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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피곤하신가봐요?"
"아, 네."
잠시 정신을 놓았었나보다. 재빨리 웃음을 지어보였다. 밤 11시 55분. 폐점시간까지 5분 남았다. 오후 4시부터 30분 쉬고 꼬박 서서 일했으니 무릎이 저리고 다리가 퉁퉁 부었다. 고객에게 잠시도 미소를 잃지 말라던 팀장의 말이 있었지만, 오후 9시가 넘어가면 무아지경이 되고 만다. 무의식중에도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내가 나인지 기계인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팀장이 아까 장면을 놓치지 않았나보다. 퇴근 전 종례에서 불호령을 내린다.
"친절, 친절 몰라요? 셔터가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한 분 손님에게도 미소와 친절을 잃어버려선 안됩니다. 안그래도 건너편에 새로 개장한 D마트에는 젊은 아줌마들이 방긋방긋 웃는데. 이러다간 우리도 다 갈아버릴겁니다!" 그는 매섭게 나를 한 번 쏘아봤다. 전쟁같은 하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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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딸이 방바닥 한가득 작은 병을 늘어놓았다. 며칠 전 백화점 향수코너에서 일을 시작한 딸은 퇴근 후에도 작은 병에 담긴 향수를 잔뜩 싸가지고 왔다. 작은 종이에 향수를 찍어 냄새를 맡아보고는 이름이나 특징 같은 걸 중얼중얼 외우곤 했다.
"엄마, 세상에 무슨 향수가 이렇게 많은가 몰라. 그리고 향수를 뿌리는 사람들도 이래 많은 줄 몰랐어.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갈 때 향수를 뿌리지 않으면 안나간대. 이거 맡아 봐. 냄새 좋지?"
"응. 그러네."
그 냄새가 그 냄새 같구먼. 여러가지 독한 향이 섞여 머리가 띵하다.
"이게 50미리 한 병에 오백만원이래. 한 방울에 십만원! 이 미니어쳐는 내가 얻어올 수 있는 거니깐, 엄마도 바르구 나가. 아... 내 한달치 월급보다 비싼 향수를 그렇게나 사가는 사람이 많다니. 나도 부자되고 싶다!" 이렇게 말하고 딸은 어느새 금방 골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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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출근을 하러 나서는 길에 화장대 위에 놓인 향수병이 보인다.
'어제 바르라고 했던 게 뭐더라.'
뚜껑을 열어 냄새를 하나씩 맡아본다. 비슷비슷해서 구분이 안되지만 어제 향과 비슷한 것이 있어 바르고 나섰다.
이상한 일이다.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고급스런 향이 코끗을 스쳐지나간다. 거리의 사람들과 매일 타는 버스 안 승객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비싼 향수의 위력인가, 괜히 으쓱해진다. 고귀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이거 봐, 이게 한 방울에 십만원짜리 향이라고.' 팀장이 지으라는 억지 미소 없이도 일하는 내내 웃음이 절로 났다. 왠지 손님들도 내게 친절한 것 같다.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인 신혼부부의 물건을 모두 계산했을 때였다.
"12만 7천원입니다."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그들이 나누는 말이 들렸다.
"큭큭. 저거 자기가 쓰는 남자 향수잖아!"
귀까지 빨개진 나는 당장 화장실로 뛰어갔다. 비누로 손과 목, 귓등까지 싹싹 씻었다. 그래도 향기가 날아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향수냐. 신데렐라가 마법이 풀린 호박마차 앞에서 초라한 현실을 확인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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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딸이 옷을 벗지도 않은 채로 잠이 들어있었다. 이불을 덮어주려했다. 딸이 슬며시 손을 잡았다.
"엄마, 왔어?"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엄마. 오늘 손님이 종이가방 달라길래, 백원 주셔야한다고 했더니, 화내면서 무릎꿇고 사과하래."
"그래서, 했어?"
"응."
"......"
"엄마, 하루종일 향수냄새 맡고 있으니까 머리가 아파."
"그래. 고생했어."
딸을 꼭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향수가 다 뭐람. 난 엄마 냄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래. 엄마도 네가 있어서 참 좋아.' 마주보고 빙긋 웃었다.
* 인권위 설문조사. 22% 여성서비스노동자에게 화풀이 한 적 있다. 응답자 81% 여성서비스노동자 고충을 알고 있음. 57.7% 허리 깊이 숙인 인사 받으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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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입니다. 아래 기사 보고 쓴.
남자친구도, 동생도 서비스업에 종사해서 그 친절노동의 애환을 많이 들어온 터였습니다. 그런데 아래 기사를 보니 더욱 속이 상해서. 연습삼아 쓴 글을 올려봅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7792.html#
‘억지 친절’ 감정노동자 인권침해 심각
고객 폭언에도 무조건 참아라… 오줌보 터져도 고객화장실 쓰지말라…
인권위, 노동자 29명 인터뷰
회사, 감시하며 책임은 회피
소비자, 고충 알면서 화풀이
박현정 기자
» 백화점이 ‘고객 편의’를 앞세울수록 백화점 노동자의 노동강도는 강해진다. ‘화려함의 상징’인 백화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변변한 휴게실 하나 없는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인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19년째 일하고 있는 전아무개(36)씨는 6년 전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쇼핑백을 달라던 한 여성에게 ‘100원을 내고 사야 한다’는 규정을 안내했다가 당한 일이었다. 화가 난 그 여성은 반말로 큰소리를 치다가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불만에도 백화점 쪽은 되레 판매사원에게 눈치를 준다.
백화점 쪽이 판매사원의 근무 태도를 몰래 체크하고 이를 근거로 입점업체에 판매사원의 교체를 요구하는 일도 있어, 전씨는 매뉴얼에 따라 인사의 각도, 표정, 시선 처리 등을 늘 신경 써야 한다. 그는 자신이 겪는 일을 남편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홀로 우는 일이 다반사다.
전씨는 “2000년 이후 유통업체 사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친절 서비스 강요도 심해졌다”며 “회사는 우리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례한 소비자들과 기계적인 친절만을 강조하는 회사 사이에서 여성 서비스 노동자들의 인권침해 실태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9일 ‘감정노동’(고객 만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친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을 하는 마트 판매원, 콜센터 상담원 등 여성 노동자 29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판매·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는 약 301만명에 이른다.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은 소비자들이 폭언을 하거나, 심지어 물건을 집어던져도 무조건 참아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호소했다. 또 휴식이나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도 턱없이 모자란 것으로 조사됐다.
백화점 매장 판매사원인 이아무개(21)씨는 “쉴 공간이 없어서 계단이나 복도에서 쉰다”며 “수백명이 일하는 공간에 여자 화장실은 고작 두칸인데, 회사 쪽에선 고객 화장실을 쓰지 말라고 한다”고 토로했다. 또 이들은 회사 쪽이 인사, 말투, 표정 관리 등은 기계적으로 교육하고 감시하면서도 자신들이 고객에게서 받는 피해에 대해선 책임을 회피한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이런 고충을 알면서도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권위가 지난 10월 수도권 시민 303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22.3%가 여성 서비스 노동자에게 화풀이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응답자의 81.2%는 여성 서비스 노동자의 고충을 알고 있었으며, 57.7%는 허리를 깊이 숙인 인사를 받을 때 불편하다고 답했다.
인권위 강은숙 조사관은 “외국에선 우리나라처럼 여성 서비스 노동자를 천대하고 억지 친절을 요구하는 경우가 없다”며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나 콜센터의 응대 건수 제한 등 감정 소진을 줄일 수 있는 보호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이날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를 발간해 사업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