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카시러와 문화과학의 논리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뜻밖의 책이 나온 걸 알게 됐다. <인간론>으로 잘 알려진 에른스트 카시러의 <문화과학의 논리>(길, 2007)가 그것이다. 흔히 '문화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카시러의 저작에 '문화과학'이란 문구가 들어간 것도 이채롭다(찾아보니 독어본 원제는 'Zur Logik der Kulturwissenschaften'이며 영어로는 <인문학의 논리(The Logic of the Humanities)>라고 옮겨진 책이다. 그러니까 카시러의 '문화과학'은 '인문학'과 유사한 개념이며 영어권의 '문화연구'와는 계보가 다른 것이겠다. 더 찾아보니 영역본은 <문화과학의 논리>라고 새로 번역돼 나왔다) . 김상봉 교수의 서평을 옮겨놓으며 몇 자 보탠다.

한겨레(07. 02. 23) ‘문화’라는 학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아는 것은 세계를 아는 것보다 어렵다. 세계는 눈앞에 펼쳐져 있어 바로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대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낯설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으로서의 자기인식만이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의 삶을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삶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문화라 부를 수 있다. 문화는 인간성의 객관적 표현이자 실현인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를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는데, 이른바 문화과학이란 문화에 대한 학술적인 인식의 체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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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러의 책 <문화과학의 논리>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를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새로운 학문의 근본적인 곤경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문화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학문과 인식의 모범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자연에 대한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을 두 가지 방법론적 원리에 근거해서 해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왔는데, 그 하나는 주어진 사실을 그 사실이 아닌 다른 원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인과관계를 보편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인식의 이상은 세상만사를 외적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외적 필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타율성과 수동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자연인식의 방법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삶의 현실태인 문화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문화과학의 논리>를 관통하는 근본 물음이다.

생각하면 자연과학의 방법은 죽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나 합당한 것으로서 문화는 고사하고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조차 쓸모가 없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이란 외적 필연성에 의해 떠밀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아무리 생명현상을 외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에 따라 분석하고 해명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생명체의 발생과정일 뿐, 그 발생과정을 이끌어가는 근원적 힘과 원리인 생명 그 자체는 아니다.

생명이 그러한데, 인간의 일은 또 어떠하겠는가? 칸트가 말했듯이 자연은 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지만 인간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게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까닭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율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대상을 타자적 원인과 타율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는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인간은 타자의 작용과 객관적 법칙 밖에 거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지배하는 법칙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줄 아는 존재인 까닭에 언제나 법칙 속에서도 법칙을 넘어서고, 타자성 속에서도 자기를 발견하고 형성하는 존재이다. 문화란 그런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이니, 그것을 학문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외적 필연성의 논리가 아닌 다른 학문 방법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카시러는 이 책에서 그 새로운 학문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박식한 철학자는 문화과학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또 다른 학문 방법이 필요한지, 그 가장 기본적인 문제 상황을 다양한 시대와 학문분야들을 넘나들면서 명석한 필치로 소상히 설명한다. 어떤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은 다른 것에 앞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인 문화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인간성의 신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을 위한 이상적인 길잡이이다.(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

07. 02. 22.

 

 

 

 

P.S. 카시러(캇시러) 입문서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책세상, 2002)이다. 역자의 해설과 관련문헌 해제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고본이어서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다. 역자인 오향미 박사는 카시러 전공자인데(국내에서는 최명관, 신응철, 박완규 교수 등이 카시러 전문가로 분류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카시러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에 비하면 독일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철학자의 속한다."(7쪽) 독일어 주저인 <상징형식 철학>(전3권)의 핵심을 압축/축약해서 출간한 것으로 알려진 영어판 <인간론(An Essay on Man)>(1957)의 출간 이후에는 오히려 미국에서 더 많이 연구되고 있다 한다(저자 스스로 축약해준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론>은 국내에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서광사, 1988)로 번역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인간과 문화>라는 발췌역본  있었다). 최초 번역본은 <인간론>(민중서관, 1960)이었다. 이어서 나온 것이 <국가의 신화>(서광사, 1988)이며 모두 최명관 교수의 번역이다(<국가의 신화>는 아직 절판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좀 터울을 두고 나온 책들이 <계몽주의 철학>(서광사, 1995),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서광사, 1996), <루소, 칸트, 괴테>(서광사, 1996) 등이다. 완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가장 흥미로운 책이었다. 카시러 연구서로는 신응철 교수의 <캇시러의 문화철학>(한울, 2000),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철학과현실사, 2003), <카시러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철학과현실사, 2004)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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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빅토르 세르주의 반체제 맑스주의

얼마 안되지만 모아놓은 마일리지를 가지고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할>을 주문하려다가 눈에 띄길래 엉뚱하게(?) 주문한 책이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실천문학사, 2006)이다. '역사인물찾기' 시리즈의 한권으로 나온 책인데, 7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으로까지 출간됐지만 사실 빅토르 세르주(1890-1947)란 인물에 대해서 사전에 입력된 정보는 거의 없다. 러시아사가 전공인 역자의 이름에 눈에 띄길래 '전공관련'인가 싶어서 유심히 읽어보니 어디선가 지나가면서 접해보았을 법한 '비운의 혁명가'이다. 소개에 따르면, "소설가이자 역사가, 한때 아나키스트였던 볼셰비키 당원, 이단아, 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서 "소련사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존재이다." 분명 마지막 멘트는 과장된 것이겠지만 아무튼 흥미를 끄는 것만은 사실이다.

 

찾아보니까 세르주 자신이 쓴 <회고록>도 유명한데, 이번에 그보다 먼저 출간된 것은 수잔 와이스만 교수의 책 'Victor Serge: The Course Is Set on Hope'(Verso, 2001)이다. "2500여 장에 이르는 원고와 1200여 개의 주석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라는 ‘20세기 변혁운동 최대의 비극’을 빅토르 세르주의 민감한 지성이 언제, 어떻게 감지했는지 그리고 그 비극을 막아보고자 그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상세히 밝혔다."

'20세기 서구 신좌파의 스승'으로 평가받는(다는) 한 인텔리겐치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재작년에 박노자 교수가 칼럼에서 다룬 바 있어서 옮겨놓는다. 유익한 참고자료이다.

 한겨레21(04. 02. 11) 실패한 혁명가’를 읽는다

1980년대의 혁명적인 열성이 ‘아득한 옛날’로 느껴지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독서계에서는 ‘혁명가 평전’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체 게바라나 호치민, 마오쩌둥, 그리고 박열이나 여운형에 대한 ‘편안히 살게 된 세대’의 새로운 관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제는 경험해보지 못할 듯한 기존 틀들의 전면적인 부정과 신세계 창조의 ‘이질적인 체험’의 매력에 끌린 것인가? 아니면 ‘임금의 목을 쳐보지도 못한’ 채, 기존의 지배층의 권력들을 계속 인정해 지금도 친일파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혁명의 부재’에 대한 참회인가?

물론 혁명과 우리가 멀었고 지금은 더욱 멀어졌다는 사실이 역으로 ‘혁명가 평전’들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기본 틀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누적된 회의가 간접적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라는 점점 심해지는 광풍에 대한 반항과 해결법 모색의 에너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 평전’의 열풍에 대해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유의미한 존재로 다가온 외국의 혁명가인 티토나 레닌, 체 게바라, 호치민, 마오쩌둥 등이 다 결과적으로 새 국가 건설에 ‘성공’한 ‘혁명형 건국 군주’가 아닌가? 체 게바라 같은 경우는 예외라 볼 수 있지만 그에게도 사회주의적 국가 쿠바의 건설이라는 ‘후광’이 있었다. 역사 인물의 위치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꼭 ‘성패’라는 자본주의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우리의 순치된 무의식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다.

혁명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권력 관계와 ‘낙오자 되기’의 공포, 체제에의 안주 등의 포기, 반란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닌가? 반란의 결과가 고생 끝의 죽음뿐이더라도 그 해방적인 순간, 체제의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는 그 순간에 얻어지는 ‘참나’ 실존의 체험이 아닌가? 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건국의 성공’보다는 체제의 부속품이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나’를 실천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속인이 보기에는 ‘실패’한 혁명가라 하더라도 그가 지은 ‘해방적인 체험’이 담긴 시나 소설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이다. 삶에서 ‘실패’해도 작품으로 보통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에 오른 20세기의 탁월한 ‘세계주의적 혁명가’를 꼽자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서구 신좌파들의 스승이 된 빅토르 세르주(1890~1947)라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인물을 소개할 때 그 이름 앞에 그가 출생했거나 거주했던 나라 이름을 하나씩 붙이곤 한다. 그러나 궁리를 거듭해도 그의 이름 앞에 붙일 만한 적합한 국명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의 지위를 버리고 혁명에 몰두했다가 결국 망명을 결행해 벨기에에 정착한 러시아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벨기에에서 태어난 세르주는 결국 벨기에 국적을 보유하게 됐고 불어와 러시아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벨기에에 정착할 생각 없이 19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옮겼다가 그 뒤 스페인을 거쳐 1919년에 새로운 혁명의 러시아에 들어간 세르주를 ‘벨기에 사람’으로 칭하기가 힘들다. 그 뒤 9년 동안 볼셰비키 러시아의 각종 요직을 거치고 초기 코민테른의 대(對)서구 선전 작업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1928년에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죄로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했고 5년 뒤에는 투옥됐다. 몇년 뒤 몇명의 유명한 서구 지식인들의 끈질긴 구명운동 끝에 풀려나와 다시 벨기에로 가서 소련 체제의 ‘반동성’과 ‘혁명 정신의 말살’을 외쳤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선량한 신민이라는 의미의 ‘소련인’도 아니었다. 세르주는 히틀러의 군대가 서구를 휩쓴 뒤 기적적으로 멕시코로 탈출해 거기에서 소련에 의한 암살로 추측되기도 하는, 의문이 없지 않은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이 멕시코 시민으로서 멕시코의 자랑이라 할 만한 저명한 화가가 됐지만, 창작 작업을 불어로 했던 세르주를 ‘멕시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세계적 방랑자’ 세르주…. 그의 만년 소설의 무대가 자연스럽게 시베리아의 오지에서 스페인의 혁명 현장으로 옮기고 그 주인공들도 온갖 나라 사람들이 뒤섞인 것은 그의 ‘방랑 경력’을 반영하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나 당시의 혁명 거인 트로츠키(1879~1940) 등의 ‘혁명 선배’들도 국가와 민족 등의 범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러나 트로츠키와 세르주는 서로 다른 점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멕시코에서 암살당했을 때 임종의 순간에 “그럼에도 공산당은 궁극적으로 옳은 것이고 그 역사적 정당성을 잃지 않았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간 철저한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와 달리, 세르주의 정치적 지향이나 세계관은 무슨 ‘주의’로 범주화할 수 없었다. 벨기에에서 사회민주당의 청년조직에서 활약하다 체제에 안주해갔던 사민주의자들의 ‘개량주의’에 염증을 느껴 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의 편집자가 된 세르주는 ‘테러활동 고무·찬양’ 등의 죄목으로 프랑스에서 옥고를 치르고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반란의 주도자가 됐지만, 그는 수많은 남유럽 아나키스트들의 목적을 결여한 ‘폭력을 위한 폭력’을 시종일관 비판해왔다.

사민당의 간부도 아나키스트도 못 된 세르주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그와 소련 정권의 관계도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1917년 혁명의 근본 성격을 진정한 의미의 혁명으로 규정한 그였지만, 중앙집권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나 폭력을 규탄한 멘셰비키 등 기타 소수의 혁명 정당에 대한 새 정권의 비밀경찰(체카, KGB의 전신)의 살인적 탄압이나, 곡물의 강제 공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총살 또한 그의 자유주의적·인본주의적 신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련 체제의 근대적 폭력성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세르주는 레닌의 서거(1924) 전까지 그나마 공산당의 도덕성이나 “노동자 대표자로서의 성격”에 대한 믿음으로 버텨왔다.

그러나 그 뒤 트로츠키와 함께 신생국가의 관료화와 ‘혁명성 상실’을 비판하기 시작한 그와 스탈린 체제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생겼다. 그렇다면 그가 트로츠키파였는가?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그에게 붙인 딱지였지만 실제로 그와 트로츠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컸다. 트로츠키를 늘 깊이 존경하던 세르주가, 트로츠키 저서들을 불어로 번역하는 등 소수파로서 트로츠키파의 목소리가 유럽인들에게 들리게끔 만반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인본주의적 혁명가였던 세르주는 혁명의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트로츠키의 ‘과도기적 국가 폭력 긍정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정치보다 글쓰기를 더 즐긴 세르주는 <러시아 혁명의 첫해>(1930)나 <혁명의 운명>(1937) 같은 역사·정치적 저작과 <혁명가의 회고록>(1945)이라는 나중에 서구 신좌파의 필독서가 된 자신의 역사적 증언의 모음을 펴냈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것은 주로 1930년대 러시아의 암흑기를 소재로 한 그의 뛰어난 소설들이다.

<긴 황혼>(1946), <툴라예프 동지의 사건>(1948년 사후 출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스탈린 독재 체제의 완비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안고 발버둥치는 각계각층의 역사 주인공들이다. ‘정의 상실’에 끝없는 분노를 느껴 거만한 ‘공산당 귀족’을 죽여버린 열성파의 젊은 공산주의자, 시베리아의 배고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스탈린과의 ‘이론 투쟁’을 쉬지 않는 트로츠키파의 ‘강철의 혁명가’, 권력과 부에 도취되면서도 숙청의 공포로 하룻밤도 편히 자지 못하는 스탈린주의의 ‘고위층 충견’들…. 역사의 마차에 깔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들을 세르주 이상으로 극명하게 잘 보여준 작가를 광풍의 20세기에도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들을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혁명가의 회고록>) 한 세기의 비극을 함께 안고 살았던 그의 인생의 값진 결론인 셈이다.(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06. 11. 29.

P.S. 페이퍼의 제목으로 단 '반체제 맑스주의'란 표현은 그에 관한 한 영어문건에서 따온 것이다. 빅토르 세르주 아카이브(http://www.marxists.org/archive/serge/index.htm)에서 그의 저작목록과 이런저런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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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헨리 조지와 토지공개념

한국일보의 '이재현의 가상인터뷰' 코너에서 '헨리 조지'편을 읽었다. 미국의 저명한 이 사회사상가가 인터뷰에 등장하게 된 건 최근 국가적 이슈가 되고 있는 부동산 정책(실패) 때문이겠다. 필자의 순발력을 높이 살 수밖에 없는데, 비록 대담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지만(헨리 조지가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인지?) 일독할 만하다. 더불어,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라는 '제3의 길'(?)에 대해서 한번 검토해봄 직하다(개헌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상당한 '견적'의 일이긴 하지만).

한국일보(06. 11. 14)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 해결책"

이재현(이하 현) 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는 꼭 잡겠다고 여러 번 단언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돼버렸습니다. 저는, 낙향하면 고향 시골집에 가서 살겠노라는 대통령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편이라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참으로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헨리 조지(이하 조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우왕좌왕해서 그런 거야. 8.31 대책 수립시 보유세 실효세율을 선진국형 구조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목표를 도중에 스스로 포기했지, 또 보유세 강화와 함께 패키지로 추진해야 할 거래세 부담 인하를 적절한 시기에 시행하지 못했지, 그래서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취득세 및 등록세에 관한 애초의 정책 목표를 찔끔찔끔 수정玖?상황 악화 때마다 땜질 식으로 처방하다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버렸으니까 말이야. 대통령의 호언장담만 믿고 있던 실수요자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해.

결국 노무현 정권의 책임인 거죠?

조지 그야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의 책임을 신나게 질타하고 있는 보수언론도 책임이 상당해. 보수언론은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세금 폭탄’ 운운하며 참주선동했지. 열린우리당도 여기에 부화뇌동해서 정책을 거꾸로 후퇴시켰고 말야. 10억원짜리 아파트가 14억원으로 올랐다면 양도차익이 4억원이니까 연 1,000만원 종부세를 40년이나 납부할 수 있는 거야. 게다가 6억원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서민이 98.8%야. ‘세금 폭탄’이라는 말은 완전히 ‘생까는’ 얘기지.

노무현 정권 자체의 문제점은 뭔가요?

조지 투기적 가수요 세력을 우습게 본 것과, 투기의 광풍이 불어대면 결국 돈이 없는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간과한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투기로 인한 당장의 상황 말고도, 일부 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아파트 가격의 3분의 1이 거품이고, 이 거품 요인의 70% 가량이 저금리 때문이고 나머지는 부통산 투기 등 기대심리 때문이라는 데요. 잘못하면 거품이 꺼지면서 한국 경제가 다시 크게 망가질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결국 다시 그 피해는 서민들에게만 닥치는 것 아닙니까? 일부에서는 정부는 공급확대만 하고 나머지는 시장원리에 맡기라는 주장이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마는….

조지 여기서 주의할 것은 땜질식 처방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노무현 대통령이 당황해서는 안돼. 정책 실패에 분명한 책임이 있는 관료들을 데리고 회의를 해서 조잡한 대책을 내놓아 봐야 별 수가 없어. 현재까지의 실패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봐야지. 내 대안은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자는 거야. 토지보유세는 강화하고 다른 세금은 감면하는 패키지형 세제개혁을 하자는 거지.

130여년 전에 주장하신 바로 그 내용이로군요.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조지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규정해야지. 부동산 문제는 당리당략이나 정략을 벗어난 문제이고 또 단기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으니까 토지보유세 강화는 10년에서 2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해. 집권 정당이 바뀌더라도 토지공개념에서는 전혀 후퇴가 있을 수 없도록 말이야. 정책의 장기적 목표와 소위 로드맵을 미리 밝히고 국민들의 동의와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야지.

당장 현재의 투기 광풍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과제인데요.

조지 그건 어렵지 않아. 버블 세븐 지역 등을 포함해서 투기 수요나 초과 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소유 제한 제도를 과감히 도입하고, 현재의 청약제도를 확 바꿔서 무주택 실수요자가 집을 갖게 하고, 후분양제 및 원가 공개 등을 통해 분양가격을 낮추되 당첨자의 경우 매각을 할 때 국가나 주택공사에게 반드시 팔게 하면 되는 거야. 보유세는 현재의 계획대로 틀림없이 과세를 해야지. 그리고 임대소득은 과세를 강화하고 임대소득의 세원은 국세청이 철저히 추적, 관리해야지. 그러면서 임대주택 중심으로 주택 공급을 서서히 확대해나가면 투기 광풍은 잡히게 돼 있어. 이미 싱가포르 등에서 하고 있는 건데 왜 우리라고 못하겠나? 부동산 문제는 전 국민적 의지가 있으니까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장기적으로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헌법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합의해나가면 되는 거야.

저야 선생님 주장에 찬성이지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현재의 정치 국면에서 어떻게 실현시키는가가 문제겠군요.

조지 바로 그걸 하라고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정무직 공무원에게 각종 특권과 월급을 국민이 주고 있는 거야. 정책으로 승부하려 하지 않고 정계개편 따위의 조잡한 정치공학적 수작으로 집권 연장을 꾀하고 있는 정당이 있다면 국민들이 선거에서 혼내면 돼.

네, 그렇군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환생하셔서, 토지공개념을 중심으로 한 개헌을 공약으로 걸고 내년 대선에 출마하실 수는 없나요?

조지 허허…, 그건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난 미국 사람이니까 북미간 직접 대화에만 신경 쓸 거라네. 그럼 또 보세.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미국의 경제학자, 사회사상가, 사회운동가. 1879년에 출간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은 처음에는 출판사의 거부로 자비 출판했으나 그 후 폭발적인 주목을 받으며 수백만 권이 팔려 19세기 말까지는 영어로 쓰인 논픽션 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보급됐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영세 출판업자인 아버지와 전직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열두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3세 때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다 16세 때 선원이 되기도 했고 그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을 캐기도 했다. 인쇄공으로 일하다 성년이 되자 즉시 인쇄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일간지 인쇄부서에서 일하며 간간히 글을 쓰기도 했다. 1865년 링컨 대통령 피살 소식에 격분해 기고한 글이 신문 편집인의 주목을 받아 보수를 받는 기자가 됐으며 그 뒤로 신문사 특파원, 편집인 등을 지냈다. <진보와 빈곤>의 성공 후에 그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강연을 했고, 1886년에는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1897년에 재출마했으나 투표일을 4일 남기고 사망했다. <진보와 빈곤>의 한국어 완역본은 1997년에 출간됐다(김윤상 역, 비봉출판사).



헨리 조지의 사상 중 오늘날 받아들여지는 합리적 핵심은 “노동 생산물의 경우 개인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옳지만 토지는 사유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번영하는 뉴욕에서 극도의 사치와 지독한 빈곤이 공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진보 속에서 빈곤이 존재하는 원인을 경제학적으로 찾아내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지대의 폭등이 노동자 빈곤을 낳으므로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지대 전체를 사회화하는 토지가치세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를 소수의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소득세, 소비세, 각종 기업 관련 조세 등 경제적 노력에 의해 얻는 소득에 대한 과세야말로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다른 세금들을 없애고 단일한 토지가치세를 징수하는 것만이 불의를 타파하고 ‘개인의 것은 개인에게, 사회의 것은 사회로’ 돌리는 정의의 도덕법칙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토지 문제를 분배적 정의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의 차원에서도 깊이 있게 논의했던 것이다. 정부의 간섭과 과세를 혐오하면서 시장 만능주의를 설파하는 우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조차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에 대해서는 ‘가장 덜 나쁜 세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 나아가 헨리 조지는 토지 가치에 대한 기대가 소득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바로 그 기대를 불황의 원인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케인즈 경제학이 나오기 한참 전에 이뤄진 아주 획기적인 이론적 설명이었다. 형평과 효율을 함께 충족시키려는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 정신을 오늘날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정통파 조지주의자(Georgist)들인데 이들은 헨리 조지의 이론이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고 있으며, 자신들의 경제학을 Geonomics로 부른다. 여기서 'Geo'란 바로 지구란 말에서의 ‘지(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헨리 조지의 이론이 갖는 생태학적 함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온건파 조지주의자들은 단일한 토지가치세만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토지가치세를 우선적으로 징수하되 다른 조세도 복수적으로 징수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헨리 조지의 이론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여 연구한 그룹은 김윤상, 이재율, 전강수, 이정우 교수 등과 같은 대구 지역 경제학자들이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내면서 개혁적 경제정책을 수립ㆍ추진하다가 안팎의 압력으로 인해 중도하차한 것으로 보도됐다.

06. 11. 14.

 

 

 

 

P.S. 헨리 조지의 주저인 <진보와 빈곤>(비봉출판사, 1998)은 뒤늦게/진작에 번역돼 있다(알라딘에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개인적으론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건 '토지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기 위해서였다. 흔히 쳥년시절 카츄사의 정절을 유린한 귀족 네흘류도프가 중년의 배심원으로 나선 법정에서 살인혐의까지 뒤집쓴 창녀 카추샤를 다시 만나면서 참회와 부활의 길을 걷게 된다는 줄거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의 상당 부분은 토지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는 '지주' 네흘류도프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비록 지주계급에 대한 의심 때문에 농민들은 그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때 톨스토이가 크게 감화를 받아서 참조한 것이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었던 것. 그러니, (비단 현재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와 빈곤>은 참조해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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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http://www.dambee.net/)에서 학술동향기사 한 편을 옮겨온다. '한국사회학'에 게재된 한 논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도 기사의 부제로 붙어 있는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문화적 모더니티의 세계감 분석'이 그 논문의 제목인 듯하다. 사회학 논문으로서는 이채로운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흥미로운 주제이고 분석이다.

담비(07. 02. 24) 멜랑콜리, 우울한 토성의 아이들

세계관, 인생관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감(世界感)이라는 단어는 뭘까. 최근 문화적 모더니티를 연구하는 논문에 자주 등장하게 될 단어다. 프랑스에서 국내 사회학자로서는 드물게 영상사회학 이론을 전공하고 돌아온 김홍중 박사의 논문은 문화적 모더니티와 관련한 첨단의 인식론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도 매우 알기 쉽고 유려하게 인식의 깊이와 이론적 해박과 서술의 겸손함을 곁들여서 말이다. 그가 '한국사회학'  제40집 3호에 발표한 '멜랑콜리와 모더니티'는 이 '세계감'이라는 낯선 용어로 인간의 자기인식과 세계인식을 표현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어느 날 파리의 한 유명한 신경전문의에게 환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세기병"에 시달려 살고픈 의욕이 거의 없으며, 기분이 늘 침울하고 항상 권태롭다고 털어놓았다. 의사는 걱정말라고 다독인뒤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날을 잡아서 드뷔로의 공연을 보러가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인생이 달라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드뷔로는 19세기 프랑스 무언극 배우로 명성을 떨쳤는데, 천진하면서도 슬픈 웃음을 자아내는 현대적 광대의 원형을 창조한 배우다. 그런데 의사의 말에 대한 환자의 답이 가관이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바로 드뷔로입니다."

이상은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의 '권태, 영겁회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드뷔로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중세의 광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의 신랄한 재담과 파괴적인 농담 그리고 과장된 몸짓과 가면 뒤에는, 종종 사태를 명증하게 파악하는 비판적 지성의 단초 혹은 이러한 지성의 소유자가 '어리석은' 세계에 대해서 가질 법한 깊은 상심이 은폐되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위의 일화에 숨은 더 심각한 것을 지적한다. 그것은 우울을 풀어주는 광대마저 우울증에 걸린 난감한 상황이다. '세기병'이라는 표현은 우울이 이제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사나의 세계감(感)으로서 존재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이다.

그 어떤 것에도 진정한 삶의 활력을 느끼지 못하는 '타성의 원천'으로서의 멜랑콜리. 이것이야 말로 무사태평한 웃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이 시대의 질병이며, 우리로부터 명령과 복종과 행동과 희망의 용기를 앗아간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지적한 바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세계감이 사회의 모든 부면에서 성취된 전례 없는 혁신에 대한 자신감과 낙관 위에 설립된 근대의 진보적 세계관의 필연적인 그림자라는 것.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정신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막스 베버)를 만들었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까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의 힘에 복속된 '토성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지금껏 온갖 학문들은 근대적 세계감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인 이 토성적 감정의 발생과 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보여주지 못했다. 멜랑콜리는 대다수 문화적 산물들의 심정적 배경을 구성하는 문화해석학적 열쇠임이 점점 분명해지는데도 말이다. 김 박사는 이 지점에서 그것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하이데거의 '정조'(Stimmung) 개념을 끌어온다.

역시 서구 형이상학을 탈구축한 하이데거가 192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겨울학기 강의에서 던진 질문은 참으로 멋드러진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사유를 뒷받침하는 감정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무엇인가. 이성의 추리와 전개로 구축되는 철학의 기저에 특수한 감정의 상태가 놓여있다는 인식, 즉 로고스와 파토스의 위계를 전도시키는 시도가 담겨있다.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통해 '사유'와 '의지'에 늘 종속되어 있던 '느낌' 즉 감정의 질서를 학문적으로 복권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가장 유명한 개념은 다자인(현존재, Da-Sein)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바로 그것. 세계 안에 던져진 유한자는 자신앞에 펼쳐지는 무한한 가능성과 직면하고 있는 자기형성적인 주체이다. 하이데거는 다자인을 다자인으로 만드는 것은 코지토가 아닌 정조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권태, 환희, 불안의 정조를 분석했으며, 정조란 다자인이 세계와 화음을 조정하는 과정이며 세계의 객관적인 음조와 주체의 음조가 섞이고 부딪히고 조정되어 형성되는 일종의 음역(音域)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조가 사유보다 근원적인 체험의 양식일 때, 사유라는 상부구조는 자신의 전(前)-사유적인 하부구조로서 감정적 차원을 갖게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을 가능케한 것은 '경이의 감정'이었고, 데카르트적 근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의혹의 정조'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조차 20세기의 사유를 규정하는 본원적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차갑고 냉정한 계산적 합리성에 의해 정조가 압살된 듯 보인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근대적 사유의 근원적 정조는 느낌의 불가능, 열정의 불가능, 파토스의 불가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적 사유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조는 파토스의 분출이 아니라 그 퇴행과 은폐이며 감정의 원초적 폭발이 아닌 소멸이라고 말이다. 니체가 근대문화 일반을 데카당스라 부르며 그토록 폄하했던 이유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조건을 뛰어 넘어 초월적인 것과 소통하는 고양의 체험에 동반되던 비극적 감정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초엽의 인간들은 이러한 존재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물론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인 주체는 합리적 이성에 근거해 세계와 대면하고, 세계를 분절하고 측량한다. 반면 권태롭고 우울한 우울자들은 그가 대면할 세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지 못하고, 세계를 분절할 수 있는 경계를 상실한 이들이다. 그는 정서의 욕동을 단호하게 억제하면서 미래를 투기하지 못하고, 토성적 정조에 사로잡혀 현실원칙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욕망의 노마드다.

근원적인 내적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파편들을 끊임없이 섭취하고 내면화하는 일종의 복합적인 식인증적 주체와 조응하는 멜랑콜리의 세계, 이것은 하나의 '기호학적 폐허'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물신으로 구성된 파편적이고 환몽적인 세계와 식인증적 주체의 변증법적 관계를 더 들여다보면 놀라운 역설이 발견된다. 토성적 정조의 근본적 징후인 '식인증'은 어떻게 보면 '우울증적 전략'이라 부를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

피에르 페디다(Pierre Fedida)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심화시키면서 "멜랑콜리는 대상의 상실에 따른 퇴행적 반응이라기보다, 오히려 상실된 대상을 살아있게 만드는 몽환적인(또는 환각적인) 능력"이라고 말한다. 김 박사는 이걸 좀더 명료하게 요약한다. 토성적 정조는 무언가의 상실로부터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사실은 상실을 인식하고 상실을 문제시하게 만드는 조건이라는 사실. 무언가를 상실해서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하기 때문에 상실을 인지하고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계내의 기호들을 삼킨다는 것이다. 우울자는 그가 단 한번도 소유해 본적이 없는 '그것'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의 회복을 끝없이 '연기'(延期)한다고 말한다.

사실 우울자에게, 진정한 소유의 대상은 바로 상실감 그 자체이다. 이 대목에서 아감벤은 "식인증이란 이처럼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상실된 것으로서' 나타나게 하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재현불가능한 것으로서 표상되게 하며,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알레고리적으로' 접근가능하게 해주는 토성적 정조의 전략"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사회적 모더니티가 빠른 속도로 일소해버린 초월적 가치들과 대상들, 즉 사유의 타자들을 문화적 모더니티의 영역에서 생존시키려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김 박사는 부언한다. 신은 죽었지만 '죽은 신'은 하나의 형식으로 살아남고, 예술도 죽었지만 '죽은 예술'은 하나의 이상으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소멸한 총체성은 가능성의 범주로서 살아남고 이들 앞에서 우리는 우울하다.

초월적 가치를 아직도 신앙하는 자는 우울하지 않다. 또한 이들이 완벽하게 소멸되었다고 믿는 자 역시 우울할 수 없다. 우울자는 그 중간에 머물면서 '소멸됨으로써 살아 있는 어떤 것'을 끝없이 추구한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인이 바로 보들레르이다. 릴케 같은 이도 '두이노의 비가'에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영웅은 존속한다. 영웅의 추락은 단지 존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김 박사는 결론에서 "근대적 로고스의 타자를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사유의 형식 안으로 포섭하는 문화적 모더니티의 심연적 성찰성의 근저에는, 하이데거가 권태라고 불렀던 근대적 형이상학의 근본 정조, 즉 토성적 정조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패기만만한 진보주의자들과는 달리, 어둡고 우울하지만 한층 더 심오한 정신적 역설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리뷰팀)

07. 02. 25.

 

 

 

 

P.S.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이데거의 1929/30년 겨울학기 강의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고독>(까치, 2001)로 번역돼 있다. '우울증'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책은 크리스테바의 <검은 태양>(동문선, 2004)인데 기억에 딱히 '모더니티'를 특화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페디다의 <우울증의 유익>도 소개되면 좋겠다.

마침 '모더니티'와 관련해서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은 앙리 르페브르의 <모더니티 입문>(동문선, 1999), 앙리 메쇼닉의 <모데르니테, 모데르니테>(동문선, 1999), 그리고 에른스트 벨러의 <아이러니와 모더니티 담론>(동문선, 2005) 등이다. 물론 모더니티 관련서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적어도 20여 권의 목록이 꾸려질 수 있다). 개인적으론 미술 관련서로 칼리니스쿠의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시각과언어, 1998)까지 챙겼으면 하지만 아마도 박스에 들어가 있는 듯싶다(이 책은 일종의 사전이다). 그 다섯 얼굴에 모더니티의 주된 정조로서 '우울한 표정'을 더 보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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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김선우의 충만한 아름다움

주말마다 옮겨오는 경향신문의 연재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에는 시인 김선우씨가 '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평론가 신형철씨가 거들고 있다. 한겨레('모 일간지')의 '18도' 지면에서도 그녀의 칼럼을 종종 읽을 수 있으므로 젊은 시인들 가운데는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시집으론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물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등이 있다.

 

경향신문(07. 03. 03) [작가와 문학사이](8)김선우-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거름을 줘야 한다.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신형철|문학평론가)

07. 03. 03.

P.S. 시인은 지난 2004년,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피어라, 석유!' 등의 시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사에도 인용되고 있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그 아래는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 '도화 아래 잠들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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