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시월의 밤
로저 젤라즈니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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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저 젤라즈니는 독특한 환상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전개하는 재능으로 이름 높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선택한 것은 세계를 걷는 왕자의 이야기도, 화성의 거대 생명체를 낚으려는 광기의 낚시꾼 이야기도 아니다.  

공포와 광기로 대변되는 전통의 환상세계, 크툴루 신화체계를 차용한 그의 작품은 처음에 꽤나 낯설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자, 걱정이 기우라는 듯 재담꾼은 크툴루 신화를 가지고 놀아버린다.
로저 젤라즈니는 크툴루신화는 물론이고 일찌기 이름을 날린 옛 대가들의 소재를 거리낌없이 들고와, 태연하게 자신의 소설이라는 수프에 섞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프에서 각 소재들은 각자의 맛을 뚜렷이 주장하면서도 로저 젤라즈니의 이야기 흐름에 잘 섞여들어 휘돌고 있다. 그 결과 참으로 독특하면서도 맛진 이야기가 우리 앞에 떡하니 차려져 나왔다. 요리만화에서 흔히 보이는 묘사처럼, 이 수프에서 맛을 분석해 각 소재의 근원을 추리하는 것 또한 요리사가 의도한 즐거움 중 하나리라.

화자는 개다.
화자의 인간성을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진짜 개다. 그 외에도 고양이, 뱀, 올빼미 등 다양한 동물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들의 사역마이고, 사역마의 주인들은 특별한 날의 밤에 벌어질 특정한 의식을 목적으로 삼아 경쟁한다.

인간이 목적을 정했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그들의 사역마다. 이들은 서로가 경쟁자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고, 때문에 탐색하면서도 친교를 잃지 않는다. 한 편으로는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고, 한편으로는 사역마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면서 상대의 목적을 분쇄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인의 목적을 달성하려 애쓴다.
참으로 인간다운 존재들이 사역마인 동물이고 인간들은 되려 인간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 느낌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로저 젤라즈니'스럽다'라고 표현할 만하다.

최근 주류인 감각적인 글이 입에 넣는 즉시 녹아 없어지는 크림이라면, 이 소설은 씹을수록 육즙이 흐르는 고급 스테이크에 비견할 만하다. 나날이 추워가는 겨울, 보일러 켜고 이불 깔고 누워서 로저 젤라즈니 특제 스테이크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은 어떨지.


추가 : 책을 처음부터 정독하기 전에 휘리릭 훝어보는 분들에게. 거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138페이지는 보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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