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의 종말
피터 드러커 지음, 이재규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사상의 형성은 언제나 당시 현실과 대비해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모순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상에 가까운 구체적인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마다 제한된 지역적인 공간에서 현실체제가 가지는 한계로부터 나타난 문제가 사회의 체제과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체제과정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시대 다른 농도에 따라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통된 이상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여러 방법과 형식으로 체제를 담은 주의(ism)를 만들게 된다. 주의의 탄생은 사상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사상이라는 명제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인 의도된 여러 해석에 따라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여러 사상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에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주의(ism)에 대해 대중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반감과 혐오를 느낀다면 쉽게 말해 모든 사상적 근거를 거부하고 모두 부정하고 싶다면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를 포함한 주의)가 갖는 확실한 명분의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이 모든 사상의 부정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전체주의가 실제로 역사적으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고 소멸되어가는가?

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은 바로 전체주의의 내용과 전개과정 그리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모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제가 전체주의의 기원이라 해서 전체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과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패러다임에 편승하려는 저작이 아닌 전체주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와 같은 체제가 구축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여러 정황과 전개과정에서 논리를 도출하는 피터 드러커의 정치서적이다.

피터 드러커의 이 서적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일련의 사건 종결이 가져다 준 이미 마련된 결과에 대한 성과주의에 집착한 의례껏 하는 분석 대상이 아닌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결과에 대해 구조적인 산출물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이 종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구조적 분석이 마친 상태로 이 체제가 어떤 귀결점으로 향할지 명백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약 70여 년이 흐른 지금 관점에서 봐도 전혀 퇴색하지 않는 그의 통찰력이라는 면에서 이견이 없다.

그렇다고 경제인의 종말인 이 책이 단순히 피터 드러커의 뛰어난 통찰력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너무나도 단정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표현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현실분석에서 오는 예견된 결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가 이 책의 주된 목적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전체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시대 다른 형태로 전체주의의 특징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고 그런 방향으로 이해를 돕고자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거시적인 시각에서 성립된 논리 전개에 전체는 공감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반박하고 싶은 부분은 현실의 시각에서 과거를 평가하는 역사관에 입각한 해석이다. 하지만 과거에 묶인 역사관에서가 아니라 분명한 것은 프로파간다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와 경제인이 가지는 개념의 포괄성이다.

먼저 프로파간다의 측면에서 보면 반파시즘에서 품고 있는 환상이라고 하여 언론에서도 나치를 비판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반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악랄하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세뇌적 선전활동을 통해 나타난 결과로도 보지 않는다. 나는 다만 프로파간다가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선동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말하고 싶다. 즉 이미 집단적 사고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에 프로파간다의 영향력은 수단적 의미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다. 물론 프로파간다가 권력의 통제에 놓이게 되면 조작되거나 의도된 수순에 의해 더욱 파괴력을 갖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반복되다 보면 진실이 되어버린다. 프로파간다의 영향력은 현대에 더 큰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기제임에도 틀림없다. 20세기 초반일 때는 대중적 호소력이 확산되는 데 시간적 틈이 존재했지만 현재는 시간보다 앞선 파급력이 대중적 호소력을 강화시키는 데 20세기 초 보다 훨씬 시공간적으로 초월하게 되었다. 또한 자아의 판단 준거도 무분별한 정보 때문에 쉽게 부화뇌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무지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를 끊임없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과 없이 받아드리면서 판단 준거가 퇴색해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판단 준거를 프로파간다에 둘 수밖에 없게 되며 의존하는 만큼 프로파간다의 영향력은 비례해서 끝없이 커진다.

한편 경제인의 종말이라는 말에서 오는 의미를 살펴보면 경제인 개념의 한계적 의미를 가진다. 경제적 자유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달성하려는 자본주의와 계급 없는 사회로 자유와 평등을 달성하려는 사회주의의 근간인 경제인의 내용이 그것이다. 두 주의가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경제인의 개념은 사회에서 자신만의 역할과 위치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경제인의 활동이 경제적 자유가 변증법적으로 평등과 연결되지 못함이 증명되자 결과적으로 경제인이라는 개념이 붕괴되었다는 의미다. 피터 드러커는 현실에서 정당성과 타당성을 띤 어떤 구조화된 개념과 의식 그리고 체제를 구성하던 경제인의 개념이 붕괴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경제인의 개념에 대한 붕괴라기 보다는 일시적인 혼란 상태에 있었다고 본다. 자유와 평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체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지 그동안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화 되어 있던 경제인이라는 의미가 붕괴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붕괴가 아닌 일시적으로 가치에 대한 혼란에 사로잡혀 잠시 퇴색했을 뿐이다. 한계적 의미를 가진 경제인의 가치를 비경제적 특권이라는 대용가치가 등장하면서 구분점으로 활용 됐기 때문에 경제인 개념의 붕괴로 비추어질 수 있다. 붕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혼란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무방비 상태인 경제인이 심리적 위안을 삼을 수 있고,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상 실현을 위한 대용가치가 전체주의이다. 따라서 경제인의 붕괴라기 보다는 비경제인 개념의 확장으로 봐야 할 것이다.

경제적 만족 보상이 아닌 훈장, 칭찬, 사회적 위신 즉 비경제적인 특권으로 경제적 결핍을 보상해주겠다는 원칙이 바로 전체주의가 파고든 부분이다. 전체주의가 가지는 특징을 살펴보면 사회유기체설이 강하다.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으로써 사회라는 기제 안에서 지위를 보상받는 개인의 기능적인 측면에 정당성을 부여 했다.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경제적 목적을 단 하나의 사회적 목적에 종속시켰다는 점이다. 체제는 완전고용이 용이한 군수산업으로 바뀌게 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준군사적 조직이 중요한 생활 영역을 제공하게 된다.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분리하기 위한 행위였다. 결국 계층구조화를 촉진하게 되어 상사의 명령 수행 즉 명령과 지시가 원활한 조직적 행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체주의가 그 자체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전체주의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쉽게 말해 리셋(reset)의 의미가 컸다는 점에서 본연 자체로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 어떤 유전적 오염과 성질 없이 정당성을 내포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그 자체로 순결한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여타 다른 사상은 불순물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게 이른다. 다시 말해 세부적인 시행원칙으로 발전한 것이다. 결국 내부의 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고 외부의 적으로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지닌 기존 체제에 대한 우월성으로 이루어져 나타났다.

일련의 이와 같은 전개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두 사상이 유럽 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존적 구심점 역할을 한 두 사상이 한계를 나타내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체주의의 본질은 체제 전체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념적 경계의 충돌에 있다. 한 지역, 한 국가, 한 민족에 의해 단계를 거친 정반합의 논리로 체제의 한계가 저마다 같은 공간 다양한 사상의 충돌에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시대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동시대에 살던 피터 드러커의 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20세기 초 다양한 이념의 대립과 혼란한 상황 유럽 중심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상황과 전개과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무엇보다 피터 드러커는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를 포함하는 전체주의의 내용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주의의 진행 과정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증상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가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기다려 이론적 분석을 가하려는 때늦은 행위가 아닌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다시 말해 사건의 흐름과 추이를 파악하여 본질에 대한 해석이 주효했다는 점이다.

이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다만 불씨로 남아 있는다. 자신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집단을 기다리면서 언제나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 자체로 내성을 키우면서 말이다. 피터 드러커가 이러한 불씨를 경계한 이유이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을 강력추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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