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러시아 부조리극의 진수

아침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란 기사가 있다. 몇 차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는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타 밤>이 국내에서 공연된다는 기사였다(이 작품은 <작가세계> 겨울호에 번역돼 있다. 장면번호와 지문들이 대거 생략된 판본을 옮긴 것인지라 좀 아쉽지만). 러시아의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를 초빈하여 경기도립극단에서 내달초에 공연한다는 것인데, 러시아에서도 (내가 알기론) 거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라 더더욱 놀랍고 흥미롭다. 연출자의 구상대로 '러시아 부조리극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경향신문(07. 01. 24) 바실례프 “하름스 부조리극 진수 보여줄것”

‘부조리극’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를 떠올린다.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조가 확실한 서사극에 익숙해진 국내 관객들에게 앞뒤의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부조리극은 마냥 어렵기만 하다. 부조리극의 개념조차 생소한데 하물며 이름마저 낯선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부조리극을 무대에 올린다니, 참으로 모험이다.

오는 2월1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따 밤’을 국내 처음 선보이는 러시아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는 “러시아에서도 하름스의 이름이 알려진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를 생소하게 여기는 건 당연하다”며 “하지만 어둡고 철학적 내용을 다룬 베케트, 이오네스코와 달리 일상적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분명 매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립극단의 초청으로 지난 7일 한국에 도착한 바실례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학 교수로 연극 연출가이자 이름 난 신체·발성 훈련의 전문가다. 이번 방한에서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을 상대로 발성과 언어, 신체 훈련을 위한 세미나를 진행하는 한편 하름스의 작품 ‘엘리자베따 밤’을 무대에 올리는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1905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하름스는 스탈린 시대를 살다간 불우한 작가다. 어린이 글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소설·드라마·희곡 등을 썼다. 그러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어린이 글을 제외한 그의 작품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에야 서방과 러시아에서 그의 작품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학계를 중심으로 하름스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2004년 처음으로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가 출판됐다.



“하름스는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보다 20년이나 앞서 부조리극을 썼습니다. KGB가 한 여자를 체포하는 과정을 그린 ‘엘리자베따 밤’은 상관없을 듯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소극을 이루지만 결국 퍼즐처럼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사실주의, 코미디, 음악극, 오페라 등 현존하는 모든 연극 장르를 보여주는 게 흥미롭죠. 때문에 한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독재정권을 경험한 나이든 세대는 작품에 깔린 공산주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바실례프는 부조리극에 대한 관객들의 거리감에 대해 “며칠 전 동대문운동장 벼룩시장을 방문했는데 왜 상인들이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왜 그곳을 찾는지도 생각해보면 다 웃기고 이해가 안가는 부조리”라고 설명한 뒤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가 곧 우리의 인생이며 유머로 부조리를 이해해야 우리는 남을 덜 미워하고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름스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스탈린 정권의 독재를 직접 경험했다. 이로 인해 이번 ‘엘리자베따 밤’에는 그의 경험이 녹아있다. 원작과 달리 무대의 배경을 한 집에 다수의 가족들이 사는 공산주의식 아파트로 설정한 것 등이 한 예이다.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에 대해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은 살아있는 배우들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고 흡수도 빠르다”며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 배우들은 내면세계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듯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바실례프는 2년6개월 전에도 경기도립극단을 방문해 배우 훈련을 맡은 적이 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배우 전무송씨가 그를 다시 초빙했다. 서양고전무대, 현대극 위주의 실험무대, 한국창작무대 등을 매년 한편씩 시도하겠다는 전감독은 “첫 실험무대로써 바실례프가 추천하는 하름스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며(*'실험무대로서'의 오타가 눈에 띄는군) “배우들을 창의적으로 이끄는 바실례프의 훈련과 하름스의 작품을 통한 새로운 연극적 도전은 배우들뿐 아니라 한국 연극 발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극 ‘엘리자베따 밤’은 다음달 1일 공연된 후 2월부터 넉달간 한 달에 한 번 상설무대로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문주영 기자)

07. 01. 24.

P.S. 드물게 보는 공연 사진이 있어서 옮겨놓는다(짐작엔 '연습' 장면 같다).

Елизавета_Бам_Шпица&Юсупов.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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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러시아 부조리극의 진수

아침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란 기사가 있다. 몇 차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는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타 밤>이 국내에서 공연된다는 기사였다(이 작품은 <작가세계> 겨울호에 번역돼 있다. 장면번호와 지문들이 대거 생략된 판본을 옮긴 것인지라 좀 아쉽지만). 러시아의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를 초빈하여 경기도립극단에서 내달초에 공연한다는 것인데, 러시아에서도 (내가 알기론) 거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라 더더욱 놀랍고 흥미롭다. 연출자의 구상대로 '러시아 부조리극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경향신문(07. 01. 24) 바실례프 “하름스 부조리극 진수 보여줄것”

‘부조리극’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를 떠올린다.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조가 확실한 서사극에 익숙해진 국내 관객들에게 앞뒤의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부조리극은 마냥 어렵기만 하다. 부조리극의 개념조차 생소한데 하물며 이름마저 낯선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부조리극을 무대에 올린다니, 참으로 모험이다.

오는 2월1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따 밤’을 국내 처음 선보이는 러시아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는 “러시아에서도 하름스의 이름이 알려진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를 생소하게 여기는 건 당연하다”며 “하지만 어둡고 철학적 내용을 다룬 베케트, 이오네스코와 달리 일상적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분명 매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립극단의 초청으로 지난 7일 한국에 도착한 바실례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학 교수로 연극 연출가이자 이름 난 신체·발성 훈련의 전문가다. 이번 방한에서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을 상대로 발성과 언어, 신체 훈련을 위한 세미나를 진행하는 한편 하름스의 작품 ‘엘리자베따 밤’을 무대에 올리는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1905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하름스는 스탈린 시대를 살다간 불우한 작가다. 어린이 글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소설·드라마·희곡 등을 썼다. 그러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어린이 글을 제외한 그의 작품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에야 서방과 러시아에서 그의 작품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학계를 중심으로 하름스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2004년 처음으로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가 출판됐다.



“하름스는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보다 20년이나 앞서 부조리극을 썼습니다. KGB가 한 여자를 체포하는 과정을 그린 ‘엘리자베따 밤’은 상관없을 듯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소극을 이루지만 결국 퍼즐처럼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사실주의, 코미디, 음악극, 오페라 등 현존하는 모든 연극 장르를 보여주는 게 흥미롭죠. 때문에 한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독재정권을 경험한 나이든 세대는 작품에 깔린 공산주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바실례프는 부조리극에 대한 관객들의 거리감에 대해 “며칠 전 동대문운동장 벼룩시장을 방문했는데 왜 상인들이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왜 그곳을 찾는지도 생각해보면 다 웃기고 이해가 안가는 부조리”라고 설명한 뒤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가 곧 우리의 인생이며 유머로 부조리를 이해해야 우리는 남을 덜 미워하고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름스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스탈린 정권의 독재를 직접 경험했다. 이로 인해 이번 ‘엘리자베따 밤’에는 그의 경험이 녹아있다. 원작과 달리 무대의 배경을 한 집에 다수의 가족들이 사는 공산주의식 아파트로 설정한 것 등이 한 예이다.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에 대해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은 살아있는 배우들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고 흡수도 빠르다”며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 배우들은 내면세계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듯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바실례프는 2년6개월 전에도 경기도립극단을 방문해 배우 훈련을 맡은 적이 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배우 전무송씨가 그를 다시 초빙했다. 서양고전무대, 현대극 위주의 실험무대, 한국창작무대 등을 매년 한편씩 시도하겠다는 전감독은 “첫 실험무대로써 바실례프가 추천하는 하름스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며(*'실험무대로서'의 오타가 눈에 띄는군) “배우들을 창의적으로 이끄는 바실례프의 훈련과 하름스의 작품을 통한 새로운 연극적 도전은 배우들뿐 아니라 한국 연극 발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극 ‘엘리자베따 밤’은 다음달 1일 공연된 후 2월부터 넉달간 한 달에 한 번 상설무대로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문주영 기자)

07. 01. 24.

P.S. 드물게 보는 공연 사진이 있어서 옮겨놓는다(짐작엔 '연습' 장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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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스탈린과 러시아 현대사

국내에 출간된 가장 두꺼운 레닌 평전 <레닌>(시학사, 2001)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1947- )의 신작 <스탈린, 강철 권력>(교양인, 2007)이 번역돼 나왔다. 이번엔 1,000페이지가 넘으니 거의 '사건' 수준이다. 작년에 같은 출판사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에서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교양인, 2006)을 번역해낸 역자 윤길순씨의 작품인데, 반 년도 지나지 않아 이만한 분량을 번역해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경이롭고 경탄스럽다(이 정도면 스탈린시대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수준 아닌가?!).

 

 

 

 

어쨌든 그 경이로운 '노동' 덕분에 표트르 대제와 함께 러시아사의 '주인'이자 20세기 최고의 권력자 스탈린의 삶을 우리말로도 따라가볼 수 있게 되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와 우리식의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덧칠돼 있던 스탈린의 모습을 그 실물에 가깝게 복원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전에 국내에 소개된 가장 방대한 전기는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한림출판사, 1972; 원저는 1960)이며, 이 책은 '정치적 전기'란 부제를 갖고 있다. 알다시피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5) 등 트로츠키 전기 3부작을 쓴 도이처는 트로츠키의 시각에서 스탈린을 조명한다.

참고로 <스탈린, 강철권력>의 원서 'Stalin'은 2004년에 나왔으며 736쪽의 영어 보급판은 작년 10월말에나 출간됐다. 가격은 아마존에서 14.16달러이니까 배송료를 포함해서 25,000원이 안 들겠다(국역본은 40,000원대. 왜 더 비싼가? 번역 비용이 추가되어야 하니까!). 

저자인 서비스는 "러시아 혁명사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은 영국의 역사학자이다. 19~20세기 러시아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사 분야까지 폭넓은 영역에 걸쳐 선구적 연구 성과를 낸 러시아사의 권위자이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배제하고 냉정한 분석을 앞세우는 그의 연구 방법은 학계와 평단의 찬사를 얻었으며, 치밀한 연구 태도와 방대한 자료 조사,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문체는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한국의 독자들도 사로잡을 수 있을는지.

작년에 내가 <레닌>을 구하면서 도서관에 신청했던 서비스의 책은 <러시아 현대사: 니콜라이 2세부터 푸틴까지>(하버드대학출판부, 2005)였다(조만간 대출해봐야겠다). 이런 책과 함께 그와 공동 저작을 여러 권 같이 낸, 역시나 20세기 러시아사 전문가인 제프리 호스킹의 책들이 더 번역/소개되면 좋겠다(호스킹의 책은 <소련사>(홍성사, 1988)이 소개됐지만 현재는 구할 수 없다. 물론 소련 몰락 이전의 시각을 담은 책이라 재출간에는 한계가 있겠고 대신에 <러시아와 러시아인(Russia and the Russians)>(하버드대출판부, 2001) 같은 책이 소개됨 직하다).

가디언지의 서평에 따르면, "<스탈린, 강철 권력>은 결함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재능이 풍부했던 스탈린이라는 정치가의 복합적인 내면 세계를 되살려냈다. 저자는 트로츠키가 주조한 스탈린의 고전적인 이미지에 도전해 그 이미지를 깨뜨린다. 이 책은 스탈린이 어떻게 마음 속까지 철두철미한 계급 투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혁명의 심장부의 권력 투쟁에서 일반 당원들의 믿음에 부응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스탈린의 전모' 혹은 수수께끼는 다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또다른 전문가의 서평을 읽어본 바로는 그렇다. 바로 지난주 'The Moscow Times'지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재수록돼 있는데,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필자인 쉴라 피츠패트릭은 스탈린시대 전문가로서 그녀가 엮은 책 'Stalinism : new directions'(Routledge, 2000)은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에서도 참조되고 있다.  

Closing In on Stalin

Josef Stalin preferred to be seen from afar -- larger than life, inaccessible. In a major new biography, Robert Service tries to cut him down to human size.

By Sheila Fitzpatrick
Published: April 15, 2005

There have been so many new biographies of Josef Stalin lately that we may almost be reaching the point of Stalin fatigue. Not that the subject has become fully comprehensible -- far from it -- or that any of the biographies has the instant-classic status of Ian Kershaw's two-volume "Hitler." Simon Sebag Montefiore's contribution from last spring,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 added a new dimension with his lively and highly readable, but still well-researched, portrait of Stalin in the company of his political associates and in his social and family milieu. Service, who thanks Montefiore in his preface and was warmly thanked by him in Montefiore's introduction, has taken another tack. Already the author of a history of Soviet Russia, Service sets out to give us Stalin in his historical context.(*몬테피오레의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됐다.)

Although Service is well-equipped for this task and has done his homework in the archives, including the newly opened Stalin papers, the dictator's personality seems to elude him. Again and again he dutifully lays out alternative motivations for Stalin's actions, a procedure which, fair-minded and historiographically useful though it is, doesn't necessarily help the reader understand what kind of man Stalin was. Still, he offers some valuable corrections to a number of the received opinions about Stalin. Service's Stalin is highly intelligent, even intellectual, despite what Leon Trotsky said about him. He was never a "gray blur" or colorless organization man, as Nikolai Sukhanov wrote. And he was absolutely not, as Trotsky liked to claim, a mere cog in the bureaucracy, but rather someone who very definitely ran the show.

All of these points are well taken, and it is particularly useful to have the ghost of Trotsky's interpretation, once hegemonic in leftist as well as Sovietological circles, chased away. No one who has looked at the new archival materials could doubt Stalin's intelligence. Moreover, it's clear that he thought like an intellectual (that is, analytically), read prodigiously and widely, and had the habit when faced with a new political task -- thinking about Soviet diplomatic options in Europe in the 1930s, for example, or directing the Soviet military effort in World War II -- of systematically researching the topic in preparation. It turns out that not only was he an intellectual, he was a compulsive and professional editor who corrected any manuscript that crossed his desk for style and grammar as well as for ideology.

Stalin's sense of national identification has been the subject of much speculation. In Service's version, Stalin was not particularly hung up on this question, being neither a passionate and absolute convert to Russianness, as Robert C. Tucker argued, nor, as others have suggested, an unreconstructed Georgian whose bloodthirstiness as a ruler can be explained in terms of age-old Caucasian patterns of machismo and revenge. Service's sensible comment is that, like many other people who live somewhere other than their birthplace, Stalin had a sense of himself as both Georgian and Russian, the balance between the two changing according to circumstance. In addition, he was a serious Marxist, whose commitment to internationalism effectively ruled out any form of passionate nationalism.

Service's take on Stalin's relations with Vladimir Lenin, especially in the difficult years of Lenin's last illness, when Lenin became increasingly critical of Stalin and finally pronounced him unfit to be general secretary, is particularly interesting. This is a topic Service knows well from his work on "Lenin: A Biography," in which he showed clearly how much Lenin's intellectual coherence and emotional balance were affected by his strokes. Telling the story from the other side, Service presents Stalin as largely a victim of Lenin's unreasonableness and his own obligations as a Central Committee go-between. This applies not only to the famous "rudeness to my wife" incident, in which Lenin, already seriously ill, rebuked Stalin for his behavior to Nadezhda Krupskaya, but to Lenin's criticism of Stalin's interpretation of Soviet nationalities policy, which many historians have taken to be rational and justified, rather than the confused intervention by a sick and angry man.

This interaction between Stalin and a dying Lenin is a comparatively rare example in Service's biography of an episode in which Stalin appears more sinned against than sinning. The only other similar case is Stalin's relations with his second wife, Nadezhda Alliluyeva, where Service, like Montefiore, foregrounds her difficult personality and psychological fragility. Stalin may have been a neglectful husband, like many another man in public life, but their correspondence when he was absent shows him as the more affectionate and conciliatory partner in what was clearly a volatile marriage. Understandably, Stalin had a sense of betrayal, as well as grief and loss, when she committed suicide in 1932.

Any biography of Stalin must try to explain key episodes in his career, including the dramatic initiatives of the Great Break at the end of the 1920s, when Stalin embarked on all-out collectiv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the Great Purges of the late 1930s; the ups and downs of wartime leadership; and the swing into anti-Semitism of the postwar years. Service sees the purges as an intensification of rather than departure from Stalin's earlier patterns, pointing out what many other scholars have missed -- that Stalin distinguished himself by ruthlessness and indifference to the scale of casualties as early as the Civil War. (This may be another occasion where Trotsky's picture was misleading. As the other great Bolshevik proponent of bloodshed from this period, he presumably had little interest in identifying this as one of Stalin's notable characteristics.)


MT Archive

In his new book, Robert Service attempts to go beyond previous portraits of Stalin as an intellectual fraud or a gray bureaucrat.

 

 

 

 

 

 

 

 

 

On other big issues, however, Service has fewer insights to offer. What propelled Stalin into the wildly ambitious gambles of the Great Break and the First Five-Year Plan remains obscure, as does the mechanism by which he gathered his team of devoted executants. Vyacheslav Molotov appears suddenly in the narrative as a totally reliable No. 2 to Stalin, though all the reader has previously heard of him is that he and Stalin clashed in 1917 before Lenin's return from exile. As for the postwar period, the biography really trails off here. Service doesn't regard Stalin as a dyed-in-the-wool anti-Semite, probably correctly, but leaves the reader uncertain as to why he made the lurch into covertly state-supported anti-Semitism in the late 1940s and early 1950s. Stalin's striking retreat from hands-on leadership in the last years of his life, apart from a few favored issues which almost certainly included the anti-Semitic demarche of the Doctors' Plot, gets only perfunctory discussion.

Service had the laudable intention of writing a biography that would show Stalin as a human being rather than as a stereotypical personification of evil, but he only partially succeeds. His Stalin does seem human, though unattractive, and Service does not take the easy way out of suggesting that his suspicious and even paranoid characteristics amounted to madness. But Service fails to achieve the kind of vivid recreation of a personality that leads the reader to feel he has finally understood what made Stalin tick. Why was he so bloodthirsty as a ruler, and why did his associates follow him even after the debacle of the German attack in June 1941, when Stalin clearly expected to be overthrown? Service's historical landscape is quite precisely drawn, but the protagonist who inhabits it remains shadowy and distant -- which is no doubt the way Stalin, a great editor of his own personal archive as well as other people's manuscripts, intended it.

Sheila Fitzpatrick is the author of "Tear Off the Masks! Identity and Imposture in Twentieth-Century Russia," to be published by Princeton University Press this summer.

서평 말미의 필자 소개에는 근간으로 돼 있지만 이 책 <가면을 벗겨내라! : 20세기 러시아에서 정체성과 사칭>(프린스턴대출판부, 2005)은 이미 출간되었다. 아주 흥미로울 듯한 책이다. 참고로, 피츠패트릭 여사의 책으론 <러시아혁명 1917-1932>(대왕사, 1990)이 번역돼 나온 바 있다(놀랍게도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07. 02. 01.  

Неизвестный Сталин

P.S. 러시아서점 오존을 둘러보니까 스탈린 관련 최신간은 저명한 역사학자 로이와 조르스 메드베제프 형제(로이의 책들은 국내에도 여러 권 소개돼 있다)의 <알려지지 않은 스탈린>(2007)이다. 7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고 물론 스탈린의 비밀 문서고를 뒤져서 얻은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궁금한 신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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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 만들기

한국일보의 서평을 둘러보다가 어제 지면에서도 지나쳤던(게재는 되었던 것일까?)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미스테리한 것은 아직 어느 온라인서점에서도 이 서평기사의 대상이 떠 있지 않다는 점. 무슨 유령 같은 책이다. 기자가 서평을 작성한 것으로 보아 언론사에는 '뿌려진' 듯하지만 다소 늦게 보내진 탓에 다음주로 서평들이 미뤄지거나 별로 주목을 못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해본다. 한데 주제 자체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쪽이어서 책은 나오는 대로 훑어봐야겠다. 그 책의 타이틀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시유시, 2007)이다.

원저의 제목은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 만들기(Making Capitalism Without Capitalists)>이며 지난 1999년 버소출판사에서 나왔다(부제는 '사회주의 이후 중부유럽에서의 계급형성과 엘리트 투쟁'이다). 이런 류의 책으로는 좀 오래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게 흠이긴 한데, 책에서 다루는 러시아나 동유럽 경제만 하더라도 2000년 이후에 상당히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는 맘에 든다.

한국일보(07. 03. 10)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동유럽의 脫공산주의 다시보기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속속 몰락하자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는 재빨리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가 냉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헤겔-마르크스가 말하던 진화적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들도 후쿠야마의 판단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진 않다. 대신 그 선정적 구호를 ‘역사의 다양한 종언’이라고 바꾸지 않을까.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이다. 책은 그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특히 유산 부르주아 층이 빈약한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역이행하면서 밟는 다양한 경로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그 대표적 사례로 동유럽 국가의 변동 과정을 실증 분석한다. 설명에 따르면 사유재산을 가진 계급이 없었던 이들 나라에서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한 것은 교양 부르주아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가사회주의를 공격하던 반체제 지식인이었다. 예상과 달리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귀족 관료는 신체제에서 기존 권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신세대 관료라 할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교양 부르주아와 손잡고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등장했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에서 두드러진,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었다. 이 같은 현상의 분석 틀을 마련하고자 저자들은 베버와 브루디외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 전자에선 신분과 계급의 구별을, 후자에선 정치자본 문화자본 경제자본 등을 포괄하는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빌렸다.

이 관점에서 동유럽의 탈공산주의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역동성이 포착된다. 체제 변동에 뒤쳐질세라 개인들은 앞 다퉈 사회주의적 신분에서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정체성을 조정한다. 바꿔 말하면 변화한 환경에 유리한 자본은 늘리고 불리한 것은 버리면서 자본 포트폴리오=아비투스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치열한 적응 과정을 거치며 문화자본을 가진 지식인-기술관료 연합은 정치·사회자본을 갖춘 엘리트 관료를 압도한다. 교양이 권력과 권위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진풍경이 펼쳐진 셈이다.

영미식 모델에 구애받지 않고 각각의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특성을 드러내는 것. 저자들은 이 야심찬 기획을 ‘신고전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으로 대표되는 고전사회학이 19세기 근대자본주의 이행을 분석했다면, 신고전사회학은 20세기 말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이훈성 기자) 

07.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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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이것이 저술가의 서재다

현대와 삼성의 배구 맞대결 기사를 읽다가 손가락 가는 대로 끌려들어가 읽은 기사는 한겨레의 '재모아빠' 혹은 구본준 기자(http://wnetwork.hani.co.kr/bonbon/)가 쓴 '필진네트워크' 기사이다. 지면에 게재되는 기사는 아니라는 뜻이다. 건축사학자인 임석재 교수의 '거대한 자료실' 탐방기사인데, 얼마간은 부러운 마음으로 죽 둘러보았다(나는 내달 '고아원'에 있는 책들을 근처 다른 '고아원'에다 옮겨놓아야 한다). 저술가가 되면 이런 자료실을 갖게 되는지, 아니면 자료실을 마련해야 저술가가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한 가지 '모델'로 창고에 넣어둔다(하긴 이웃나라엔 '고양이 빌딩'을 갖고 있는 저술가도 있다고 하니 '저술가의 서재'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은 아니지만).

한겨레(07. 02. 16)[필진] 이것이 저술가의 서재다

2년쯤 전이었습니다. 모처럼 건축사학자 임석재 교수를 만났는데, 근황을 묻자 “서재를 구해 책들을 옮겼다”고 하더군요. 새로 구한 서재는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라고 했습니다. 임교수의 집이 직장인 이화여대 근처 아현동인 것을 알고있던 저는 왜 가까운 집 놔두고 그렇게 멀리 서재를 구했는지 궁금해 다시 물었습니다. 임교수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자료가 너무 많아서 20평짜리 집에서는 불가능한 지경”이란 겁니다. 게다가 자기는 공기 좋은 곳이 좋으니 금상첨화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자료가 얼마나 되기에 집까지 옮겨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임 교수는 집안 전체가 자료로 가득찼다고만 빙긋 웃었습니다. 무척이나 궁금해서 언젠가 한번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5일, 임석재 교수의 광주 아파트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10여년 동안 무려 28권의 책을 쓴 우리 시대 대표적인 건축글쟁이, 그 글쟁이의 서재를 찾아가는 제 연재 기사 <한국의 글쟁이> (한겨레 출판섹션 ‘18도’섹션 참조) 열아홉번째 초대손님으로 임 교수를 모시게 된 것이 제가 임교수 댁을 찾아가게 된 경위입니다(*그러니까 다음주 연재가 '임석재 교수' 편이겠다).

임교수의 집은 광주 시내를 살짝 벗어난 언덕 위에 잡은 비교적 대단지 아파트였습니다. 평수는 제법 넓었는데 방이 5개 짜리더군요. “서울에서 드는 비용으로 2배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임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는 곳이 아닌 완전한 집필실로 마련한 공간입니다. 임교수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현관에서 보이는 집안 모습은 이 곳이 ‘거대한 자료의 바다’임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현관에서 마루로 이어지는 짧은 복도 같은 공간부터 철제 책장이 놓여있는 모습이었습니다.

IMG_2158(3232).jpg

집안 조금이라도 빈 공간에는 책장들이 열병하듯 서있었습니다. 마루는 그저 큰 방일뿐이었습니다. 마루 가운데에는 책상이 있고 나머지 모든 벽은 책장을 놓았습니다. 자, 마루 책상 앞에 선 임석재 교수입니다.

임 교수는 마침 슬라이드 필름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임교수는 글쟁이이면서도 사진을 직접 해결합니다. 사진을 거의 전문적으로 찍는데, 내년도 이화여대 다이어리를 임교수가 찍은 우리나라 전통가옥들 사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52주별 그림으로 넣을 52개 전통가옥별로 좋은 사진을 고르던 차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슬라이드보관통과 사진을 살피는 도구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5개의 방은 방 하나 하나가 모두 서재였는데, 나름대로 분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사진 자료를 넣어놓는 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물별 자료방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축가, 미술가, 철학자 등 개인들에 대한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또다른 방 2곳은 시대별 자료방입니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자료방, 그리고 19세기 이후 현대건축까지 자료방 등. 마루는 집필공간 겸 현대건축 자료들 공간입니다. 우선 근대건축 이전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카메라도 모두 이방에 놓았더군요.

조금의 빈 틈에도 책장을 넣을만큼 자료는 많았습니다.

각 자료들에는 찾기 쉽도록 종이로 항목을 붙여놓은 모습입니다. 임교수 자료실의 압권은 바로 슬라이드 사진을 모아놓은 방입니다. 물론 모두 임교수가 직접 찍은 필름들입니다. 부피가 나가는 책도 아니라 조그만 슬라이드 사진필름이 도대체 몇 개나 되기에 방까지 따로 만들었냐구요? 자그마치 20만개라고 합니다. 클리어파일처럼 생긴 두꺼운 파일철에 한 쪽당 20개씩 끼워 보관합니다. 자, 한번 보시죠.

보시면 낯익은 생활용품인 방습제 ‘물먹는 하마’가 있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습기흡수용품을 넣은 것은 슬라이드 필름이 습기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이 필름철 한쪽한쪽 사이에 넣기 위해 신문지를 크기를 맞춰 1만쪽을 잘라놓은 점입니다. 습기 빨아들이는데 신문지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임교수가 신문을 주워다 모은 뒤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종이를 잘랐다고 합니다. 정말 자료 관리가 저술가에겐 생명과도 같구나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사진철에는 꼼꼼하게 필름 항목을 적어놓았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이름이 보이네요. ‘English Baroque, Christoper Wren'.

(#크리스토퍼 렌은 영국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갑니다. 원래는 자연과학자로, 뉴튼이 칭찬할 정도의 대단한 양반이었다는데, 옥스퍼드대 천문학과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놔두고 건축가가 되었답니다. 참 재주도 많은 분이죠? 대표작은 영국 세인트폴 대성당입니다. 이만틈 설명하고서 사진도 안보여드릴 순 없으니 세인트폴 성당 사진 첨부합니다.)

학자들의 일상은 자료와의 전쟁이자 동고동락입니다. 스스로 분류한 자료가 아니면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드는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게 됩니다. 건축이란 분야 속성상 임교수의 도전은 다른 인문학자들보다 훨씬 돈이 듭니다. 왜냐구요? 건축책들은 비싸거든요. 사진들이 들어가면 책도 크구요. 보통 원서가 권당 10만원 가까이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거대한 자료실 속에서 임교수는 읽고 쓰고 자료를 정리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글쓰는 팔자가 따로 있다 싶습니다. 아니, 글쓰는 기계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본인도 씨익 웃습니다. “참 미련하게 살지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사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 결과 28권의 책이 독자들과 건축을 이어주었으니, 보람은 클 것입니다.

임 교수는 방학이면 카메라를 짊어지고 해외로 떠납니다. 취재와 자료수집을 위한 출장인데요, 그 중간중간 사서 모은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머그잔’입니다. 나라별 특색있는 기념품으로 하나씩 모은 것이 부엌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선반 위에도 한줄로 머그잔이 서 있네요. 건축학자라서 그런지 건축물 그림이 들어있는 머그잔들을 모아놓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술가들의 서재가 모두 임석재 교수의 서재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자이면서 책을 쓰는 저술가들의 서재는 이렇게 자료실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많은 자료에 투자하고 관리했느냐에 따라 저술의 양과 질이 바뀌기 때문에 오늘도 글쓰는 학자들은 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게 저술가의 팔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모으는 과정 자체가 즐겁기에 모으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죠.

자, 그러면 퀴즈! 책이 이 정도면 한 몇권이나 될까요?

임석재 교수에 대한 기사는 조만간 <18.0> 섹션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구경 잘 하셨습니까? 다음에는 다른 저술가의 서재를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절들 잘 보내세요.

참, 임교수 댁에 있는 책은, '1만권'입니다.

07. 02. 19.

P.S. 4-5년 뒤면 나도 1만권쯤의 장서를 갖게 될 터인데 이를 어이해야 할 것인지, 미리부터 걱정스럽다. '물먹는 하마' 정도는 미리미리 준비해둘 수 있겠건만...

P.S.2. 한편 아래는 지난 2000년 10월말 한겨레의 '인문학 데이트' 연재란에 실렸던 임석재 교수에 대한 소개이다. 저서가 그간에 훨씬 늘어난 것은 물론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론 <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 2006)과 '임석재 서양건축사 3'에 해당하는 <하늘과 인간>(북하우스, 2006)이 있다.

임석재는 누구?

△1961년 서울 출생

△1980~1987년:서울대 건축학과 및 같은 대학원

△1989:미국 미시간대 건축학 석사.

△1992: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건축학 박사

△1993년:원도시 근무

△1994년~현재: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저서:<추상과 감흥:비엔나 아르누보 건축>1·2(문예마당, 1995), <장식과 구조미학:불어권 아르누보 건축>1·2(발언, 1997), <형태주의 건축 운동:형태와 조형의지>(시공사, 1999), <생산성과 시지각:뉴 브루털리즘과 대중사회>(시공사, 2000), <한국 현대 건축 비평>(예경, 1998),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대원사, 1999),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임석재 교수의 현대 건축 이야기>(북하우스, 2000), <한국적 추상 논의>(북하우스, 2000) 등 다수.

임석재가 말하는 임석재

철들면서 시작된 사춘기 때 나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집이라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조형 환경은 끝없는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시(詩)였다. 한국 현대시의 고전들을 암송하고 스스로 시작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관심이 합쳐져 나는 지금 건축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아직은 사춘기 때의 감성과 열정이 유지되고 있다고 자평하는 편이다. 나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사람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일년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고 책 쓰는 데 보낸다. 건축에 요구되는 실용성과 현실성은 골목길 탐방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얻고 있다. 요즘은 그 동안 공부해온 내용을 응용할 설계 작업도 시작하여 1~2년 후면 처녀작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연구는 20세기 서양 근현대 건축사, 한국 현대 건축사, 서양 건축사의 세 분야로 나뉜다. 각 분야에 대해 방대한 양의 저서 시리즈를 기획하여 매일 열심히 공부하며 집필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최종 목표는 나만의 건축 사상을 세우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 끼여 철학 강의를 듣는다.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던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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