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모더니티(근대성)에 관한 책들을 다시 모아서 읽어보려고 하는데, 마침 염두에 두고 있는 책들 중 한 권에 대한 상세한 리뷰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시울, 2006)에 대한 이재원 그린비 편집장의 리뷰이다(지난번에 라쿠-라바르트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 적이 있다). 국역본이 출간되고 나서 이 책의 영역본은 도서관에 주문하여 부분적으로 복사해놓기도 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앙리 르페브르와 보드리야르, 그리고 리포베츠키의 책들을 모아서 읽는 김에 바네겜과 기 드보르 등 상황주의자들의 책들도 정리해둘 생각인데,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한 리뷰이다. 일상의 심미화 경향에 대해서는 따로 읽고 있는 책들이 있어서 조만간 정리해둘 예정이다.

컬처뉴스(07. 03. 26)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과 정치의 관계, 혹은 정치의 예술화(그도 아니면 예술의 정치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흔히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오늘날 국내에서도 전설이 된 프랑스 68년혁명의 ‘숨은 원동력’으로 평가받지만, 이들 중 국내에 소개된 인물은 기 드보르(1931~1994),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라울 바네겜(1934~  )밖에 없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아직 국내에서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프랑스 68년혁명이 혁명 개념에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아직 폭넓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침 내년은 68년혁명의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런데 내년 5월에도 내게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생길지 알 수 없기에 미리 몇 자 적을 요량이다. 따라서 이 글은 68년혁명 40주기를 기념하는 때 이른 축사이기도 하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이다. 1909년 2월 20일 이탈리아의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창립선언」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막을 연 20세기의 아방가르드운동은 국제상황주의자들이 해산을 발표한 1972년 3월 23일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주요 특징은 삶과 예술의 통합을 주장했다는 데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선배들의 주장을 “삶이 예술작품이 되게 하라!”라는 구호로 되받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구호가 똑같다고 해서 그 함의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경청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들라면 바로 이 점, 그 ‘다른 함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가 다른 함의를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 자체가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활동했다. 스펙터클의 사회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는 것’(une chose vue/a thing seen), 즉 우리가 능동적으로 보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어떤 외양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해를 무릅쓰고 더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구경꾼이 되는 사회이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삶을 볼지언정 살지는 않는다. 혹은 완전무결한 그 무엇인양 제시되는 ‘보여지는 것’(예컨대 ‘좋은 삶의 표본’)을 모방하면서 살 뿐이다. 또한 이처럼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단순히 따라야 할 그 무엇으로 제시되는 것을 넘어 소비되는 상품(소비재)이 된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소비사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제시된 삶을 소비하지 우리의 삶을 살지 않는다. 또한 이렇듯 적극성이 제거된 삶은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권태로움의 사회’이기도 하다. 『일생생활의 혁명』(도서출판 시울, 2006)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이 책의 원제 자체가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바네겜은 구경꾼이기를 그치고 참여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권유한다. 이때 바네겜이 말하는 시(posie)는 어원 그대로의 시이다. 즉, 시작품(pome) 또는 시작품을 쓰는 기술이 아니라 ‘만들다’(poiein)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파생된 ‘만드는 기술[포이에티케]’(poitik)이다. 따라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는 바네겜의 말은 ‘만들어내는 사람[포이에테스]’(poits)이 되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삶을 직접 만드는 예술가.

바네겜이 그냥 예술가가 아니라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예술조차 소비재로 축소된다. 그래서 “불행히도 예술가는 스스로를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관객들 앞에서 자세를 잡고 볼거리를 제공한다.” 결국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볼거리로 만든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옛 창조자에게 돌멩이를 던지게 됐다는 것이 바네겜의 진단이다. 그러나 누굴 탓할 것인가? “이 태도는 예술가가 유발한 것이다.”

 

 

 

 

 

 

 

 

 

  

따라서 바네겜은 “이제 더 이상 예술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모두가 예술가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열정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이 될 것이며, “사람들이 만드는 현실과 사건 속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얼핏 보면 이런 바네겜(그리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은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제시했던 주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함의는 상당히 다르다. 이 점을 살펴보려면 다시 포이에티케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포이에티케는 미메시스를 전제로 한다. 즉, 흔히 ‘모방’으로 번역되는 미메시스를 통해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미메시스할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미메시스란 무엇인가에 있다.

첫 번째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실제 예술작품을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낭만주의에서 유미주의에 이르는 전통에 발 딛고 있는 아방가르드, 특히 “사람은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든지 예술작품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의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즉,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예술작품처럼 자신을 만드는 것, 막말로 하면 폼 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비루한 현세의 삶을 초월한 가상의 이상화된 존재를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히틀러를 곧 도래할 ‘민족으로서의 존재’(un être-peuple), 풍전등화에 처한 유럽 문명 앞에서 비극적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영웅’, 새로운 장래를 약속하는 ‘지도자’와 동일시해 이 총통을 미메시스한 나치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도래할 인민(민중)’을 말하는 구 사회주의권식 예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심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방법 역시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심미화하려고 하는 삶의 지향 자체가 기존의 질서(전자의 경우는 부르주아 문화, 후자의 경우는 기존의 강대국에 종속된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바네겜이 제시하는 방법은 이와 다르다. 그가 미메시스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현실의 타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과 다를 바 없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 동료이다. 그는 자신의 인간 동료를 미메시스함으로써 나 아닌 타자와 진정한 소통을 나누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타자, 즉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잠재성을 발현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바네겜의 말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네겜이 말하는 미메시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가 말하는 미메시스와 비슷하다. 라쿠-라바르트의 미메시스는 이미 주어진 어떤 이상적 주체를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기존에 ‘자기’ 혹은 ‘나’라고 간주되었던 것들을 자기 안에서 제거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기 안의 타자(고유성)를 끄집어내는 기술이다. 즉, 이는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타자와 자기 자신을 모두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바네겜이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는 “급진적 주체성은 재발견된 동일성의 공동전선”이라는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렇게 보면 68년혁명의 적자로 흔히 여성운동과 동성애운동이 꼽히는 것도 당연하다). 

과연 우리는 바네겜의 말처럼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잠재성을 끄집어내고, 기존의 삶을 바꿀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바네겜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권력의 억압에 맞서 기존의 삶을 바꾸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자기실현의 원천, 즉 “창조의 열정, 사랑의 열정 그리고 유희의 열정”은 “자기 양육의 욕구, 자기 보호의 욕구”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가지 원천은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다. 그도 아니라면 그것 없이 존재는 더 이상 존재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문제는 다시 실천, 아니 바네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되기’이다. 안타깝게도 이 요구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상생활의 혁명』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이런 각성이다.(이재원 _ 그린비 편집장)

07. 03. 26. 

P.S. 우리에게 예술가가 되기를 강권한다는 점에서 바네겜과 같은 편에 서는 사상가는 '프랑스의 니체주의자' 미셸 푸코이다. 그 또한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것을 권유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앨런 메길의 <극단의 예언자들>(새물결, 1996)이 유익한 안내서이다. 니체의 삶-예술론에 대해서는 네하마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이 유명하다. 오래전 책이지만 아직 절판되지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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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

학술저널 담비의 리뷰를 가끔 스크랩해놓는데, 이번에 옮겨오는 것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의 '교양'론에 관한 것이다. '매슈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는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아직까지 손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공에 대한 관심사와도 맞물려서 조만간 훑어보기라도 할 작정이다. 아놀드 비평의 요체를 되짚어본 논문에 대한 리뷰를 워밍업으로 읽어둔다. 

담비(07. 03. 23) 매슈 아놀드의 '교양'을 다시 논하다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영미 신비평(New criticism)이 활개를 쳤던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국내 인문학 담론 전반에서 널리 인용된 학자이다. 비평의 인문주의적 기능을 확립시킨 그는 어떠한 사적 의도도 갖지 말고 작품을 대하라는 '몰이해적 관심'(disinterestedness), 이제까지 존재한 최상의 작품과 비교해보았을 때 손색이 없어야 비로소 뛰어난 작품이라는 '시금석 이론' 등으로 유명하다.

F. R. 리비스와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정초된 문학 텍스트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귀족 교수들의 보수적 세계관과 맞아 떨어지면서 제도권 평단을 석권했다는 비판이 있듯이, 이들의 사상적 鼻祖(비조)에 해당하는 매슈 아놀드 또한 그간 좌파 비평가들에게는 우파 부르주아 비평관의 원조격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소위 아놀드 때리기와 이에 맞선 아놀드 구하기가 영미 문학계 내부에서 진행되어온 것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 후 영국사회에 불어닥친 이념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해 '비평' 기능의 회복을 주장하거나,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이 대중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면서 '교양' 개념을 통해 대중의 문화적 수준향상을 꾀하려했던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The Function of Criticism at the Present Time, 1864)과 '교양과 무질서'(Clture and Anarchy, 1869) 등의 저작을 통해 새로운 비평을 제안하고 그 핵심으로 교양 개념을 제시했다.

이런 아놀드의 기획에 대해 전형적인 맑스주의적 비평을 가한 이는 테리 이글턴이다. 그는 아놀드가 당대 계급세력의 급진적인 재편을 지배블럭 안에서 효과적으로 달성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존체제로 포섭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고 비판했다. 귀족계급이 급속도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부르주아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문화적 패권 확보가 아놀드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본 것이다. '문학에서 문화연구로'의 저자 앤서니 이스트호프 또한 "아놀드의 교양이념에서 문학이 계급갈등을 희석시키고 국가적인 조화를 긍정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이글턴과 이스트호프는 당연히 문학의 정치적 읽기로 나아간다. 이들의 단골메뉴는 대중문학(문화)과 고급문학(문화)의 위계철폐다. 그러나 요즘 이런 주장의 효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담아내기보다는 자본의 확장에 동원되는 측면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철지난 '아놀드 때리기'와 '구하기'에서 벗어나 그의 핵심사유를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김재오 영남대 교수(영문학)가 최근 '19세기 영어권 문학' 제10권 2호에 발표한 '아놀드의 사상-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아놀드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자본종속과 같은 사태를 누구보다 우려하고 그 폐해를 실감했다"는 점에서 볼 때 "아놀드의 비판대상이 되었던 관점으로 아놀드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아놀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아놀드의 주장을 거꾸로 읽어야 올바른 독자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 효과'"라며 김 교수는 목소리를 높인다. 아놀드의 현실인식이 '정치적 정답'과 일치하느냐의 여부보다 그의 비평과 교양개념에 담긴 당대적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오늘날의 현실을 진단하는 데 유용한 참조틀이 될 것이라며 아놀드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우선 김 교수는 아놀드의 첫번째 비평적 주저에 해당하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이 프랑스 혁명 후의 영국사회의 변화상에 대한 사상적 대응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아놀드가 보기에 당시의 문인들은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성'이 중요한 사상의 흐름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 '인간의 힘'과 같은 것이 부족했고 필요했다. 아놀드는 바이런과 괴테가 위대한 창조력을 갖고 있었지만 괴테가 삶과 세계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더 오래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워즈워드를 비롯한 이전 세대 시인들이 프랑스혁명의 여파를 전 유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했고, 그 이념의 전파가 몰고 올 영국사회의 변화를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못한 점이 불만스러웠다.

먼저 프랑스혁명과 영국혁명의 차이를 보자. 아놀드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이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사상에서 그 동력을 발견한 것이었고, 영국의 경우는 법이나 양심 등의 실제적인 감각에 기초한 것이기에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을 두개로 쪼개서 보았다. 사상적 혁명에서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혁명에서는 실패했다고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에드먼드 버크에 동조했다. 버크는 프랑스의 과격한 혁명문화가 영국에 밀어닥칠 것을 우려한 대표적인 보수파 지식인이다. 주권재민의 원칙은 영국에서 시발되었으나 권리장전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형멱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버크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정리했다. "주권재민의 원리는 영국 토양에 전적으로 맞지 않으나 영국에서 자란 가공되지 않은 산물로서 어떤 사람이 이중의 사기로 불법적으로 선적해 [프랑스에] 수출한 위조품이다. 이 수출의 목적은 이 위조품을 향상된 자유라는 최신 프랑스식의 유행을 따라 다시 제조해서 영국에 밀수입하려는 데 있다."

대단히 역동적인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 아놀드가 읽어낸 교훈은 "훌륭한 사상들을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 즉각적으로 적용하려는 열광은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하나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사상의 본질을 왜곡하면서까지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여기서 "아놀드의 사상은 정치이념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한 문화를 성장시키는 정신적 토양에 가깝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명제가 김 교수 논문의 핵심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사상이 과연 보편적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했던 것이다. 그 방식은 바로 그것을 영국사회의 특수성 속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것은 '추상적'이라는 판단을 받게 된 것이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세계에 작용하는 '사상'에 대한 필요성이 아놀드에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교양' 개념은 이런 필요성에 따라 등장한 개념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 '교양'이 '프랑사(*프랑스)의 사상'과 다르게 하기 위해 그는 독일에 눈을 돌렸던 듯하다. 쉴러 같은 독일 관념론자들에서 잘 나타난 '인격도야(Bildung)의 개념이 그것이다. 리딩스(Bill Reading) 등의 지적에 따르면 독일 관념론자들의 기획은 지식과 역사적 전통을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매개하여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교양(문화)의 이상을 드러내는 일과 개인의 발전을 하나의 과정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국민적 기질은 거의 상반됐다.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개인주의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아놀드는 개인적 도야를 역으로 틀어 당시 영국에 퍼지던 물질적 문명에 대한 맹신, 강한 개인주의, 융통성의 부족(똘레랑스의 실종?) 등의 문화적 에토스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양'을 설정했다.

교양이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학문적 열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에의 충동, 인간적 오류를 개선하려는 사회적 동기와 결합한다. 무엇보다 아놀드는 교양의 이념을 국가 개념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동계급이 오랜 봉건적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 그 자체를 숭배하는 무질서한 경향이 뚜렷해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놀드의 노동계급에 대한 시각은 일방적인 면이 있음을 김 교수는 인정한다.

계속 지적하자면 아놀드에게는 계급의 현실이 부차적이거나 항상 생략됐다. 교양의 작용이 계급을 없애려면 계급간의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우선적 고려사항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아놀드 교양이념의 재료를 발견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은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의 탁월한 윌리엄즈는 "교양개념은 올바른 실천과 앎이 결합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지 않고 '앎'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일종의 '물신'이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결론에서 아놀드의 교양개념이 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측면이 많지만,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목에 '교양'의 이념이 있음을 강조했고, 그 이념을 당성하는 데 '문학'의 역할이 있음을 알렸다는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김 교수의 논문은 아놀드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그 장단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양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벼운 것들과 아놀드의 교양을 비교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을 듯하다.(리뷰팀)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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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지젝의 <향락의 전이> 제4장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Courtly Love, or Woman as Thing)의 새 번역이다. 제목 자체를 '고상한 사랑, 또는 물로서의 여성'이라고 옮겨놓고 있는 '고상한' 국역본의 오류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지젝이 재미있는 통찰들이 사장되는 게 유감스러웠던 차에 또다른 번역문을 인터넷상에 발견하고 반가웠다.  

 

 

  

 

해서 몇달전에 스크랩해놓았었는데, 내용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이미지 버전을 만들어 올려놓도록 한다. 역자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분량상 일단은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이란 절만을 옮겨놓는다. 다른 대목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옮겨놓을 예정이다(본문중의 이미지와 강조, 군말은 모두 나의 것이다).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가 피해야 할 첫 번째 함정은 귀부인(the Lady)을 숭고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관념이다. 대체로 우리는 여기서 영성화(spiritualization)의 과정, 즉 미숙하고 감각적인 갈망에서 고양된 영성적인 소망으로의 이행을 환기한다. 그리하여 귀부인은 우리를 더 높은 종교적 엑스터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인 가이드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그러한 영성화와는 상반되는 일련의 특징들을 강조한다. 사실상, 궁정식 사랑에서의 귀부인은 구체적인 특성을 잃고 있으며 추상적인 이상으로서 언급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모든 시인들이 마치 같은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고 기록했다. 이런 시적 장(poetic field)에서 여성적 대상은 모든 실제적인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49) 그러나 귀부인의 이러한 추상적 성격은 영혼의 정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차갑고 거리가 있는 비인간적인 파트너에 어울리는 추상작용을 지시한다. 즉 귀부인은 결코 따뜻하고 동정심 많으며 이해심 있는 동료가 아니다.

"예술에 고유한 승화의 형식을 수단으로 하여, 시적 창작은 내가 오직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파트너로서 기술할 수 있을 뿐인 대상을 정립하는 것에 있습니다. 귀부인은 그녀의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미덕, 즉 지혜, 신중함, 혹은 심지어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현명하다고 기술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녀가 비물질적인 지혜를 구현하고 있거나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의 기능들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반대로, 자신의 하인에게 할 수 있는 한 제멋대로 시험을 부과합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50) 

그러므로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관계는, 무의미하고 흉폭하며 불가능하고 자의적이며 변덕스러운 시련을 강요하는 봉건영주의 주권에 대한 농노와 가신의 관계다. 이러한 시련의 비영성적 본질을 정확히 강조하기 위해 라캉은 하인에게 자기 엉덩이를 문자 그대로 핥으라고 요구하는 귀부인에 관한 시를 인용한다. 시는 하인을 그 아래에 대기하게 만든(우리는 중세에 개인위생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알고 있다) 악취에 대한, 그가 그의 임무를 완수할 때 귀부인이 그의 머리에 오줌을 싸리라는 절박한 위협에 관한 시인의 불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귀부인은 어떠한 종류의 정화된 영성(靈性)으로부터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우리의 욕구와 욕망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타자성이라는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파트너로 기능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또한 일종의 자동기계, 즉 의미 없는 요구 사항들을 마구잡이로 말해오는 하나의 기계이다.

귀부인에게 섬뜩하고 괴물스러운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해한 타자성과 순수한 기계의 이러한 일치다. 귀부인은 우리의 ‘동료’가 아닌 큰 타자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어떠한 공감의 관계도 나누는 가능하지 않은 그 누구(someone)이다. 이러한 외상적인 타자성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용어 ‘das Ding’을 빌려 물(物; the Thing)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 바로 그것, 즉, ‘항상 그 자리로 돌아오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견고한 중핵인, 실재(the Real)이다. 귀부인의 이상화, 즉 그녀를 영적인 천상적 이상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따라서 엄격히 이차적인 현상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녀의 외상적 차원이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projection)이다.

이러한 정확하고 한정된 의미에서, 라캉은 “궁정식 사랑의 이데올로기에서 명확히 찾아낼 수 있는 이상화하는 찬미의 요소는 확실히 논증되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특성상 나르시시즘적인 것입니다”라고 인정한다. 모든 실제적 실체성을 박탈당한 채로, 귀부인은 주체가 그의 나르시스적 이상을 투사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기능한다. 달리 말해 -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라는 소네트에서 가브리엘 로제티와 그의 귀부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관계를 말하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말로 하자면 - ‘귀부인은 그녀 자신으로서[그녀가 그녀 자신일 때]가 아니라, 그의 꿈을 채움으로써[채울 때]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에게 있어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곳에 있다. “거울은 때때로 나르시즘의 기제를 함축하며, 특별히는 우리가 후에 조우하게 될 파괴 혹은 공격성의 차원을 함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계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그것은 넘어서지지 않는 한계입니다. 그것이 참여하는 유일한 체제는 대상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이라는 체제일 뿐입니다.[그것은 오로지 대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써 어떤 한계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합니다]”(라캉, 앞의 책, 151쪽)

따라서 궁정식 사랑에서 어떻게 귀부인이 실제의 여성들과 관계되는가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살과 피를 가진 여성에 대한 굴욕을 포함하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대표하게 되는가에 대한 진부한 문구를 포괄하기 이전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그러한 텅빈 표면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투사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열어젖히는 그 차갑고 중립적인 스크린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즉 만약에 남성들이 그들의 나르시시즘적 이상을 거울에 투사하려고 한다면, 침묵하는 거울 표면은 이미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표면은 일종의 현실의 블랙홀로서, 그것의 너머(Beyond)에 접근할 수 없는 하나의 한계로서 기능한다.

궁정식 사랑의 또 다른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철저하게 예절과 에티켓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장벽들을 뛰어넘으며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그런 기본적 열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우리는 엄밀한 허구적 공식을, 즉 한 남성이 그의 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귀부인임을 가장하는 ‘마치~처럼(as~if)'의 사회적 게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궁정식 사랑과, 그 사랑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은 듯이 보이는 하나의 현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정확히 이러한 특징이다.

 

 

 

 

즉 지난 세기 중반에 자허 마조흐(Sacher-Masoch)의 문학작품과 삶의 실천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 성도착의 특수한 형태로서 마조히즘이 바로 그것이다. 질 들뢰즈는 마조히즘에 대한 유명한 연구에서,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단순한 대칭적 역전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사디즘과 그의 희생자는 결코 상보적인 ’사도-마조히스트‘ 커플을 형성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비대칭성을 증명하기 위해 환기하는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정(negation)의 양태의 대립이다. 사디즘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부정, 폭력적 파괴 및 고문과 조우하는 반면, 마조히즘에서의 부정은 부인의 형태, 즉, 가장의 형태, 현실을 중단시키는 ‘마치 ~처럼’의 형태를 취한다(*마조흐의 주저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1996) 외에도 <모피를 입은 비너스>(과학과사상, 1996)로 번역돼 있다).

이러한 첫 번째 대립에 밀접하게 의존하는 대립은 제도와 계약의 대립이다. 사디즘은 제도의 논리, 즉 희생자를 고문하고 희생자의 무기력한 저항 속에서 쾌락을 얻는 제도적 폭력의 논리를 따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디즘은 그 그림자로서 필연적으로 ‘공적인’ 법을 배가시키고 동반하는 외설적인 초자아 이면 속에서 작동한다. 반대로 마조히즘은 희생자의 조처(measure)로 이루어진다. 주인과의 계약을 개시하고, 그녀[주인]에게 그녀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를 능멸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주권자인 귀부인의 변덕에 따라 행위할 수밖에 없도록 그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희생자(마조히즘적 관계에서는 하인)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속을 상연한다.

사디즘과 반대되는 마조히즘의 더 차별적인 특징은 그것이 내재적으로 연극적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대부분 가장되고, 그것이 ‘실제적’일 때조차도 폭력은 장면의 구성요소로서, 연극적 상연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 게다가 폭력은 결코 실행되지도 않고 결론을 맺지도 않는다. 그것은 항상 중단된 제스처의 끝없는 반복으로서 중지된 채로 남겨진다.

우리로 하여금 마조히즘적 태도의 근본적인 역설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부인(disavowal)의 논리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마조히즘적 장면은 어떻게 보이는가? 남성-하인은 냉정하고 사무적인 방식으로 여성-주인과 계약 사항들을 설정한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하는가, 어떤 장면이 끊임없이 시연(試演)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무슨 옷을 입는가, 그녀는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고문의 명령에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하는가(그녀는 그를 어떻게 모질게 채찍질하고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를 사슬에 묶으며 어디에서 하이힐의 끝으로 그를 찍어 누르는가 등).

그들이 결국 고유한 마조히즘적 게임으로 넘어갈 때, 마조히스트는 끊임없이 일종의 반성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결코 실제로 그의 감정에 굴복하거나 그 자신을 게임에 완전히 내어주지 않는다. 게임의 중간에 그는 갑자기 적어도 ‘환영을 파괴함’이 없이 정확한 지시(그 지점을 더 세게 누르시오, 그 운동을 반복하시오...)를 내리는 무대 연출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일단 게임이 끝나면, 마조히스트는 다시 존경스러운 부르주아의 태도를 채택하고 평범하고 사무적으로 주권자 귀부인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습니까?” 등등.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조히스트의 가장 내밀한 열정의 완전한 자기-외부화(self-externalization)이다. 가장 내면적인 욕망이 계약의 대상이 되고 협상을 구성한다. 마조히즘적인 연극의 본성은 따라서 완전히 ‘비(非)심리학적’이다. 사회적 현실을 중단시키는 초현실적이고 열정적인 마조히즘적인 게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일상적 현실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마조히즘이라는 현상은 라캉이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고 여러 번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예증한다. 마조히즘은 우리로 하여금 ‘허구’의 질서로서의 상징적 질서라는 역설에 직면하게 한다. 마스크 밑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서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스크에,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게임에, 우리가 복종하고 따르는 ‘허구’ 속에 더 많은 진리가 있다는 역설 말이다. 그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상연중인 게임 속에서, 마조히스트의 존재의 중핵은 외부화된다.

그리고 폭력의 실재(the Real)는 정확히 마조히스트가 히스테리화될 때 분출한다. 주체가 그 자신의 타자의 향락의 대상-도구의 역할을 거부할 때, 그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대상 a로 환원될 것이라는 예감으로 인해 공포에 떨 때 말이다. 이런 교착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는 '행위로의 이동'에, 즉 타인을 겨냥한 부조리한 폭력에 호소한다. 제임스의 <죽음의 취향(Taste for Death)>의 말미쯤에 살인자는 범죄의 환경을 기술하는데, 그의 망설임을 해결하고 그를 행위(살인)로 이끄는 요소가 희생자(폴 베론 경)의 태도임을 보여준다.

-그는 죽기를 원했어. 신은 그를 부패시켰고, 그는 그것을 원했어! 그는 실제로 그것을 요구했지. 그는 날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탄원하며 논쟁하고 싸움을 할 수도 있었어. 자비를 구걸할 수 있었지.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내가 그에게 원했던 것은 그것이 다였어. 오직 그 말 한 마디…… 그는 경멸감으로 날 쳐다보았지. 그때 그는 알았어. 물론 그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심지어 반쪽짜리 인간인 양 그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는 심지어 놀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지. 그가 공포에 질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어…… 그는 마치 “당신이로군. 당신이어야 한다는 건 참 이상하군.”이라고 말하듯이 날 쳐다볼 뿐이었지. 마치 이런 것처럼, 난 선택권이 없어. 도구일 뿐이야. 어리석은. 그러나 난 선택했어. 그리고 그 역시 그랬지. 제길, 그는 날 멈출 수도 있었어. 그는 왜 날 멈추지 않았지?

죽기 며칠 전, 폴 베론 경은 상징적 죽음과 유사한 ‘내적인 몰락’을 경험하였다. 그는 장관직을 사퇴하고 모든 ‘인간적 유대’를 절단함으로써, 어떤 상호주체적인 공감의 관계를 배제하는 성인이라는 ‘배설물적’ 위치, 즉 대상 a의 위치를 취하였다. 이런 위치는 살인자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살인자는 $, 즉 분열된 주체로서의 그의 희생자에게 접근했다. 다시 말해 그는 희생자를 죽이기를 원했으나 동시에 희생자로부터 두려움과 저항의 기호를, 살인자가 행위를 완수하지 못하게 막는 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는 살인자를 (분열된)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살인자를 주체화시키게 될 어떠한 기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폴 경의 비저항과 무관심한 분노의 태도는 살인자를 큰 타자의 의지의 도구로 환원함으로써 그를 객체화하고,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남기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살인자가 행위하도록 강제한 것은 희생자를 죽이려고 하는 그의 욕망과 희생자의 죽음충동을 일치시키는 경험이었다.

이러한 일치는 히스테리컬한 남성 ‘사디스트’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구타를 정당화하는 방식을 환기시킨다. “그녀는 왜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드는가? 그녀는 실제로 내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원하고, 내가 그녀를 때려 그녀가 그것을 즐기게끔 나를 몰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릴 것이며,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녀에게 가르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조우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의 오(지각)된 효과가 사후적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리(loop)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 나는 실제로는 그녀의 노예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구타를 원하고 내가 그렇게 하기를 자극했기 때문에 - 나는 실제로 미쳐서 그녀를 때렸다...(*'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로 이어질 것이다.)

06.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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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전체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토요일밤에 올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처음 내렸고, 덕분에 학회 뒷풀이를 마치고 늦은 귀가길을 재촉하는 마음도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 가벼운 폭설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으려고 컴퓨터를 켰건만 악성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탓인지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진종일 복구하느라 애를 썼지만(물론 애를 쓴 건 집사람이고 나는 욕만 먹었다) 성과는 없어서 결국 당분간은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기로 했다(해서, 이 페이퍼는 노트북으로 작성하는 첫 페이퍼이다).

 

 

 

 

기분도 무거운 김에 첫주제를 '전체주의'로 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해의 끝물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2>(한길사, 2006)가 장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테마와 관련해서는 이전에 쓰거나 옮겨온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 '두 개의 전체주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등의 페이퍼들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에 '전체주의'를 검색하다가 박노자 교수가 몇 년전에 쓴 칼럼을 발견했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아렌트의 명성을 각인시켜준 이 노작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21(03. 11. 06) 누가 진짜 '전체주의'인가

독일인 의사로 북한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 북한 체제 비판으로 추방당한 뒤 최근 남한과 미국을 무대로 “북한 체제 전복”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색적인 행동으로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폴러첸(Norbert Vollertsen)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북한 체제를 ‘나치 정권’과 비교하고 그 체제에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북한에 대한 어떠한 포용책도 히틀러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영국·프랑스 등의 일관성 없는 유화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동독의 멸망이 대량 피난으로 시작되었듯, 북한 체제 붕괴도 중국으로의 대량 피난으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폴러첸은 나치 정권·옛 동독·북한은 동질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신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로 여기는 듯하다.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송두리째 나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폴러첸뿐인가 냉전의 발발(1946~47년)부터 오늘날까지 소련식의 체제를 ‘나치식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사회’와 대조하는 것이 구미 보수언론들의 기본 논조다. 사회과학을 독자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는 폴러첸이나 ‘악의 축’ 망발로 누명을 쓴 부시 현 대통령도 이 논조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보수 신문이나 방송만으로 ‘상식’을 배우고 독서할 줄 모르는 부시와 같은 ‘지도층’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의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소수의 극우·우파 편향적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전문 학자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억압성과 경직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를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의 어떤 독재의 잔혹성을 강조할 때-특히 나치 독일의 파트너이던 일제 말기 총동원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개발 독재(1980년대 말 이전 남한·대만 정권)를 이야기할 때- ‘파시스트적’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사회’라는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라는 수식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학적 범주로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들이 반세기 넘게 이용해온 ‘전체주의’ ‘나치와 소련 사회주의 동질론’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밝혀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인 1940년대 말~50년대 초, 당시 미국 사회과학 학계에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나타났다. 미국 학계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온 독일계의 자유주의적 망명 지식인들은 그들의 고향 독일이 왜 파시즘과 전쟁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생소한 ‘미지의 세계’들이 미국의 주적이 됐기에 관(官) 주도의 ‘지역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안보기관과 각종 재벌기금의 전례 없는 지원과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성의 끈질긴 ‘지도’ 아래 1946년 콜롬비아대학의 러시아연구소,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등이 각각 설립됐다.

학생 시절부터 안보기관의 연구비를 받고 소련이나 중국을 인류의 숙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 연구기관’ 출신의 관 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적 악질성을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최고의 자유 지성’으로 인정받던 독일 계통의 망명 학자들로 인해 그 이론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의 고뇌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것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었다. 그 후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론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정통 자유주의자 아렌트는, 자신을 망명객으로 만든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모범으로 파악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의 명단에 넣었던 그녀는 1968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재판(再版)할 때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리면 안 된다”고 명시하는 등 애써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核化)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 등을 삼았는데, 이는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웃 공동체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당시의 소련과, 전통 공동체의 관계가 그대로 잔존하는 오늘의 북한에 ‘개인의 완전한 고립’과 같은 테제를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이 책은 주로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졌음에도 미국의 수많은 관학자들은 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판 삼아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자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방분석연구부(IDA)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대표적인 ‘지역연구’ 기관인 콜롬비아대학교 부속 공산권문제연구소 소장이던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 1928년생,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 됨)였다. 그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專制) 정치>(1965)에 따르면 소련 정권은 나치와 동질적이고, 무차별적 공포정치, 언론 완전 장악, 무력 수단, 국가의 철저한 경제 통제 등의 특징을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북한과 같은 ‘약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 스탈린 죽음(1953년) 이후 대사회적 억압은 지속돼도 ‘무차별적 공포정치’가 거의 종언을 고한 점 그리고 정부의 무기·경제·통신수단에의 관여 내지 부분적 통제가 대다수 근대국가들의 특징이라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됐다.

브레진스키류의 관 학자들에 의해 왜곡돼버린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극우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됐지만, 1960년대 말 좌파는 물론 실사구시적 접근법을 고수하려는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노골적인 편향과 현실에 대한 무지로 점철한 ‘전체주의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사우어(Wolfgang Sauer) 교수는, 자본주의의 선진화 과정에서 신분을 상실한 소시민적 낙오자를 중심으로 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극우운동이 후진 지역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좌파적 극단적 개발주의’인 볼셰비즘과 정반대 위치에 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학계에서 주류가 된 이 주장을 이론화한 학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체험한 영국 리즈대학교의 바우먼(Zygmunt Bauman) 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 지역의 ‘천민 극우 근대주의자’인 파시스트들이 식민지에서 대량학살 경험을 유럽에 이식시켜 홀로코스트 등을 저질렀고, 후발 근대화 지역의 볼셰비키 등의 ‘좌파적 근대주의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전통적 기제들(조국사랑, 지도자의 가부장적 이미지 조작, 간부층과 노동자층의 대가족적 관계 강조 등)을 이용해 상당히 공고한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들의 북한 사회 이해 역시 ‘전통주의적 기제들과 일부의 일제 시대의 통제 메커니즘을 이용하고 근대 주권국가 건설·방위를 강조하는 개발주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로부터 이어받은 일부분의 파시스트 연한 요소(육탄정신 찬양, 천황제를 이은 듯한 수령제의 종교화 등)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소수 우파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역사적 형성 과정과 정통성 부여 방식, 대외정책 방향이 이질적인 나치 독일과 북한을 전면적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을 학술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구미 지역의 주요 보수언론들이 극우의 구시대적 견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체주의’와 같은 수사적 어휘를 마치 학술용어인 듯 구사하는 데 있다. 결국 40~50년 전 미국중앙정보국 지원으로 만들어져 언론자본에 의해서 계속 재생산되는 전체주의의 담론이 지금 폴러첸의 모험주의적 대북 행동과 부시의 세계적 횡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접근은 무엇인가 북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해석, 규명해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정론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사회를 이끄는 ‘극단적인 좌파적 근대주의’의 기원이 규명되는 동시에, 북한식 ‘합의 독재’와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전체주의 담론을 붙잡는 극우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비방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근대주의에 대한 남북의 경계를 초월하는 해부·해체 작업이야말로 ‘민중을 위한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06. 12. 18.

P.S.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고 있다.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에서 발견했을 뿐 나도 아직 실물로는 보지 못했다(대신에 나는 하코트에서 나온 원서를 갖고 있다). 한편, 박노자 교수의 글을 읽다가 새삼 생각난 건 폴란드 태생의 걸출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 )의 주저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물론 두어 권의 책은 소개돼 있다). 가령,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같은 책. 더불어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그의 몇몇 책들. 나도 고작 몇 권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만, 내년에는 바우만의 책들이 적어도 아렌트만큼은 소개되었으면 한다. 해가 가고 오는 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게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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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일본에도 사상이 있는가

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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