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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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에 대한 신뢰가 있다.
소설 <딸에 대하여>에서 보여준 그의 사려 깊은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 작가의 다른 소설이 궁금했던 터에 <9번의 일>을 발견.
다만 읽기 전부터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제목을 ‘아홉 번의 일’로 읽어야 하나 ‘구번의 일’로 읽어야 하나, 였다.
주인공의 ‘일’이 소설 내내 참혹하도고 집요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181쪽에 이르러서야 답이 나왔다.
구번. 78구역 현장에서 ‘구(9)번’이라 불린 한 사람의, 일...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수리, 설치, 보수 분야로 무려 26년을 일한 그는,
다 쓴 소모품을 치워내버리려는 듯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의 농간에도
끝까지 사직서를 내지 않고 버티다 결국 밀리고 밀려
시골마을의 송전탑 현장까지 흘러든다.(아... 밀양!ㅠㅠ)
78구역 1조 9번.
그곳에서 그가 받은 이름이다.

회사가 아무리 그에게 모멸감을 주어도 9번은 애써 견딘다.
‘26년간 회사와 자신을 이어주던 게 겨우 얄팍한 월급통장 하나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자신의 전문성과는 1도 상관없는 일들을 묵묵히 해낸다.
그에게 대체 일이란 ‘월급통장’ 말고 더 무엇이었을까?

<필경사 바틀비>의 그 ‘바틀비’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대해 시종일관
“하지 않음을 선택하겠다.”고 했건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회사가 무슨 일을 주더라도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서 내가 본 것은
노동자가 회사의 요구를 다 따를 경우 어떤 상황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씁쓸함과 공포의 실체였다.

무례함과 모멸감 속에서 점차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는 9번을 보며
우리의 일, 나의 일을 생각한다.
노동을 하면 할수록 사람은 왜 더 상처받고 움츠러드는가?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업이 노동을 멸시할 때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내 일은, 나의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일하는 동안 내가 더 인간다워진다고 생각하는가?

소설 속에서 ‘9번’은 여러 차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지금 그만 둘 것인가, 조금 더 버텨볼 것인가.
다양하지도, 썩 매력적이지도 않은 선택지.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만약 9번이었다면,
과연 어떤 순간에 소설 속 9번과 다른 선택을 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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