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들려주는 당신 마음에 대한 이야기
전홍진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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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내가 예민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좋은 의미로도 그렇고, 물론 나쁜 의미로도 그렇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바람에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면 그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 목소리의 높낮이를 살폈다. 내가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지가 항상 걸렸다. 물론 상대방의 표정이 좋지 않거나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건 나와 대화하면서 불편한 점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거나, 체했거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큰 고민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는 예전처럼 상대방의 눈치를 샅샅이 살피지는 않게 되었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저자가 제목처럼 예민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먼저 예민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음으로는 예민한 기질을 가진 유명인들과 수많은 일반인의 사례를 소개하고, 예민한 기질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사례들을 읽어 보니 나 자신에게 해당되거나 주변에서 본 것 같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공허한 내면을 가지고 자해를 하는 사람이라거나, SNS에 집착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층간소음에 너무나 민감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건강 염려증이 심한 사람……. 비행 공포증이 있는 사람도 있고, 강박장애가 있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지는 사람도 있다. 책에는 그 밖에도 다양한 문제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례와 사례에 적합한 조언들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우울증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에게 직장을 먼저 그만두기보다 직장 생활을 하며 치료를 병행하려는 시도를 해 보라는 조언을 한 부분이 인상깊었다. 물론 우울증을 앓는 상태로 직장 생활을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면 직장을 바로 그만두었다가 좋지 않은 상황이 될 수 있다. 고정적인 수입과 소속이 없다는 압박감이 우울증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휴직을 하거나 직장 생활 중에 치료를 받으려는 시도를 해 본 뒤, 직장을 그만두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결론이 나면 그 때 직장을 그만두어도 늦지 않다. 저자의 조언이 현실적이라서 좋았다.

저런 사례들을 보면 예민한 기질이 나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예민한 사람들은 잠도 잘 못 자고, 긴장도 많이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하여튼 이런저런 곤란한 일들을 겪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뜻이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거슬려하는 사람은 꼼꼼한 사람일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자기관리 방법, 예민성을 관리하여 에너지를 유지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자연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만드는 방법, 쉴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쉬는 방법, 수면을 컨트롤하는 방법 등이다. 나는 쉬고 있을 때도 완전히 쉬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인데, 책에서 소개한 긴장 이완 훈련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밖에도 자는 시간보다 깨는 시간에 집중해서 수면 시간을 조절하라는 것도 유효한 조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은 전문가가 쓴 책이기 때문에 다양한 통계, 의학적 근거를 이용해 내용을 뒷받침한다. 그 점에서 좀 더 신뢰가 가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사례를 많이 다루었고 쉽고 간단한 조언들이 대부분이라 어렵지 않은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예민성과 주요 우울증상을 자가 진단할 수 있는 테스트지가 실려 있어 스스로의 상태를 간단히 알아볼 수 있다. 물론 자가 진단은 자가 진단일 뿐이므로 우울증이라는 생각이 들면 지체 말고 병원에 가는 게 좋다. 요즘은 신경정신과 진료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많이 옅어졌고,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정신적 질환을 아예 앓고 있지 않은 사람 쪽이 더 드물 정도다. 예민한 기질이나 우울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일단 이 책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공감 가는 내용이 많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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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디테일 -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한 끗 디테일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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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디테일>은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지만 아주 본격적인 여행 가이드북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만약 교토로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나는 이 책을 챙겨 가고 싶다. 이 책은 제목처럼 저자가 교토에서 주목한 크고 작은 디테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디테일이라는 개념이 처음에는 그리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세심한 아이디어라고 쉽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책 초반부에는 간사이 공항의 우산 제공 서비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우산 제공 서비스란 공항 안에서 주인이 없이 버려진 우산들을 회수해서, 그 중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멀쩡한 우산들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비치해 두는 정책을 말한다. 여행지에서 비나 눈이 오면 우산을 사기가 영 번거롭다. 여행객들은 우산을 사더라도 잠깐 쓰고 공항에서 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항에 버려진 우산들 중에는 멀쩡한 우산이 꽤 많다. 책을 읽으며 이런 정책을 다른 공항에서도 도입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토 여행을 다녀온 게 오래 전인데도 책을 읽다 보니 내가 다녔던 장소들과 그에 연관된 추억들이 떠올라 신기했다. 저자는 기요미즈데라와 긴카쿠지를 언급하며 그 관광지들의 특색 있는 입장권에도 주목한다. 긴카쿠지의 입장권을 받았을 때 부적처럼 생긴 모습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기요미즈데라까지 올라가는 길은 그 길 자체만으로 관광지가 될 정도로 교토 특유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길가에 있는 커피 트럭 중 하나는 교토의 랜드마크 모양들을 쿠키 모양으로 만들어 음료 위에 꽂아 준다고 한다. 긴카쿠지로 연결되는 철학의 길 역시 많은 관광객들이 걸어 보는 명소다. 그 길에는 '스즈키 쇼후도'라는 일본 전통종이 공예품 가게가 있다. 전통종이는 물론이고, 전통종이로 만든 온갖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한다. 교토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일본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전통종이는 일본 문화의 특색을 담고 있으면서도, 부피가 작고 망가질 가능성이 낮아 기념품으로 안성맞춤이다. 교토의 관광지에 잘 어울리는 가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교토에 방문했을 때 이런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다양한 문구나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정신없이 메모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백 가지 털실과 뜨개질 키트를 판매하는 로컬 실 브랜드 '아브릴', 직원들이 손글씨로 직접 상품들을 큐레이션해 놓은 소품샵 '네오 마트', 한국에도 많은 매장이 있어 이제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무인양품', 온갖 물건들이 있는 잡화점 '로프트', 각각의 제품 옆에 그 제품과 관련된 책을 놓아 둔 선물 가게 '투데이 이즈 스페셜' 등 물건을 구경하는 걸 취미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방문해 보고 싶은 가게들을 잔뜩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점은 로프트에서 우산 판매 코너에 저울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위에서도 말했듯 우산은 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우산의 무게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당연히 많다. 그래서 우산의 무게를 재 보고 비교할 수 있도록 저울을 두었다는 모양이다. 이런 가게들을 방문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것저것 살펴보게 된다. 나중에 교토에 가게 된다면 방문하고 싶은 마음에 가게 이름들을 잘 적어 두었다.

<교토의 디테일>에서는 교토의 숙소, 방문해 볼 만한 카페나 식당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그 장소들을 방문하거나 이용했을 때 발견하고 느낀 점들을 세심하게 정리해 두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저자는 단순히 여행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 여행지에서도 공부를 한 것이다. 저자가 공부 노트를 쓰는 대략적인 요령은 책에 정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서평에 쓰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쓰지 않는다. 저자의 기록물을 보고 나니 저자의 다른 저서인 <도쿄의 디테일>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교토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물론이고, 마케터로서 자신만의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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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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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이 책의 서평을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일단 재미있다. 이 책은 <내 어머니의 기억>이라는 작품으로 끝난다. 주인공인 '나'의 어머니는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어 2년밖에 살 수 없다. 어머니는 '나'를 오래오래 보기 위해 우주 여행을 떠난다.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우주 여행을 하다가 몇 년에 한 번씩 딸을 만나러 지구에 들르고, 짧은 시간을 딸과 함께한 후 다시 우주로 떠난다. '나'는 사실상 어머니 없이 자란다. 생리를 시작했을 때도, 브래지어를 골라야 할 때도 어머니는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자라면서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주 짧은 작품이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이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 속 많은 사람들은 인간에게 정해진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어떤 이들은 실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같지 않은 존재가 된다. 이 책에는 정해진 삶을 살고 죽는 사람도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도 나온다. 그리고 전자에 속하는 이와 후자에 속하는 이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싱귤래리티 3부작, <카르타고의 장미>, <뒤에 남은 사람들>, 단편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를 읽어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카르타고의 장미>의 서술자는 자신의 동생인 리즈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리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히치하이킹만으로 미국 대륙을 횡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가 허락해 주지 않자 집을 나간다. 그리고 미국 곳곳에서 가족들에게 엽서를 보내며 여행을 다니다 세 달만에 돌아온다. 시간이 흘러 리즈는 대학에 가고, 인공지능에 대해 공부하고, 인류가 몸이라는 그릇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며 스스로의 두뇌를 그 연구의 실험체로 사용하기로 한다. <카르타고의 장미>는 리즈라는 인물이 걸어온 그 모든 순간들을 언니인 서술자가 옆에서 지켜보는 구성이다. 몸에서 벗어나기 위한 리즈의 여행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다. 직접 소설을 읽어 보는 편이 가장 좋다.

<뒤에 남은 사람들>에서는 독자에게 싱귤래리티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소설 속 문장을 조금만 인용해서 아주 간단하게만 짚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싱귤래리티 원년에 태어났다. 인간이 처음으로 기계 속에 '업로드'된 해였다." 많은 사람들은 육체를 포기하고 정신만으로 영원히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뒤에 남은 사람들'은 시뮬레이션이 되는 대신 '진짜 현실'을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떠나 버린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을 한 건지, 어떤 선택을 한 사람들이 진짜 행복한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싱귤래리티 3부작의 마지막 단편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는 물질 세계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아이가 서술자로 등장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서술에 의하면 "싱귤래리티 이전의 사람, 고대인이다". 실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는 우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한다. 거기에서 순록 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싱귤래리티 3부작은 사랑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가족들의 이야기다. 그 차이에서 오는 어긋남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노화를 막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 단편 <호>역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 기술이 개발되기 전에 태어난 주인공은 죽음을 예비하는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이내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련의 과정들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 영원히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모든 것으로부터 권태를 느끼지 않을까? 나는 영원히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시대의 사람이니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원격으로 간병을 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소설 <곁>,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아 간 달과 싸우는 남자의 이야기 <만조>, 등 그 밖에도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단편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 역시 읽는 내내 조마조마함을 느끼게 해 준 신선한 소설이었다.

저자 켄 리우는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결국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다. 이로써 우리는 자기 운명의 저자가 된다." 과연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와 이어진다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책이다. 이런 독서 경험은 마음 속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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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난 집콕 독서 - 느긋하고 경쾌하게, 방구석 인문학 여행
박균호 지음 / 갈매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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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말장난 같지만,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을 만한 사람이라면, 보통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에 대한 책을 재미있다고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재미난 집콕 독서>는 책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일상과 잡학을 자연스럽게 책에 엮을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책에는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가 각각 다른 책과 엮여 소개된다.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소재나 주제로 삼아 책을 쓴다. 이 책에 소개된 책들만 해도 맥주, 연필, 제사, 빵, 부적, 보자기, 잡초, 곤충이나 늑대, 심지어 영국 집사까지 다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잡다한 지식을 쌓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다. 누군가는 그런 지식들이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평가절하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물건들부터 얼핏 보기에 나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개념들에 대해 읽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여튼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책만큼 재미있는 책이 없다. 시간도 잘 가고 읽는 맛도 있는데 인문학적 소양까지 쌓을 수 있으니까.

도스토옙스키는 가족을 사랑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임신한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산파를 찾아가지 못할까 봐 집에서 산파의 집까지 찾아가는 길을 매일매일 연습 삼아 왕복했다는 일화가 책에 실려 있다. 도박 중독으로 고생을 하긴 했지만 죽은 형의 빚을 대신 갚아 주며 형의 가족들까지 책임졌다.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생애와 철학에 대해 소개한 책 <매핑 도스토옙스키>를 소개하며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매핑 도스토옙스키>라는 책까지 읽어 보고 싶어진다. <주석 달린 셜록 홈즈>를 소개하면서 하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는 당시 영국의 사회 모습, 풍습, 경제, 법률 등이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다 읽긴 했지만 홈즈가 당시 영국에서 이루어졌던 신속한 우편 배달 서비스의 수혜자라는 사실은 몰랐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숨은 그림 찾듯 당시 사회를 세밀하게 보여 주는 부분들을 짚어 보는 것도 재미있어 보인다.

<이토록 재미난 집콕 독서>에서 다루는 흥미로운 내용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딱 하나만 자세히 밝히자면, 연필은 왜 육각형일까? 그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나와 있다. 연필은 붓을 모방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둥글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필 생산량이 늘며 생산에 손이 덜 가는 사각 형태로 바뀌었다. 거기에서 사각보다는 쓰기 편하고 원통형보다는 만들기 쉬운 팔각형 연필이 나온 것이다. 삼각형 연필은 손에 잘 맞고 잘 구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나무를 지나치게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아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연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헨리 페트로스키의 <연필>이라는 책에서 읽을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책의 역사와 발전, 빵의 역사와 발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오해와 사실들, 역사 속에 존재해 왔던 극한직업들에 대한 이야기, 육식에 대한 고민과 성찰 등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이 책을 길잡이 삼아 다른 책들을 읽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개인적으로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집에서 기르는 오리는 야생 오리와 비교했을 때 날개보다 다리가 더 발달한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갑작스러운 위험에 마주할 일이 적고, 날 일보다는 걸을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종의 기원>을 완독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매 해 버킷리스트를 쓸 때마다 독파하고 싶은 책들을 적어 보곤 하지만 그 중 반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어제보다는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토록 재미난 집콕 독서>는 독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 주는 책이다. 그것도 재미있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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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새는 밤에 난다 반올림 48
신세은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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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를 지나쳐 어른이 된 사람들 각각은 스스로의 청소년기에 대해 다르게 회상할 것이다. 누군가는 활기차고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누군가는 공부에 지쳐 너무 힘든 시기였다고, 누군가는 연애를 좀 더 많이 해 볼 걸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청소년기는 무력한 나날의 연속이다. 어른들의 세계에는 편입되지 못하면서도,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영향에는 그대로 노출된다. 그들은 물론 자신들의 세계에서도 매일 흔들린다. 청소년들은 나쁜 선생님, 나쁜 친구들, 나쁜 부모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름답고 발랄한 기억들로만 청소년기를 추억하는 어른들은 아마 운이 좋았거나, 자신이 이미 지나온 시절을 미화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청소년들 역시 고통스러운 문제를 마주하며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부모의 불화나 이혼, 형제와의 비교로 인한 스트레스,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과 같은 일들은 결코 어른들이 겪는 문제보다 사소하지 않다.

<코끼리새는 밤에 난다>에는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모두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소설 속 청소년들은 풋풋한 연애를 하던 남자친구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다른 학생들의 놀림 때문에 고통받기도 한다. 짝사랑에 눈이 멀어 바보 같은 공개 고백을 저지르기도 하고, 천재인 열 살 연하의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그 밖에도 부모의 이혼, 가장 친한 친구와 좋아하는 남자 아이 사이에서의 삼각관계 등 각자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저자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너무 가볍지도, 그렇다고 짓눌려 버릴 정도로 너무 무겁지도 않게 썼다는 점이 좋았다. 작품들 각각의 매력이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단편을 하나만 꼽으라면 다섯 번째 단편인 <힘과 중력, 한밤의 드라이브>를 꼽고 싶다. 주인공인 유진은 부모가 이혼한 뒤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함께 여행을 떠난 유진과 유진의 엄마는 말싸움을 하다가 주유소를 지나치고, 기름이 떨어져 꼼짝없이 발이 묶인다. "관성의 법칙이 공기와 중력이 없는 곳에서나 유지될 수 있는 것처럼,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도 그런 곳에서나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저 우주에서나 말이다." 유진이 변해 버린 부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런 대목이 나온다. 딱 세 문장만 더 인용하고 싶다. "불행히도 우리는 중력의 영향을 안 받고 살 수 없는 지구인일 뿐이다. 한때 세상 달달하던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다 결혼했지만, 그 사랑은 나라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나는 변해버린 부모님 사이가 슬프기보다 사람이 그런 존재라는 게 서글펐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건 관성의 법칙뿐이 아니다. 케플러, 코끼리새, 어깨걸이극락조, 0.99와 1이라는 수. 과학이나 수학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들이 나온다고 해서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뒷표지에 적힌 "우리의 일상 갈피갈피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우주가 스며 있는 걸까?"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이야기 속에 딱 어렵지 않을 정도로만 우주를 녹였다. 수학이나 과학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읽히는 걸로 보아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걸 알지 못해도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늘 재미있으니까. 인간도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만 자유로워진다는 코끼리새들이 태양 아래에서도 자유롭게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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