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없다
이명박 지음 / 김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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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어떤 리뷰 말대로, 변명으로만 가득찬 책.

이 인물의 성공 과정이 본인의 순전한 노력이 아니라

군사독재 시절 정경유착의 혜택 아래에서 숙성된 것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일 터

아무리 법인 대표로서라지만, 전과 14범 경력의 사람이

대통령이랍시고 나와서,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닌, 한 사람의 부와 권력을 존경하도록

강요하는 책에 아무 생각 없이 밑줄 그어대고

'이런 훌륭한 사람이 될래요' 따위의 리뷰를 써대는 행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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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

경향신문에 주말마다 연재되는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의 이번주 꼭지가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을 다루고 있다. 가라타니의 종언론 이후에 그에 대한 수긍과 비판이 일종의 유행담론처럼 돼 버렸는데, 기사는 문학평론가 신수정씨의 적극적인 문학옹호론으로 읽힌다. 

경향신문(07. 04. 28)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

얼마 전에 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하나로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했던 소설가 고 김소진을 추모하는 단행본 ‘소진의 기억’이 발간되었다(*지난주에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다). 1991년 등단 이후 1997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주로 서울 길음동 산동네 판자촌의 기억을 자신의 소설적 소재로 삼아왔던 이 작가는 80년대 노동소설의 관념주의와 구별되는 그 특유의 따뜻한 민중적 공감을 소설 속에 자주 표출해왔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동료들과 후배들이 시와 소설을 싣고 작가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장을 마련한 이 추모집은 한 시대의 종말과 그를 애도하는 감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소진이 죽은 해인 1997년을 역설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으로 규정하는 후배 작가 김연수의 글이 특히 그러했다. 1993년 이십대의 나이로 등단한 뒤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연수는 1997년 5월 생애 처음으로 넥타이를 매고 직장에 출근하는 삶을 살게 된다. 곧이어 일산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와 결혼을 한다. 1997년 이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IMF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으로 마감되는 1997년은 그에게 오랜 예술가-낭인 생활을 접고 생활인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구속되는 결절점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1997년을 우리 문학사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는 없을까. 1997년, 1963년생 소설가 하나는 조용히 한 생을 접었고, 1970년생 소설가 하나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을까봐 불안감에 시달리며 어쩔 수 없이 직업의 세계 속으로 투항해 갔다. 어쨌든 그 이후의 한국문학이 그 이전의 그것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몇몇 스타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초판 30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출판시장의 침체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매체 및 컴퓨터 사이버 매체의 약진에 힘입어 점차 소멸해가는 장르의 하나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된 저간의 사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1997년 이후 한국문학은 이제까지 문학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되고 또 당연히 그러리라 요구되어 왔던 모든 전제들이 무시되거나 폄하되는 새로운 문학 환경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 사태를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로 대표되는 근대문학은 공감의 공동체, 즉 네이션의 기반이다.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소설은 그 스스로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심원한 인식론적·도덕적 기능을 떠맡음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를 상상하는 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소설을 근대의 역동적 힘이 살아 움직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진실한 허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 특유의 능력은 오늘의 문학적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발휘되기 어렵다. 1950년대 미국소설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일본소설, 그리고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에 이르는 과정은 이 사실을 말의 의미 그대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일본소설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이즈음 일본문학계의 현실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근대소설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다만 협소한 형식 속에 안주한 오락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이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진단에 우리마저 쉽게 주눅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소설 역시 일본의 전철을 많은 부분 그대로 밟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 소설 시장의 대부분은 일본번역소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장르소설에서부터 다양한 형식의 본격문학에 이르기까지 일본소설이 한국 독자들의 감수성에 미치는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사태가 이런 식으로 계속 흘러간다면 우리 소설 시장 역시 더 이상 일본식 소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소설 시장 역시 이미 일본풍 소설에 의해 잠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시장과 독자를 상대로 근대소설의 이상만을 강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야기한 대로 소설은 이제 그 이전의 자신의 규준 대신 새로운 시대적 이상을 표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시내 대형 서점에 달려가면 이 모든 사태를 그대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소설이 지금 당장 그간의 전통과 결별하고 오로지 가벼운 상업주의와 내통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의 위기, 근대문학의 종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야기들은 때로 우리 소설이 진흙 속에서 펼치고 있는 이 움직임에 다소 인색한 경향이 있다. IMF의 경제적 여파보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는 어떤 사태에 휘말려 버린 자신들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더 불안해하던 김연수 또래의 작가들은 선배들의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자신들의 소설을 다시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 소설이 이룬 성과들은 이들 세대의 불안감을 기반으로 꽃피워진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선배들의 고답적 문학 형식을 거부하는 한편, 그들의 문학정신은 그대로 이어받고자 했다. 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영하, 김경욱, 천운영, 윤성희, 강영숙, 조경란,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편혜영, 이기호 등의 소설적 성취가 말해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소설을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으로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기 쉽다. 가라타니의 말처럼 소설이 더 이상의 비판적 정치 기능을 상실했다면 문학이 아니어도 그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가라타니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이라크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수연이나 생태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최성각, 베트남이나 몽골 작가들과의 연대를 기획하는 방현석과 전성태 등은 한국소설에 불어닥친 이 딜레마를 구체적인 사회운동과의 접맥을 통해 해결해나가려는 움직임을 대표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소설계엔 황석영과 같은 근대소설의 적자가 현재까지도 여전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오랜 영어생활에서 해방되자마자 그간의 침묵을 보상하려는 듯 ‘오래된 정원’에서부터 ‘손님’을 거쳐 ‘심청’에 이르는 해원의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그의 움직임은 한국소설의 현재를 웅변한다.

우리는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한국소설은 아직 한 번도 이 정황을 잊어본 적이 없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 조건은 우리 소설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적 현실로부터 결코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때로 배부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식 속물주의가 멀리 수평선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장의 이름으로 우리 소설의 형질 변경을 요구하고 나선다. 지금 우리 소설에 불어 닥친 대중문화담론들은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학은 이 경계에 있다. 한편에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모순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속물적 소비주의가 있다. 우리 소설이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한국소설의 미래가 동아시아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소설은 여전히 근대문학의 정언명령에 충실한 것 아닐까. 한국소설은 아직 근대적 기획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경향신문(07. 04. 28) 근대소설 희망을 본다

황석영의 ‘심청’은 심청전의 구조를 빌려 온몸으로 동아시아 근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 여자의 운명을 재현하고 있는 소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은 전근대적 효(孝)이데올로기의 화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봉건사회의 균열을 방지하고 지배질서의 우위를 확인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황석영은 이 심청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황석영의 심청은 단순한 희생물이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선보이는 근대의 전복적인 힘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단지 자신의 몸 하나를 자본으로 중국 남경, 일본 등 19세기 말 동아시아 일대를 주유하는 심청의 여정은 근대적 풍랑에 내던져진 한반도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에 가깝다.

이에 비할 만한 젊은 작가의 소설로 김영하의 ‘검은꽃’을 들 수 있다. 19세기 말 봉건조선으로부터 멕시코로 이어지는 이산의 여정은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소설적 구조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신세대의 대표주자로 이야기되는 김영하의 소설적 관심사가 그의 선배라고 할 황석영의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가지게 된다. 봉건조선으로부터 근대로 내던져진 19세기 다양한 계급군상들의 근대에 대한 반응양상을 재현하는 작가의 시선은 한국소설의 미래와 관련, 지금 우리 소설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황석영과 김영하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한국소설의 자장이 근대소설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형시키는 장관을 기대해 볼 일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07. 04. 28-29.

P.S. 평론가의 논점을 간추리면: (1)1997년은 우리 문학사의 터닝 포인트일 수 있다. 이후의 한국문학이 그 이전의 그것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가라타니 고진은 이 사태를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말로 규정한다. 근대문학(소설)은 공감의 공동체로서의 네이션(국민국가)를 떠받치는 기반이었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더이상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않다. (3)1950년대 미국소설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일본소설, 그리고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에 이르는 과정은 이 사실을 말의 의미 그대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4)하지만 이러한 비관적 전망에 쉽게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의 한국 작가들은 선배들의 문학정신(근대문학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으로 문학을 대체하는 것이다. (5)더구나 우리는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한국소설은 아직 한 번도 이 정황을 잊어본 적이 없다. 한국소설은 아직 근대적 기획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이다.

이에 대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1)1997년이 우리문학사의 터닝포인트이며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주장과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문학종언론'은 어떻게 양립가능한 것인지? (2)근대소설과는 외양이 다른 방식으로 근대문학의 정신을 보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가라타니의 종언론에 대한 논박이 되는 것인지? (3)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영하, 김경욱, 천운영, 윤성희, 강영숙, 조경란,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편혜영, 이기호 등의 소설적 성취가 과연 '근대적 기획의 열정'과 관련하여 평가되는 것인지? 즉, 이들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서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심원한 인식론적·도덕적 기능"을 떠맡고 있기에 의미심장한 것인지? (4)더불어 이러한 문학정신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동아시아의 정치적 모순과, 미국식 속물적 소비주의 가운데 우리 소설이 어느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인지? 열정만으로는 부족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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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일본에도 사상이 있는가

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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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일본사상사와 지식의 고고학

새로운 저자들을 만나는 일은 어릴 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던 일 만큼이나 신나는 일이다(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물론 책으로 사귀는 저자들은 '일방적인 면식'이라는 점에서 '우리, 친구 아이가?'라고 고집하기엔 멋쩍지만. 지난주에 그렇게 사귄 친구에 일본의 근대사상사학자 '고야스 노부쿠니'가 있다("일본에도 '사상'이 있는가?"란 관련 페이퍼는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014133).

 

 

 

 

이번에 <일본근대사상비판>(역사비평사, 2007)이 번역돼 나온 저자는 1933년생이니까 나이 지긋하다. 알고보니까 역사비평사에서는 아예 고야스 노부쿠니의 '사상사연구' 시리즈를 기획하고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역사비평사, 2005), <귀신론>(역사비평사, 2006)에 이어서 이번에 세번째 책을 출간한 것인데, 앞으로 <한자론>,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다>가 더 나올 책으로 목록에 올라와 있다(<야스쿠니의 일본, 일본의 야스쿠니>(산해, 2005)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역자는 <일본근대사상비판>과 마찬가지로 김석근 교수).

 

 

 

 

일본 사상사에 관하여 한 저자의 책이 이렇듯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에 이어 두번째가 아닌가 싶고, 실제로 고야스 자신이 마루야마의 사상사를 비판/극복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 읽기' 프로젝트에서도 암시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학 읽다>는 마루야마의 <'문명론지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를 막바로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마루야마 책은 역자와 출판사도 '옮긴이의 글'에 나와 있지만 행방을 찾아볼 수 없다. 근간 예정인 책인 듯하다. 그런데 정작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은 왜 소개되지 않는 걸까?). 요컨대, 일본의 근대와 근대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쿠자와-마루야마-고야스'의 핫라인을 읽어둘 필요가 있겠다. 물론 현재로선 미래를 기약할 수밖에 없는 독서계획이지만. 

이번에 나온 책은 1996년에 출간된 저자의 <근대적 지식의 고고학>을 증보해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역자에 따르면 저자가 시도한 것은 "일본 '근대'의 '지', 특히 일본에서의 근대적 지식과 학문에 대한 근원적 비판, 다시 말해 일종의 '지식고고학적'적 탐구라 할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는 "국제정치 내지 정치사적으로 근대 세계시스템 내에서 '주권국가'라는 독립된 행위자로서 공인받는 것이라면, 사상사적으로도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근대적 지식의 형성을 수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의 부제가 '국가-전쟁-지식인'인 것은 이와 관련된다(저자는 이전 타이틀인 '근대적 지식의 고고학'이 메시지를 훨씬 더 잘 전달해준다는 뜻을 역자에게 전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지식의 고고학'은 푸코의 방법론이며 그러한 탈근대적 입장을 통해서 "근현대 일본사와 일본사상을 비판적으로 '해체'해가면서 동시에 '재구성'해가고 있"는 것이 고야스의 작업이라고 한다. 우리도 지식경영서들 틈에 지식고고학 책 한두 권쯤은 가져도 좋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고야스의 책과 함께 주문했던 책은 피터 버크의 <지식>(현실문화연구, 2006)이다. 피터 버크의 <이미지의 문화사>(심산, 2005)를 최근에 집어들었던 사정과 연관이 되는데(같은 역자의 작품이기도 하다), 국역본은 제목에 덧붙여 '그 탄생과 유통에 대한 모든 지식'이란 장황한 부제를 달고 있지만 원제는 <지식의 사회사: 구텐베르크에서 디드로까지>이다. 그냥 '지식의 사회사'란 제목이 더 섹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아직 구입하지 않은 책으로 눈길을 끄는 건 제임스 버크의 <지식혁명이 남긴 위대한 유산>(청아출판사, 2001). "서구 지성사와 발명사의 '다이제스트' 판"이라고 하는데 미더운 저자인지는 모르겠다.  

07. 05. 05.

P.S. <일본근대사상비판>에 대한 알라딘의 소개는 "<에도 사상사 강의>, <방법으로서의 애도> 등으로 국내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고야스 노부쿠니의 지식 고고학 저서. 원래 제목이었던 <근대적 지식의 고고학>에서 잘 보여지듯이 동아시아의 세계화 과정에서 일본 제국을 실현한 일본, 그 속에 형성되(*형성돼) 있던 지식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라고 돼 있다.

첫문장은 알라딘의 것인지 출판사 홍보자료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에도 사상사 강의>, <방법으로서의 애도> 등으로 국내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이란 표현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혹시나 해서 여기저기 검색해보았지만 <에도 사상사 강의>나 <방법으로서의 애도>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국내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되나? 나는 '국외독자'인가? 게다가 <방법으로서의 도>는 <방법으로서의 에도>의 오기이다. 사실 '애도'란 말에 이끌려서 저자의 홈피까지 들어가봤지만 그가 낸 책은 <方法としての江戸>(2005)였다. 애도까지는 아니지만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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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

북데일리에 실린 북리뷰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일본의 저명한 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감독 오스지로>(한나래, 2001)에 관한 것이다. 진작부터 갖고 있던 책이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그건 내가 오즈의 영화들을 아직 보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영화를 즐겨 볼 무렵에는 쉽게 구하기 어려웠고, 요즘처럼 DVD타이틀이 거의 다 출시돼 있기 때문에 약간의 성의와 시간만 투자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된 시점에서는 여유 시간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마침 지난주 용산 부근에 갔다가 <동경이야기>의 DVD를 구한 김에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몇 작품을 관람해볼 생각이다. 이 기사를 챙겨두는 건 그런 연유에서이다.  

북데일리(07. 01. 09) 위대한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매력

일본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두 분류로 나뉜다.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말장난 같지만 특이하게도 오즈는 사후에 일본 영화계에서 절대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오즈 영화가 한국 디비디 시장에 범람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회자되고 신인 감독들 중 대다수가 오즈의 팬이라며 자처하고 나선다. 빔 벤더스나 허우샤오시엔, 압바스키아로스타미는 그에게 헌사 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정성일 영화 평론가는 오즈를 거론할 때 “위대한”이란 형용사를 붙인다. 무엇이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것일까? 모두가 보는 영화이지만 하지만 누구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했던 영화가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동경 대학교 총장이자 영화 및 문학 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정성일 영화 평론가가 자처하여 세르쥬 다네, 김현씨와 함께 스승으로 칭하는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 슈오 마사유키, 아오야마 신지같은 동시대의 걸출한 감독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 <감독 오즈 야시즈로>(한나래, 2001)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을 비평하는 책이다. 비평에 앞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좋은 영화평론의 귀결은 그 영화와 감독에 대한 연애편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책 <감독 오즈 야시즈로>는 좋은 글쓰기의 표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오즈를 열렬히 예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즈의 영화를 보았거나 혹은 오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책의 매혹에 빠질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를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면서 시작하고 그 해체를 부정에서 다시 긍정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한다. 첫 번째로 오즈를 예찬하는 언사들이 모두 부정적인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오즈의 영화에는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다, 낮은 위치의 카메라는 위치도 변하지 않는다. 이동 촬영이 거의 없다. 부감은 예외적 경우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오즈 영화를 칭송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사실은 거의 다 부정적인 언사로 이루어져있거나 결여를 지칭하는 언사로 지칭되어 있다. 이런 언사들인 오즈를 더욱더 세밀하게 바라보기를 가로 막는 장치였으며 벽으로 작용하였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런 것을 모두 삭제하고 부정적 언사가 아니라 긍정의 언사로 다가간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들 이외의 점을 지적하고 그 불가시함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오즈의 영화는 부정적 언사들과 함께 단조롭다거나 혹은 “가족주의”드라마로 화자되어왔다. 그래서 그 단조로움 안에서 모든 영화들이 비슷하다고 했지만, 하스미 시게히코는 현존하지 않는 오즈의 작품들을 시나리오 속에서 재발견하거나 서구 비평가들에게 무시되어왔던 오즈의 초기 무성영화와 필름 느와르 속에서 견고하게 굳어져 있는 오즈적 일관성을 탈피한다. 그리고 영화 역사서에 줄곧 등장하는 그런 비평과 평가들을 일부 부정하거나 혹은 긍정하지만 그 비밀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설명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하스미 시게히코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영화를 해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말하거나 혹은 먹는 것을 말한다. 또는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오즈의 영화에서 딸이 시집을 갈 때 갈아입었던 옷의 비밀, 혹은 남성들이 갈아입었던 옷의 의미와 먹는 것을 통하여 내부와 외부를 연결짓는 오즈의 내러티브 연결법을 설명하면서 그렇게 내부와 외부를 차단 된 것이 아닌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게 했던 오즈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또한 누구도 계산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중에 하나가 오즈의 딸들이 거의 비슷한 연령대에 머물러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오즈의 영화가 세트로 촬영되었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집안 구조의 단일성과 그 단일성이 대부분의 작품에서 반복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세트 구조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 세트 구조의 해체는 곧 오즈의 카메라와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알려주며 그 시선이 부딪치는 내부의 차단성에 대해서 우리가 공공연히 감동을 받는다고 말한다. 특히나 1층과 2층을 연결해주는 계단은 영화상에는 존재하지만 세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가시의 영역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계단은 대부분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붕 떠버린 2층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설명하고 그 1층과 2층의 공간에서 구분되는 성역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책은 후반부에 도달해서 오즈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궁금해 하던 비밀을 풀기 시작한다. 왜 오즈의 영화에서는 환기작용을 하듯이 종종 이유 없는 하늘과 공장의 굴뚝 혹은 빨래가 등장할까? 그 설명의 시작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인물들이 모두 이동할 때 나란히 서있다는 것과(이것은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장면으로 항상 걸어갈 때 인물들은 나란히 걷게 되는 특징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선의 등방향성이다. 외부로 나아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시선으로 옮겨간다. 지하철역에서나 거리에서나 집단적으로 서 있을 때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한쪽으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다가오는 오즈의 가상선의 파괴는 오즈가 어떻게 영화적 규칙을 파괴하고 있는지를 영화적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결국 영화라는 매체가 동시에 두 가지 시선을 담을 수 없다는 한계를 오즈가 알고 있었기에 구도-역구도를 이용하여 그 시선을 한 대상이 보는 것처럼 조작한다. 이것은 마치 보고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 트뤼포는 오즈의 이런 법칙들을 보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오즈의 영화에서는 한 사람을 이쪽 카메라에서 찍었다라고 생각하면 다음에 상대를 반대편으로 되받아쳐 찍는 듯 한 인상을 받습니다. 이것은 인상이 아니라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연출로, 보는 쪽으로서는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면 사실 거기에는 상대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여 버립니다. 카메라가 되받아 칠 때마다 이미 대화 상대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기에 덧붙인다. “오즈의 시선은 전혀 배려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눈동자에 둘러싸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그런 것을 오즈 자신도 충분히 의식하였을 것이다.” 오즈는 그 자신이 “영화에는 문법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처럼 가상의 선을 파괴하고 영화적 문법을 해체하여 시선을 통한 불안감을 주고 기묘한 공간 감각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풀어야 될 난제가 도달한다. 즉 그 비어있는 공간과 사물을 쇼트가 느닷없이 담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도-역구도 쇼트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두 명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이는 쇼트가 바로 그 비어버린 쇼트 혹은 이유 없는 정물들이다. 앞에서 그 실험적 쇼트들은 서로 다른 시선을 만들어 공간을 해체한다. 서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혹은 누군가 한명은 공간에서 이탈해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그 정물에서 오즈는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던 사람들 혹은 전쟁 전-후세대 할 것 없이 모든 장벽을 허물고 잠시나마 그 쇼트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오즈적 ‘작품’이 선동하는 영화적 감성이 높아지는 것은 보다 추상적인 동시에 보다 직접적인, 즉 누구나 틀림없이 눈에 간직하지만 쉽게 서정과는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놓치기 쉬운 이미지의 힘에서 오는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단조로운 영화라고 칭해지던 오즈의 평가에서 더 깊게 들어가서 오즈의 일상적인 것들이 어떤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는지 명쾌하게 풀어준다. 그렇지만 그는 못내 아쉬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어쩌면 오즈 생전에 이런 평가들이 있었다면 그의 초기 영화들이 유실되지 않고 우리가 지금처럼 극장에서 그의 필름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오즈가 만들어낸 영화가 전 세계를 울릴 수 있다고 자부하며 오즈의 마음은 동시대적이면서 전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좋은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으며 더 궁극적으로는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책 읽기를 통해서 경험하게 해준다.(이도훈 시민기자) 

07.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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