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ft Brew - 세계 최고 브루어리의 수제맥주 레시피
유안 퍼거슨 지음, 김유라 옮김, (사)한국맥주문화협회 감수 / BOOKERS(북커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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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요리’가 현대인들에게 아주 흔한 취미가 되었다. 요리가 취미가 되기 전에는 그럼 요리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인가? 싶지만 또 그것은 아니다. ’ 취미’라는 범주 안에 요가 들어오는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만든다는 생산적 가치뿐만 아니라 나의 취향에 맞는 무언가를 100%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는 욕망에 불이 켜질 때 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리에 도전하고 취미화 해버린다. 


이런 관심사의 선상에 ‘술’도 분명 존재한다. 밥만큼이나 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술, 양조는 요리보다도 더 과학적이고 정밀한 접근이 필요해서 비교적 시도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크래프트 비어가 유행을 하면 할수록 이런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Craft Brew>는  ‘어렵다’고 느끼는 맥주 양조가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양조의 절차를 파트별로 설명하는 <Craft Brew>의 첫 챕터는 술이라는 음식에 대한 보통의 호감만 있는 상태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소한 양조 용어가 많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 용어사전 코너가 있다. 이 부분을 좀 더 앞으로 배치했더라면, 초심자도 조금은 수월하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번역서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정서와 약간은 다른 원저자의 어투가 증발되지 않고 번역문에도 그대로 살아 있어 조금은 이질적이었다는 점이다. 맥주를 사랑하는 점은 영국인 저자나 한국인 독자나 매한가지일 테지만, 크래프트 비어에 대한 익숙함이 그네들과 다르고 맥주 양조 문화가 오래되지 않은 우리의 상황상 왠지 저자 혼자 너무 들떠서 즐거워하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코어 한 맥주 팬들은 분명히 많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이렇게 영국/유럽의 ‘현장감 있는’ 안내서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Craft Brew>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럽 유명 크래프트 비어의 레시피 소개 페이지는 맥알못이 보더라도 아주 재미있다(나는 실제로 맥주를 양조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레시피는 자세히 읽지 않았다). 브랜드별로 어떤 유래를 가졌으며, 어떤 맛과 향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굉장히 리듬감 있게 소개하고 있다. 곁들인 사진도 정말 먹음직(?)스럽게 나와서 도저히 오늘 밤 맥주 한잔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사실 만으로도 이 책은 매력이 있다. 맥주를 조금 더 사랑하게 하는 여러 가지의 동기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맥주 양조에 큰 뜻이 없다면, 이 책을 유럽 각국의 맥주 양조장 투어의 가이드 책으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맥주의 취향을 찾고, 취향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유럽의 어딘가로 맥주 여행을 떠나라고 부추기는 책이다. 나도 언젠간 꼭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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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부엌 - 맛있는 이야기가 익어가는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김단비 옮김 / 앨리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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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을 집에서 밥을 먹고, (이보다는 짧은 시간이지만) 음식을 해 먹고, 밥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처음 깨달은 사실이 있다. ‘부엌’이야말로 그 사람의 맨얼굴을 보여 준다는 것. 내가 사는 집 부엌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김없이 나의 부엌은 나의 생활 습관이 배어있고, 버릇도 배어있고, 신조나 철학이 배어있다. 깨끗하다거나 좀 지저분하다거나, 정리를 잘 해놨다거나 그저 시원하게 늘어놓고 산다거나.. 다 자기 성격대로 부엌을 해놨을 것이다. 이런 부엌의 모습은 나의 생활 방식이 도식화된, 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도쿄의 부엌>은 저자가 도쿄(그리고 근교)에 사는 50여 가구를 방문 취재한 내용을 다룬 책이다. 첫 번째 챕터는 이들 50여 인터뷰어들이 사는 집 부엌의 간단한 사진과 설명이 있는 스케치 모음이다. 두 번째 챕터는 몇몇 인터뷰어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묶었다. 마지막은 나만의 부엌 ‘필수템’들, 예컨대 조미료나 주방기구 같은 것들을 종류별로 모아서 보여주는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가구별로 전반적으로 짧은 인터뷰와 한두 장의 사진만으로 간략하게 보여주는 바람에 어떤 가정집에 대한 흥미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데 바로 끝나버려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집안 구성(SLDK), 연식, 입주연차 그리고 집주인의 나이 정보를 곁들여서 읽다 보면, 인터뷰 내용은 짧더라도 이들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행복을 부엌과 요리를 통해 얻었을까 하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들은 부엌 앞에서 요리를 하고, 그것을 나누어 먹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부엌에서 삶의 재미를 새롭게 찾은 사람도 있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쇼와시대에 만들어진 지극히 오래된 집에서, 아주 오래된 싱크대와 상부장을 안고친 채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를 지키면서 사는 스타일리시함을 보야주기도 한다. 작고 작은 일본의 가옥, 그중에서도 부엌 한켠을 멀리서 지켜볼 뿐인데도 재미있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어서 마치 그 인터뷰어의 집에 놀러 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집이라는 공간이 집주인의 삶을 대변한다고 했을 때, 그곳의 대표적인 얼굴은 ‘거실’ 혹은 ‘서재’ 일 것이라는 생각만 했다. 집주인의 가치관은 즐겨 읽는 책과 취미의 공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그래도 좋아한다고 여기는 나 조차도 진짜 기운 빠지고 위로가 필요할 땐 책장이 아닌 냉장고 앞을 서성거림에도 말이다. 오늘을 살게 하는 건 내가 사는 집의 냉장고이다. 그리고 내일 또 내가 괜찮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싱크대에 쌓인 그릇의 설거지를 해야한다. 오늘 또 건강하고 별일 없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를 그들의 부엌과 당신의 부엌에서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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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톰 행크스 지음, 부희령 옮김 / 책세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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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 시간 다양한 영화를 통해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변치 않은 톰 행크스 특유의 느낌이 있다. 평범한 외모에 때로는 남을 더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그는 그 자신을 감출 수 없는 톰 행크스다. 때로 특이하고 난해한 캐릭터로 분하더라도, 그는 캐릭터 밑에 깔려있는 그 자신이 톰 행크스임을 잃지 않는다. 독특한 메쏘드나 목소리를 가진 것 같지는 않은데 톰 행크스가 출연한 영화는 언제나 결과적으로 ‘톰 행크스 영화’가 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만의 아우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소설집을 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톰 행크스는 엄청난 타자기 수집광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2시간씩 글을 쓴다고 한다(컴퓨터나 다른 메모 도구들이 있겠지만 가능한 조건에서는 왠지 타자기로 썼을 것 같다). 스마트폰 타자기 앱도 만들었다고 하고. 이 정도 인물이면 고상하게 표현하는 ‘수집광’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고 '타자가 덕후'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서 탄생한 듯한 소설집의 제목 <타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 정도 덕후력이면 타자기는 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이라서 ‘톰 행크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타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앞뒤 표지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문구는 “모든 미국인의 삶이 여기에 담겨 있다”라는 말이었다. ‘모든’이라 함은 불특정 다수를 일컫는다. 자기 이름의 인장 같은 아우라를 가진 배우의 소설 작품집이 정작 내가 주인공이 아닌 남들을 관찰하는 인간 극장식 ‘르포르타주’인 걸까 싶었다. 자기 자신이 언제나 자신의 페르소나 같은 영화인이 독특한 캐릭터를 내세우지 않고 아주 일반적인 인간 군상을 다루는 것 같아 의외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 안엔 반드시, 톰 행크스의 영화들처럼 그만의 아우라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다 읽어보니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책을 직접 집필한 톰 행크스가 형성한 아우라는 그가 주연한 영화들과는 뭔가 좀 다른 느낌이다. 마치 미국을 잠깐 다녀온 느낌도 든다. 그런데 미국 '여행'은 아니다. 밀항에 성공해서 생전 보지도 못한 뉴욕의 42번가의 거리에 맨몸으로 도착한, 조금은 두려워도 용기는 계속되는 느낌이 든다. 비록 가진 돈 하나 없고 두 눈과 귀, 촉감밖에 없어서 나 자신의 감각을 통해서만 미국의 모든 것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이지라도 말이다.


소설집을 구성한 매 단편마다 ‘타자기’가 등장한다. 바로 이 타자기는 미국의 모든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미 전자 입출력기기 (노트북, 아이패드, 스마트폰)가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는데, 단편들 속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타자기라는 존재는 어딘가 외로움과 궁핍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것은 물질적인 궁핍함이 아니라, 일상적이지 않은 워드프로세서 기계를 사용하여 어떤 맥락도 없는 마음속 문장들을 뜬금없이 입출력한다는 사건에서 오는 외로움의 정서일 것이다. 미국이라는 곳은 어쩌면 바로 이런 외로움이 가득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 중 <내 마음의 명상록>이 바로 이런 정서가 많이 담긴 것 같다(내 마음에 가장 맘에 들었던 제목이기도 하고). 


무언가 외로운 정서를 관통하고 있는 이 단편들 속의 미국인들은  중국 혈통 성씨를 가진 볼링을 잘 치는 남성이기도 하고, 불가리아에서 밀항한 이민자이기도 하다. 아무튼간에 돈이 너무 많아서 과거로의 시간여행도 떠날 수 있는 엄청난 부자이기도 한다. 영화배우가 되기 위하여 시골에서 뉴욕으로 상경하여 이력서를 들고 전전하는 무명배우도 있다. 이 모두는 톰 행크스가 생각하는 ‘미국인’이다. 미국은 여전히 희망과 개척의 땅이라서 처음 유럽인들이 이주한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시작’과 ‘도전’이라는 설렘을 준다. 하지만 모든 시작과 도전, 바라는 행복이 뜻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어서 좌절하기도 한다. 행복하기도 하고 혹은 그러지 못해 외롭기도 한 다분히 미국적인 풍경들이 이 책 속에 담겨있다. 번역도 훌륭하여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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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글쓰기
류대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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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도구에 워드프로세서가 추가된 지 참 오래되었다. PC 상용화가 시작된 90년대부터 계산해봐도 근 30년이다. 이때부터 글 쓰는 일은 정말 해방 수준으로 쉬워졌다. 생각의 속도 그대로 문장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의 수정과 복사가 쉬워진 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젠 노트북과 스마트폰까지 가세하여 글 쓰는 일은 거의 숨 쉬는 일 수준으로 일상적으로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글쓰기를 쉽게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글쓰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진짜 어려워서라기보단 무언가 기피하고 '각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쓰인 나의 글이 민망하고 어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그릇된 고정관념에 지레 겁먹는 사람들이 적잖다.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에 쓰는 그 많은 텍스트들도 모두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글인데도 말이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가지지 않은 평범한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글을 보면서 하는 이런 소심한 생각에 용기를 불어넣어줄 책이 바로 <사적인 글쓰기>이다. 정확하게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는 초심자들의 사적인 글쓰기를 도와주는 책이다. 우리는 직업 글쟁이가 아니라서 글을 발표할 것도 아니고, 매문을 할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파고들 것은 그저 '나'일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나에 대한 글쓰기부터 하라 제안한다. 그것은 일기가 되든 시가 되든 상관없다. '나'이기만 하면 된다.



저자는 약 30개 정도의 꼭지를 잡아서 글쓰기와 안 친한 사람들이 으레 던질만한 질문들에 답을 내려주는 방식으로 입문의 팁을 전수한다. 예컨대 '글은 언제 쓰는 게 좋을까? 필사는 정말 도움이 될까? 글쓰기에는 특별한 준비가 필요할까?' 등등. 답변은 질문에 맞는 저마다의 해결책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 모든 답변들에는 '집중해라'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것은 글감이 될 나의 일상이나 경험에 집중하라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글을 필사할 땐 그저 노동하듯 쓰는 것이 아니라, 필사 원문의 수사법과 감성을 내 안으로 체화하는 일종의 수련으로서의 태도가 필요하다.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특별히 글 쓰는 시간을 매일 내는 것은 어려우니, 틈날 때마다 쓰되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내 손으로 직접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집중'만큼 필요한 태도는 더 없을 것이다. 



집중하다 보면 모두 가능해진다. 

특별할 것 없다 여겨지는 우리의 나날들 안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영감 그리고 체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글쓰기는 정말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기술이다. 초등학교 때, 국어의 한 분과인 '쓰기'라는 과목이 있었다. 교과서에 뜬금없이 '쓰기'라고 크게 박혀있는 게 너무 터프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의 집필 경력은 늦어도 8살 때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단지 글다운 글, 말이 되는 글, 말하듯 유려한 글을 쓴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 뿐이다. <사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글쓰기의 부담감이 줄어들었다면 이젠 정말 꾸준히 써볼 차례다. 그것이 연습용 글이든, 누군가에게 보여줄 글이든 그저 꾸준히 써봐야 한다. 이런 꾸준함을 견디는 동안 나 자신에, 나의 생활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나의 영감에, 나의 문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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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길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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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으로 한번 태어나 단 하나의 삶을 사는 우리의 존재는 숭고해 마땅하다. 숭고한 이유를 달리 어렵게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을 소유하고 지속한다는 그 자체로서 숭고할 뿐이다. 낭만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운명적'이라 할 것이다. 


하물며 이러한 인간의 삶을 그린 문학 역시도 숭고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이 담기기 마련이다. 단 하나의 삶은 언제나 숭고하게 여겨진다. 현실이든 문학 안에서든,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불씨가 언제 어떻게 꺼지든지 간에 말이다. 물론 "만약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미 삶은 선택되었고, 앞으로 선택할 사건과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한 단 하나의 최선의 순간들만이 우리 인생에서 유효할 뿐이다. 예니 에르펜베크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이렇게 하나로서 숭고해 마땅한 누군가의 '저무는 순간'(즉 죽는 순간)을 여러 번의 가설을 통해서 다시 세우고 이야기를 지속한다. '만약'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사건들을 삶의 여러 고비들 마다 배치하여 한 가족과 역사의 흐름을 여러 갈래로 쪼개어 펼쳐보는 소설이다. 


다만 특이한 점은 이러한 '펼쳐짐'의 순간에 일어날 수도, 혹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여러 사건과 역사들이 단지 '상상'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더라도, 죽지 않고 사는 나에게 지금 이렇게 한 뼘 더 연장된 이 순간이 과연 필요한지,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삶이 계속된다는 것은 단지 '축복'이라고 선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어떤 이유로, 어떤 이념으로, 어떤 사명감으로) 살고 있는지, 하루라는 시간이 더 주어졌다고 해서 그 답을 찾는 게 좀 더 쉬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의 주인공은 모계로 이어지는 어떤 '여자들'이다.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 갓난 여자아이는 막간극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고, 유럽 전체를 관통하는 쉼 없는 전쟁 속에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한다. 처녀로 자라나 어쩌다가 짧은 치마를 입은 이 여자 아이는 창녀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러시아 공산주의의 최전방에서 희생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죽지 않을 수 있는 우연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럼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이루고 소생을 낳았을 수도 있다. 거기서 조금 더 삶이 지속되었다면?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어 위대한 글을 써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을 줄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모든 업적과 함께하는 삶을 연명하다가, 불의의 낙상 사고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한 인물이 맞딱뜨릴 수 있는 사건의 길목에 '만약'을 설정해봄으로써 조금 더 이어질 수도 있는, 그러면서 연장될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는 삶의 시간들을 주욱 늘려서 바라본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마땅하다.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저녁은 마땅히 저물 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삶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바로 그 '죽음'은, 각자가 최선으로서 살면서 선택한(혹은 선택된) 순간임에는 확실하다. 지금 내가 허투루 살다 죽었더라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어떤 사건들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음의 문턱에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은 언제나 저물고 있지만, 각자의 저무는 순간이 하찮지 않고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삶과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의 다양한 죽음 이후 달라져간 역사의 순간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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