 상호 운명적인 관계에 무언가 변화가 올 것이라는 느낌까지 준다.


그래서 3권은, 나폴리 시리즈가 가진 매력의 정점이라고 콕 집을 수 있을 법한 주인공의 절정기와 역사를 다루고 있다. 1권과 2권의 어린 시절을 거쳐 3권에서는 이들 주인공들-충동하고 질투하며, 내면의 파도가 끊임없이 치던 레누와 릴라가 드디어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가(물론 남녀에 대한 것을 포함한다) 그만큼 어른으로서 가능한 담론들을 다루는 것으로 확장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청년기를 거쳐 장년이 된 이들을 통해 마땅히 혹은 장편소설의 사명감으로 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그들이 자라온 환경과 시대에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런 담론을 피해갈 수 없는 시절 그 자체이기도 하다. 각각의 이해집단과 각각의 사상, 성, 결혼과 이혼, 젠더, 혁명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많은 담론들이 레누와 릴라의 인생을 관통하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뱉어지고 몸을 타고 행동으로 묘사되어 있다. 


3권에 이르러서 레누와 릴라는 본격적으로 68 혁명과 사회주의가 세계를 뒤흔드는 격변의 시기를 살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적인 거대 담론들은 유달리 생각이 많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레누를 통해 이전의 1, 2 권에서보다 더 내밀한 자기 목소리로 들려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더 깊게 든 이유는, 길고 긴 나폴리 시리즈 3권에 이르기까지 길다면 긴 시간이 필요하긴 하였지만, 과업이나 숙제처럼 억지로 읽은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이 호흡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1, 2권에서 학생이었던 화자가 3권에 이르러 전업 소설가가 되어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화법으로 말하게 된-작가의 자의식이 틈입할 수밖에 없는 '소설가가 쓴 소설가의 이야기를 읽는'-효과의 극대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대의 역정을 좇는 장편 소설에서의 '발견'은 독서를 하는 자의 내면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같다. 작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장편 소설은 역사를 읊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콘텍스트적으로 많은 장점을 찾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순전히 독서 그 자체에 심취하여 그 길고 긴 소설을 읽어내고야 마는 독자의 행위 자체에서의 유의미성이라고 해야 하나, 행위 그 자체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진다. 하루 만에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는 독자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고 상상하게 한다. 오랜만에 길고 긴 소설을 진득하게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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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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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은 독자라면, 나폴리 시리즈의 두 번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까지 읽게 되었을 때엔 막연하게나마 이 소설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조금씩 그리고 있을 것 같다. 이건 얼굴이나 모습에 대한 상이기도 하겠지만, 작가의 서술 방식과 심리 묘사의 탁월함으로 인해 기대하는 작가의 성격 혹은 성향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할 것이다. 대단한 관찰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관계 관찰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소설을 보는 내내 이 작가의 눈빛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나폴리 시리즈의 전체 이야기 속의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캐릭터들의 행동 스펙트럼으로 보았을 때엔, 그야말로 ‘답다’고 생각될 정도로 과감하고 파격적인 인물들의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내내 이어진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예상한 수준을 가히 능가한다. 그런데 나폴리 시리즈가 보통의 연작소설과는 다르게 보여주는 장엄함의 성격은, 전개가 거듭될수록 서로를 의식하고 간파하는 관계의 세계관 또한 점진적으로 커진다는 점에 있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가 연작의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데 공을 들였다면,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이런 기획 의도의 형상화에 더 가까워진다. 즉 레누와 릴라를 비롯한 많은 등장인물들의 청년기를 다룬다. 그리고 이것은 혈기 왕성한 시절의 클라이맥스의 집약이기도 하다.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술과 같기는 하겠지만, 면면의 에피소드의 성격을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의 정서는 사실상 질투와 치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질투와 치정이라는 정서는 애정에 대한 쟁취와 승기를 잡지 못한 어느 한쪽에서 폭발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치정이 낳은 산물로서 '신파'의 서사도 추가된다(정말 질질 짜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몇가지 주요 사건들은 뭇 신파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치정과 신파는 자칫하면 너무 통속적이게 된다. 이건 장편 소설을 쉽고 지루하지 않게 쓰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엘레나 페렌테는 이런 방법을 굳이 쉽게 쓰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눈이 가고 좇을 수 밖에 없는 인물들 내면의 사건과 동요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가 가히 어마어마한 양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히려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출간할 3권은, 2권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까지 진행된 인물들의 폭발적인 사건과 치정의 단순한 연장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인물들의 세계는 사건과 시대가 가로 짓는 운명을 넘어서 언제 어떻게 비틀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의 관계에 많이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작가가 유달리도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킴과 동시에 이 많은 인물들을 하나 빠짐없이 다각, 다층 관계로 설계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나폴리 시리즈의 분량은 가히 러시아 소설의 그것을 능가하지만, 디테일 역시 러시아 소설의 그것을 넘어선다.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에 대한 틈 없는 묘사가 약간은 과할 정도로 편집증적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한번 읽기 시작한다면 다음 편이 기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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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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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라는 건 굳이 그 소중함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삶에 꼭 필요한 정신적, 감성적 자양분이다. 단지 친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맺는 그 수많은 관계들을 아우르는 단어다. 게다가 한국어에서 이 단어는 '정'이라는 뜻을 내포하면서 더욱 단어가 규정하는 사전적인 뜻 이상의 많은 감정적인 울림을 준다. 


우정, 친구.. 그래서 이런 단어들을 떠올릴 때면 무언가 슬프기보다는 아름답고, 따뜻하고, 편안한 정조부터 그려진다. <나의 눈부신 친구>라고 제목이 붙은 이 책도 마치 그런 느낌들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동안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고 찬란한 동반자. 그게 '친구'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친구를 생각한다는 것이 언제나 둥글둥글하게 선한 것은 아니다. 날카롭고 치명적이게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런 게 바로 사람과의 관계고 친구와의 관계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다행히도 친구에 대한 지극한 찬사와는 다른, 타자를 대함에 있어서의 묘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친구라는 존재는 항상 곁에 오래 두고 사귀는 벗이기는 하지만 이 말이 언제나 이상적이 조화로운 관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탈리아 전후 1950년대를 배경으로 자유도 온전히 누릴 수 없고 공부나 연애보다는 생활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두 여자아이, 지근거리에 사는 친구들이 세계의 전부인 레누와 릴라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매우 소박한 배경에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오히려 그 소박하게 좁혀져 있는 세계는 이들의 관계를 더욱 밀착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 있는 풍경이 된다.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나와 너무 가까이에 있는 친구라는 타자는 끊임없는 비교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의식적인 감정들. 이것은 의식한다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과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영향을 준다. 어른들의 친구 세계는 다분히 이런 상황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도 알게 모르게 친구라는 존재는 어른 못지않은 그런 영향들을 주곤 했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바로 그런 친구라는 존재가 나의 선택과 가치관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하여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내내 의식적으로 좇는다.


내가 어린아이 일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순수했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그런 막연하기만 한 독자의 생각을 끊임없이 찌른다. 어렸을 때는 정말 그저 순수하게 친구와 지내지 않았나? 비교도 의식도 없이 지냈던 것 같은데?라고 막연히 지나친 그런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꺼내보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독자들의 어린 시절 속에 드문드문 '비교항'으로 놓여있던 그 어떤 친구들을 부르게 한다. 물론 아주 대단한 사건들은 아니다. 지극히 사소한 사건과 의식들이다. 친구 집의 엄마와 아빠는 어떤 지부터 시작해서 저 친구는 몇 살 때 생리를 시작했는데 나는 아직이네. 저 친구는 안경이 어울리는데 나는 별로 안 어울리는데. 쟤는 시험에서 몇 점인데 나는 몇 점이라는 것들 등등. 


생활에 있어 친구라는 존재는 우정 어린 벗이 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이래도 '괜찮은지'를 계속 따져보게 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제목이 붙은 이 소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친구의 '눈부심'을 내내 드러낸다. 아름답고 멋있는 친구를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존재감을 내 인생 속에서 드러내는 친구라는 존재를 이야기한다.


이 책을 처음 쥐고 보게 되었을 때 이 어마어마한 연작소설은 얼마나 길고 아름다운 우정을 그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름다운 우정의 대 서사시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것만을 내내 본다는 것은 결국 관계의 굴곡을 회피한 억지 미화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작은 <나의 눈부신 친구> 단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반쪽짜리도 채 못 되는 말이 된다. 줄거리보다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주인공들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눈부신 친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요체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음 이야기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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