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 지음, 말로타 그림, 최이슬기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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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요즘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이 책의 새빨간 표지처럼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다 못해 금기어가 된 지도 모르겠다.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이 아니라 여성 우월주의를 꾀한다며 비판(+비난)을 받기도 한다. 과격하게 맞서 싸운 이들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설득을 하는 방법에서 보편적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도발적인 색감과 달리, 이 책은 내 옆에도, 이 글을 읽는 당신 옆에도 있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목소리다. 가만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삶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

우리의 불안은 하찮은 것이고 우리의 목소리는 들을 가치가 없으며 우리의 이야기는 필요치 않다고 모략하는 세력이 많이 존재한다. (중략) 왜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나? 잘 보이기 위해? 지나치게 분노하거나 지나치게 소리를 지르거나 지나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 위해? (p.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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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법을, 나를 표현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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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나와 우리 집안 여자들뿐 아니라 내가 타고 다니던 버스의 여자들까지 포함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페미니스트였던 것 같다. (p.159)

저자 카르멘은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 알칼라 델 리오에서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기 카르멘은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4대에 걸친 여자들이 함께 있는 집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그녀가 자란 알칼라는 전통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분위기가 짙은 공간이었다. 생리에 대해 터부시하는 것이나, 여자의 날씬한 몸에 대한 압력,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남자친구가 언어, 신체적 폭력을 가하고 통제하려는 모습은 우리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작은 수조에 갇힌 고래가 바다를 갈망하듯 언제나 알칼라를 떠날 기회를 찾던 카르멘은 대도시에 있는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할 기회를 얻어 시골 마을을 떠난다. 그녀는 저널리즘 수업에서 교수가 추천해준 저널리즘 도서 목록에 여성 저자가 단 한 명도 없음을 발견하고 ‘여자 저널리스트들은 어디에 있냐고 질문한다. 수업이 끝나고 ‘대담한 짧은 머리’를 한 학생이 그녀도 페미니스트냐고 물어본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페미니스트’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등 페미니즘 서적은 그녀가 페미니스트로 각성하는데 하나의 표지가 된다.

한 지붕 아래에 살았던 4세대 여자들, 『작은 아씨들』이나 『삐삐』와 같은 이야기, 그리고 생리에 대한 시선부터 주변인에게 일어난 강간 사건까지, 그녀가 삶으로 겪어낸 수많은 경험들이 축적되어 그녀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앞서 인용했듯이, 페미니스트는 거창하고 투쟁적인 영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 각자가 목소리를 내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또 옆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자매애로 서로를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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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해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을까?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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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차별 문제는 우리 사회가 외면할 수 없이 존재하는 현상이다. 페미니스트를 포함하여 각계 각층의 소수자가 거칠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작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 거부당하고 좌절한 경험의 결과 아닐까. 그들이 과격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지탄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할 때 세상이 바뀐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들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당신 자신의 이야기와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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