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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새로운 세상을 꿈꾼 25명의 20세기 한국사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5월
평점 :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전부 윤택하고 기름진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명예와 더불어 출세, 풍요까지 모두 누리는 삶은 드물다. 격동과 전환의 시대였던 20세기 한국사에서는 ‘선구자’와
‘지도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별종으로 취급받아도, 계속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시대와 맞서 싸운 ‘모험가’와 ‘소동꾼’들이 있었다. "
저자가 서문을 시작하는 첫 단락이다.
제목이 좀 과격하고 강해서 어떤 내용일까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이 문장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소개하는 인물들은 내가 알고 있던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알고 있던 사람들도 그저 명성이나 소문으로만 알고 있지, 내밀한 부분까지는 잘 모르던 차였다.
우리 근현대사가 외면했던 진짜 주인공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내용들이 좋았다.
또 유명한 인물들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균형있게 서술한 것도 좋았다.
그리고 일일이 세어 봤더니 책에서 소개하는는 사람들 중에서 남성보다 여성 인물들이 더 많았다. 드문 일이다.
술술 읽히고, 재미도 있다. 어제 저녁에 받아 이틀만에 다 봤다.
아는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구매했는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해고자’와 ‘철거민’, ‘장애인’과 ‘난민’ 같은 이들은 때때로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 ‘크레인’과 ‘공장 굴뚝’, ‘송전탑’, ‘건물 옥상’, ‘한강 다리’ 등이 바로 그곳이다. 억울하고 분한 일이 해결되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눈길을 보내고 귀를 기울여주기 때문이다. - P14
3.1 운동은 정금죽에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이자 폭발적 성장의 계기를 제공한 전환점이었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 구호를 외친 경험은 그녀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정금죽은 "흥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시위에 참여했다.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가 됐다"고 스스로 말한다. - P27
특히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힘을 보탰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그 이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한 시대의‘영웅’ 뒤에 숨겨진 ‘그림자’일 따름이었다.임시정부의 부엌살림을 맡고, 독립군의 의복을 제작하고, 전장에서 아이들을 낳고 길러내는 역할을 맡았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과 헌신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 P37
그녀의 희생과 헌신을 낮잡아보는 시각은 아주 오랫동안 주세죽에게 덧입혀진 역사적 폭력이었다. 그녀는 사회주의가 추구하던 혁신과 변화를 누구보다 순수하게 믿고 실천하려 했던 혁명가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과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강인한 여성이기도 했다. - P64
하지만 머리를 자르는 행위가 사회적 의미를 크게 지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1920년대 여성의 ‘단발(斷髮)’을 들 수 있다. 당시 여성의 단발은 전근대적 유교 풍습에 대한 저항이자, 자신이 스스로 신여성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즈음 단발 소동으로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의‘공개 단발’이었다. - P67
여성 사회주의자들에게 연애는 단순한 사적 감정의 교류만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만들기’를 준비하는 과정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연애는 배워 알게 된 사상과 이론을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급진적인 투쟁 방법이자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변신을 감행하기 위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유습과 혼례 관행이 남아 있던 시절, 자유롭게 연애하고 주체적으로 남편을 고르고 또 이혼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행보는 그 자체로 근대적 파격이자 혁명적 행동이었다. - P83
다른 나라의 사정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범죄 피해 여성들이 숨죽여 지내야 하는 처지는 전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김학순의 등장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국가 성범죄 여성 피해자들이 사회적인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 P97
이태영은 여성으로 태어난 운명을 스스로 저주하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여성 공동체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한 발 한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진취적이고 선구적인 행보들은 견고한 성채와도 같은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향해 던진 돌팔매였다. - P108
자본주의 사회에서 터무니없이 많은 빚은 한 인간의 삶을 영구적으로 훼손시킨다. 신용불량자가 돼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만들거나 다행히 일자리를 구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도 모두 압류해 죽을 때까지 빚만 갚게 만든다. 희망버스로 연대하던 시민들이 아무리 애써 모금을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징벌적 배상금이다. 물리적인 폭력과 비교해도, 더 잔인하고 몰상식한 처벌이다. - P125
게다가 아직도 구학문과 가부장 전통만을 고집하는 유교주의자들과 국수주의자들이 버젓이 권력을 잡고 있는 통에, 서양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여성 김점동은 눈엣가시 같은 대상이기도 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P139
서왈보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어서 기억해야 하는 인물이라기보다 ‘최후’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더욱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다. 더구나 그가 품었던 비행의꿈은 개인 차원의 성취로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서왈보의 활약은 민족 해방의 희망을 품게 하는 강렬한 저항의 자원으로 환기됐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조선 독립과 한국 비행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서왈보의 삶을 축약하는 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 P151
남성의 옷차림이 ‘자본’과 ‘권력’의 표상으로 인지되는 것과 달리, 여성의 옷차림은 좀 더 ‘전통’이나 ‘관습’과 같은 문화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더구나 여성의 옷차림은 어느 시대에나 줄곧 ‘눈요기’ 혹은 ‘구설’의 대상으로 삼기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사회규범이나 지배질서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여성들의 전복적 옷차림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준다. - P154
천황 살해를 기도한 범죄용의자 남녀가 재판소 조사실 안에서 함께 달라붙어 여유롭고 느긋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고 독서하고 있는 장면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이 사진은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정치적 지위가 역전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일본 사회에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 P172
상영관 문제만이 박남옥이 겪은 어려움의 전부는 아니었다. 영화 기획과 제작 단계에서부터 상영에 이르기까지 여성 감독으로서 겪은 고난과 역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화의 크레딧을 보면 배급사 이름이 ‘자매 영화사’로 되어 있는데, 제작사들의 투자를받지 못해 출판사를 운영하던 친언니에게 돈을 빌렸기 때문이다. 제작비가 부족해 영화를 찍는 날보다 돈을 구하러 다니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 P179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들이 책을 함께 소리 내 읽기 시작하면서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가 열렸고, 한 권의 책을 여럿이 돌려 읽었을 때 ‘행동하는 지식의 연대’가 만들어졌다. 독서는 인간의 ‘앎’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실천적 활동이다. 그래서 엄대섭은 "독서는 인격의 씨앗이자 독서하면 갈 길 안다"고 그렇게 늘 말해왔던 모양이다. - P197
진보적인 언론사에서조차 여성 차별은 일상화돼 있었다. 여기자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고 간식 추렴같은 일을 전담시키는 것에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성숙이 한국 사회의 여성 차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203
이호왕은 수많은 수상 실적과 공치사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게 됐다는 사실이 보람된다고 말한다. 그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연구한 이유는 영문도 모른 채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근대 이후 서양 의약학계에 종속됐던 한국의 생리학이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한 것도 온전히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 P221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나운규(羅雲奎, 1902~1937)의 영화 <아리랑>을 보고 바로 이런 서늘한 감정을 느꼈다. <아리랑>은 직접적으로 독립을 주장하거나 일제를 배격하는 정치적 구호가 드러나지 않아 상영을 원천적으로 금지할 수 없었지만, 나운규의 영화를 보는 일본인과 조선인 관객 모두는 알고 있었다. 나운규가 직접 감독하고 연기한 주인공 ‘영식’의 알 수 없는 표정과 미친 사람 같은 눈빛 속에 어떤 감정과 마음이 숨겨 있는지 말이다. - P225
사회주의 사상의 심화와 검열 제도의 체계화는 역설적으로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발전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 노동운동에 대해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한 이들은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인지 알아야 상대를 때려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248
청년 시절 조선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식민지 시기 말 급속하게 전향과 변절을 꾀한 경우가 있다. 이런 부분이 친일파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지 망설이게 만들기도 한다.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처음부터 망설임 없이 친일에 가담한 사람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체제에 순응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향한 사회주의자 중에서는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왼쪽’이력을 지우고 ‘오른쪽’으로 더 크게 도약하기 위해 친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도 있다. - P256
이쾌대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식어이기도 한 ‘월북 화가’라는 꼬리표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프고 불편한 ‘분단’이라는 역사의 상처를 상기시킨다. 한국 미술계가 그동안 이쾌대를 애써 돌아보지 않은 건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 탓도 있지만, 이쾌대를 외면함으로써 여전히 진행 중인 분단의 아픈 현실 자체를 슬쩍 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276
전혜린은 그런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따뜻한 앞마당’과 ‘시원한 그늘’이 달콤하면서도 두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바람대로 ‘교양’을 갖추고 ‘지식’을 익혔지만, 늘 ‘자유’와 ‘해방’에 대한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스스로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간판’이나‘배경’은 모두 헛것에 지나지 않았다. - P280
김수근은 대공분실 건물의 담장까지도 특유의 미감으로 정돈하고 마감할 정도로 치밀했다. 발주자의 의도에 따라 설계했을 뿐이라고 이제와 발을 빼기도 어렵다. ‘억압’과 ‘폭력’에 더한 ‘불안’과‘공포’마저 그의 건축 미학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운 이유다. - P302
4.19를 직접 경험한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대학생이 급박한 시기에 네 컷 시사만화를 매일 그려 신문에 연재했다는 사실은, 김승옥이 진보적으로 매체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예술 장르 간 위계에도 구애받지 않고 가장 효과적인 형식을 택해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돌파하려 애썼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 P316
박흥숙 사건은 유신정권 말기 도시 빈민의 거주 문제와 무분별한 도시 재개발 정책, 관료들의 전시 행정 야욕이 겹쳐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였다. 압축적 성장과 무분별한 도시 개발의 이면에는 언제나 철거민과 빈민들의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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