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부 속에 안경을 품고 산다

<영혼 없는 작가> 서평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실상 당연하지 않은 것에는 뭐가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도 막상 떠오르는 것은 얼마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당연하다는 말은 너무나 익숙해져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한다는 뜻이니까. 마치 피부 위의 옷감, 책 속 글자의 배열 방식, 더 나아가 24시간과 365일이라는 시간 체계처럼 말이다. 우리는 대체 왜, 언제부터 피부 위에 날실과 씨실의 집합체를 올려놓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어절씩 글을 읽으며, 60진법의 틀 안에서 숨쉬어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지만, 우리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로 애써 물음을 회피한다.

<영혼 없는 작가>를 읽다 보면 모국어도 그 당연한 것들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언어를 구사할 때, 우리는 문장 안의 단어가 내뿜는 이미지에 묶인다. 누군가를 백인, 황인, 흑인 중 하나로 칭하는 순간 단어의 이미지가 시각을 대체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여러 언어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는 다와다 요코가 여러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와다는 일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에 재학하며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어나 독일어로 글을 써냈다. 이렇게 그녀는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라는 세 가지 언어를 공부하며, 어릴 적부터 다져온 글쓰기 실력을 연마하며 언어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했고, 이를 바탕으로 언어들을 익숙하고 독특하게 비평한다.

책에 다양한 사례가 나오지만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일본어 아타시, 와타시, 보쿠, 오레보다 독일어 이히ich를 더 아낀다. ‘이히는 앞의 넷처럼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어떤 속성에 종속되게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반대로 이미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단어에 특성을 부여해보기도 한다. 비인칭 주어 ‘es’가 여러 문장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 떠올려보는 것처럼 말이다. 또 작가는 단어가 품은 뜻과 철자, 발음 등의 형식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나스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가지라는 뜻을 지닌 나슈로도 들릴 수 있다. 독일어를 모르는 가야코는 음이 비슷한 한자를 이용해 독일어 문장을 발음할 수 있다. 또 작가는 편지에 쓰인 프랑스어 du를 보면서 독일어 du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오만가지 물건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서술을 통해서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 즉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눈을 선물한다. 그 눈은 제일 먼저 언어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 맺는 관계부터 담아낸다.

 

눈앞에 길쭉한 무언가가 보인다. 몸체는 단단하며 한쪽 끝은 뭉툭하고 다른 쪽 끝부분은 꽤나 뾰족하게 생겼다. , 원래는 같은 모양이었지만 칼 따위로 깎아내서 한쪽만 뾰족하게 되었구나 싶다. 뾰족한 쪽 끄트머리의, 색깔이 조금 다른 부분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리고 나니 검은색 가루가 옅게 묻어나며 손끝에 그림을 그린다. 소용돌이무늬다.

 

짐작했겠지만 무언가는 바로 연필이다. 한국인 화자라면 연필이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위에 장황하게 서술한 무언가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엠피쓰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이들에게 위의 3음절 단어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치엔비’, ‘까란다슈는 어떤가? 이 세 단어는 모두 연필과 같은 뜻이다. 하지만 단어만 놓고 봐서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를 이끌어 내기 어렵다.

자음과 모음의 낯선 결합체를 혀로 굴려 발음하면서 우리는 언어는 자의적이며 공허하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된다.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머릿속에 박아 넣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말이 나타내는 대상과 아무 관련도 없으며, 이 때문에 어떤 말이나 글자가 와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사과라는 글자를 이루는 아홉 개의 선분, 앞의 두 글자를 읽을 때 나타나는 혀와 입술의 움직임, 그로 인한 공기의 마찰, 이 모든 것들이 빨갛고 달콤한 열매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는 작중에서 다와다 요코가 그러나 이제 연필을 일본어 엠피쓰가 아니라 독일어 블라이슈티프트라고 부른다. ‘블라이슈티프트라는 단어는 내가 완전히 새로운 물건을 다룬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는 내 감정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한 것과 연결된다.

언어가 사실 텅 비어있다()는 걸 슬쩍 느끼게 한 것도 모자라, 작가는 독자에게 언어가 없는 상황까지 떠올려보게 한다. 작가의 다른 저작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등장한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베트남 소녀가 프랑스 영화를 보거나, 유창한 통역사가 말을 못 하게 되고 죽은 사람과 이야기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혼 없는 작가>에서는 언어의 부재를 겪는 인물로 맨 앞 챕터의 샤샤를 등장시킨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려고 했다.’ 그녀는 글씨를 쓰는 일과 관련된 것 빼고는 뭐든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 비누 포장지의 그림이 내용물과 별 관련이 없어도, 포장지 속의 것이 비누라는 걸 알고 있다.

언어가 없는 상황은 떠올리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언어를 매개로 세상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도 소통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 사용은 인간의 특권이자 우월함의 증명으로 여겨진 게 사실이다.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여 더 많고 복잡한 정보를 공유하고 상속할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언어는 세상을 탐구하는 망원경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족쇄이다. 대상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화자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닌, 그 언어가 주는 이미지와 그 대상이 혼합된 무언가를 얕게 소비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샤샤가 대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경청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말이라는 도구를 가진 이들보다 더욱 자세히 주변을 뜯어보며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 인용문에서 작가는 모국어 및 모국에서의 경험이라는 렌즈로 덮인 눈보다, 대상을 직접 느끼고 몸속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혀로 느끼고 싶어 한다, 여기서 눈을 언어에, 혀를 문맹의 상태에 빗대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두 상황의 공통분모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나 유럽을 내 눈이 아니라 내 혀로 감지하고 싶다. 내 혀가 유럽의 맛을 느끼면 그리고 유럽을 말하면 아마도 나는 관찰자와 대상이라는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먹은 것이 위에 들어가고 말한 것이 뇌를 거쳐서 살 속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작가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서 모국어와 사고의 관계로 범위를 좁히고, 모국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낸다. 흔히 모국어라고 하면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 <영혼 없는 작가>에 드러난, 모국어에 대한 일종의 반감은 독특하게 다가온다.

 

엄마말(모국어)에서는 단어들이 사람과 꼭 붙어 있어서 도대체 말에 대한 유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엄마말에서는 생각이 단어와 너무 꽉 들러붙어 있어서 단어나 생각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가 없다.”

 

이처럼 작가는 독자에게 생각이 모국어라는 포승줄에 묶이게 내버려두지 말라며 경각심을 갖게 한다. 굳이 익숙함을 경계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어와 생각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의미에 대한 성찰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모국어의 단어를 듣자마자 단어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그 말을 쓸 수 있다. 물론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논의가 깊이 있게 전개될 때, 생각의 뼈대인 언어가 정교하지 못하면 뒤따르는 생각은 자연히 부실해진다. 작가가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술술 문장을 풀어내고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는 모습은 차라리 가엾다.

그렇다면 말에 접착된 생각, 생각에 구속된 말을 분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모국어에서 생각과 말이 너무나 꽉 매여 있다고 한 후,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다른 언어와의 접촉에서 찾는다.

 

외국어에서 사람들은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가진다. 이 제거기는 서로 꼭 붙어 있는 것과 꽉 묶여 있는 것을 모두 제거한다.”

 

스테이플러 심이 종이들을 흩어지지 않게 붙들듯이, 모국어로만 의사소통을 하면 생각과 말이 분리되지 못한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우면 자연히 모국어와 비교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아프리카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원주민을 보고 나서야 자신들이 옷을 입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배우자를 우리 아내 혹은 우리 남편이라고 칭한다. ‘우리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를 수식어로 취한 덕에 수식받는 대상은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영어권 화자들이 이를 본다면 굉장히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배우자는 ‘my wife, my spouse, my husband’기 때문이다. ‘my’‘our’이 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된다. ‘우리라는 단어 하나에서조차 문화적 차이를 엿볼 수 있는데, 하물며 두 언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글을 지어내는 작가라면 어떠할까. 그녀는 여러 저작에서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말에 감추어진 고정관념을 쪼개고, 그 틈을 비집고 나오며 다른 사람에게도 갇힌 생각에서 빠져 나오라는 듯 손짓한다.

사실 현 상황에서 외국어를 배우며 이러한 것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외국어가 그저 좋아서, 혹은 외국어에 호기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순수한 호기심이 아니라 각종 시험을 치르기 위해 외국어를 모국어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이를테면 끼워 맞추는 공부를 했다. 슬프게도 외국어와 모국어 어휘 간 의미상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모든 문장을 한국어로 해석해서 머릿속에 쑤셔 넣고, 허겁지겁 낯선 어휘를 집어삼켜온 것이다. 자연히 언어를 성찰하기보다는 암기에만 급급하게 되었고, 생각의 확장보다는 어휘력의 확장에 방점을 두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대일 대응의 관점은 번역에도 적용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 단어와 그에 해당하는 외국어 단어를 짝지어 공부하고, 외국어 문장을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해야 풀 수 있는 문제들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는 원본과 번역본이 같고, 한 언어가 다른 언어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사실 완벽한 번역은 있을 수 없다. 각 언어가 만들어진 역사, 문화, 사회적 배경 등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완벽히 똑같은 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어떻게든 치환해서 우리의 렌즈를 통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모국어라는 좁은 대롱으로만 세상을 보다가 조금이라도 착란이 생기면 절망한다. 우리의 렌즈로는 잘 보이지 않는, 그 나라만의 고유한 표현, 단어 간의 뉘앙스, 독특한 문화 등을 접할 때 말이다. 절망한 후에는 보통 흐릿하게 안 보이는 것은 무관심하게 넘어가거나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독일어를 대하는 태도는 이와 확연히 다르다.

 

내가 처음 함부르크에 왔을 때 그때 이미 독일어 알파벳은 다 알고 있었지만 단어들의 뜻은 몰랐기 때문에 글자들을 매번 한 자 한 자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나는 입 안에서 S자를 반복해 보았고, 그때 내 혀에서 갑자기 아주 낯선 맛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혀가 어떤 맛을 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문법성을 단어에 속한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느낀다고 쓰여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감정을 갖게 되는지를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 예를 들어 만년필을 볼 때 나는 이것이 정말 남자라고 느끼려고 애를 썼다.”

 

작가는 독일에 도착해서 특정 발음을 계속 해보다가 혀의 맛을 처음 느낀다.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면서 익숙함을 떨치고 낯섦에 다가가는 것이다. 또한 물건을 보며 물건의 성을 느껴보려고 했다. 일본어에는 독일어의 문법성과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작가는 처음 독일어를 공부할 때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물건의 성별을 무작정 외우거나 문법성을 무시하지 않고, 외국어를 외국어 자체로 느끼려고 했다. 이러한 방식은 세계를 보는 대롱 하나를 새로 깎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고되다. 하지만 동시에 외부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흡수하려는 발버둥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혼 없는 작가>는 우리가 익숙함의 틀 안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동시에 외국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알려준다. 우리는 사실 맨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작중의 살이 안경 속으로 자라 들어간 것처럼 안경은 내 살 안으로 자라 들어갔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눈에는 모국어라는 안경 렌즈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 타국의 언어를 접하면 뒤늦게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영어의 ‘our’와 한국어 우리의 용례를 비교하면서 한국의 공동체의식을 엿보듯이 말이다. 렌즈의 존재를 자각한 외국어 학습자는 말과 생각이 그리 단단히 연결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차츰 그 매듭을 풀어낸다. 그렇게 언어의 수갑에서 해방된 후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유롭게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된 사람은, 두개골 안에 가둔 영혼을 꺼내어 영혼 자신의 삶을 영위하도록 놓아주는 경지에 이르고, 비로소 영혼 없는 작가로 거듭난다.

책을 덮은 순간부터, 차츰 각막이 근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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