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평행우주 무너뜨리기
'신념'을 갖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임과 동시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는 아무런 신념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는 잘못된 신념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누군가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누군가는 곧은 신념을 가진 그 누군가를 부러워할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누군가를 답답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얼마 전 방영된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은 자신의 신념을 일관되게 관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는 사랑과 봉사로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 톤즈에서 평생동안 기적을 이루어 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있다.
책의 핵심은 한 살인사건이다. 총 7장의 챕터는 사건의 발생부터 해결까지를 순서대로 좇아간다. 하지만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이 책을 추리소설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범인은 애초에 공개되었고, 꽤 괜찮은 추리소설의 반열에 들기 위해 필요한 긴장감 같은 요소 대신 골치아픈 물리학적 지식만 잔뜩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스카와 제바스티안이 논쟁을 벌이는 부분에선 이 책이 소설인지 과학서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소설의 매력인 것을!) 그리고 다른 그 어떤 추리 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들게도, 무형의 두 신념이 부딪히는 지점이 사건의 발단이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범인이 일으킨 살인사건은 결국 이기적인 욕심의 발로이다. 나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 큰 방해물은 아닐지라도) 나와 반대되는 지점의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범인은 이 방법을 극단적으로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소설이 형사 실프를 주목하는 방식은 자기 세계에 갖힌 범인을 심판하게 하는 것이다. 기억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는 형사를 심판자로 만든 것은 꽤 상징적인데, 물리학자들에 비해 형사는 이성적이지 못하다. 실프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책의 곳곳에서 추측할 수 있지만(평행우주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후배 여자 형사에게 '네가 느껴지는 그 반대로 판단을 해라'라고 충고를 해 주는 것에서 실프는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 과정은 예외로 두고) 이성만을 좇는 인물은 아니다. 그의 판단은 감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그가 제바스티안을 지키고자 하는 데에서도 명확한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그런 인물이 명석한 두뇌로 무장한 범인과 대결을 해서 심지어 이긴다는 전개에서, 무시무시한 학문적 이력을 갖고 있는 저자도 이성적 능력이 결코 삶의 완전한 방패막이는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저자는 영리하게도 이 모든 이야기를 평행우주이론과 엮어 넣는 엄청난(!) 재치를 발휘했다. 물리학적 지식과 그녀만의 수사법은 단연 이 책의 매력으로 꼽고 싶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도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아 신기했다. 발췌하여 컴퓨터 메모장에 저장해두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적은 참 오랜만이다.
* 부록
1. 그녀는 불행을 예상했지만, 그녀가 예상한 것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불행이었지, 자기 나라 말을 더 이상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불행이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날의 목록이 새로 작성되었고, 매번 다음 날이 그전 날을 1위 자리에서 밀어낼 것이다. 그것은, 마이케가 예감하듯이, 한참 동안 여전히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2. 타인의 삶은 그에게 그 자신과의 과거와도 같다. 말하자면, 그는 그것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고, 뭔가를 바꾸기에는 언제나 이미 너무 늦다.
3. "때때로 나는 몇 시간씩 빗물받이 통 옆에 서서 물에 빠진 벌들을 구해주었단다. 나는 그것이 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았지."
"수의사가 되고 싶으셨어요?"
"벌들에게는 내 손이 운명이었어. 일종의 4차원이기도 하고."
"아저씨 괴짜시네요." 리암이 말한다.
4. 오스카는 대학에서 그의 방법론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사고의 기술은 답을 고안해 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서 답을 엿듣는 데 있노라고 대꾸했다. 어쩌면 인간도 역시 자기 안에 해답을 품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라고 제바스티안은 생각한디. 어쩌면 그것이 인문학자들이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5. 리암은 쫙 편 손바닥 위에 작은 플라스틱 상자를 얹고 돌아온다.
"멀미가 있어." 마이케가 설명한다. "얘는 차를 오래 타면 혼이 쏙 빠지도록 토해대거든."
" 하나는 갈 때 쓸 거고, 하나는 올 때 쓸 거에요." 리암이 우쭐해져서 말한다.
오스카가 진지하게 알약을 살펴본다.
"내 거랑 똑같아 보이네." 그가 말한다. "그런 고통은 비범한 재능의 이면이란다."
"정말요?" 리암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그 얘긴 이제 충분해." 제바스티안이 끼어든다.
오스카는 자리에 앉아 파스타를 포크로 찍고는 숟가락을 지시봉처럼 공중에 치켜든다.
"메 장팡. 벌을 받지 않고는 들어서지 못하는 사고의 영역들이 있단다. 두통과 까다로운 성격은 최소한의 대가지.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단다. 리암." 그가 한쪽 손을 뻗자 리암이 자기 손을 재빨리 거둬들인다. "네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이야. 하지만 진정한 재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는 조금 너무 정상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