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제국 - 상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크-여든여덟 살

나는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중환자가 된 지 이제 9개월이 된다.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 머무는 기간과 같다.

나는 내 옷 들로부터 차례차례 벗어나고 있다.
병원에 와서 나는 외출복을 버리고 파자마를 입었다. 아기들처럼.
또 직립 자세를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아기들처럼.

나는 내 이들을 돌려주었다. 아니, 내 이들은 오래 전에 빠졌으니까 의치를 돌려주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내 잇몸은 벌거숭이다. 아기들처럼.

막판에 나는 갈수록 지조 없는 동반자처럼 변해 가던 내 기억을 돌려주었다.
나는 이제 아주 먼 과거밖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건 내가 미련 없이 떠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될까 봐 저어하였다. 그건 나의 강박 관념이었다.
하느님, 저에게 그런 시련을 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나의 머리카락을 돌려주었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이었지만 말이다.
나에게 이젠 머리카락이 없다. 갓난 아기처럼.

나는 내 목소리와 시각과 청각을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사실상 벙어리에, 장님에 귀머거리가 되었다. 갓난아기처럼.

나는 다시 갓난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죽을 먹인다.
나는 내 언어를 잃고 옹알이를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망령> 이라고 부르지만 이건 그저 필름을 꺼꾸로 돌리는 것일 뿐이다.
받은 것은 무엇이든 돌려주어야 한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나면 휴대품 보관소에서 외투를 돌려주듯이 말이다.

나탈리는 나를 감싸 주는 마지막 <옷> 이다. 따라서 나의 사라짐이 그녀를 너무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도록 그녀를 밀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미소를 지으면서 <괜찮아, 난 당신을 사랑하잖아>라고 말한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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