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마음속에 은은한 여운이 가라앉지 않는 책이 있습니다. 평소에 말과 글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들을 찾아보곤 하지만, 이 책은 기존의 언어 관련 소설들과는 결이 많이 달랐습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무심코 뱉었던 내 말들의 온도를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되더군요.
처음 책을 집어 들었을 때부터 신비로운 밤하늘 색감의 표지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별, 무희, 시작이라는 단어들이 어우러져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포근한 이야기를 예감하게 했습니다.
이 소설이 특히 흥미로웠던 건 우화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화란 동물이나 사물 같은 상징적인 존재를 통해 인간 세상을 비추고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뜻합니다. 이 책은 태초의 밤, 별들의 무희가 발끝을 들며 열린 우주에서 태어난 첫 단어가 자기 이름도 모른 채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관찰한다는 설정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인간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 단어가, 우리가 매일 쓰는 말들이 어떻게 쓰이고 상처받으며 또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시선이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독특한 설정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저절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간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아픔을 고요히 내려다보며 사람들의 마음을 곁에서 듣던 천사들처럼, 이 책의 첫 단어 역시 인간의 이면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시장 골목의 순덕이, 고등어 장수 영복이, 취업 준비생 도윤이, 회사원 박 팀장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단어가 어떻게 닳고 망가지는지 그 곁을 조용히 맴돕니다. 인간이 가진 욕심과 걱정 때문에 단어의 원래 옷가지 위에 겹겹이 덧칠해지면서 본래의 빛을 잃어가는 과정을 우화적으로 풀어내는 대목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내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무심하게 오용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적잖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사랑은 원래 누군가를 옥죄는 무거운 짐이 아니었고, 걱정은 상대방을 내 뜻대로 통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으며, 괜찮다는 말은 사실 내 울음을 덮어버리기 위한 방패가 아니었습니다. 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흐르는 길이 아니라 군림하는 왕이 되고, 성공은 자기답게 피어나는 기쁨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빠르게 위로 올라가기 위한 서열 다툼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뱉었던 말들이 누군가의 자유를 뺏거나 지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꽤 묵직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좋았던 건 어렵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거창한 철학 이야기 대신 시장 골목의 밥상이나 병원 대기실, 회사 회의실처럼 우리가 매일 숨 쉬고 부딪히는 현실적인 공간들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가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특히 소설 속에서 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때 가슴이 찌릿했습니다. 말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 몸은 이미 수많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병원 대기실에서 무심히 맞잡는 손끝이나 장례식장에서 말없이 건네는 따뜻한 물 한 잔, 식탁 앞에 슬며시 밀어주는 반찬 그릇처럼 말보다 몸이 먼저 건네는 진심들이 있습니다. 말문이 막혀 다정한 말을 꺼내지 못할 때 화해하고 싶어 문 앞에 묵묵히 국그릇을 놓아두던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몸이야말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거짓 없는 언어라는 사실이 깊게 와닿았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다 문득 떠나간 가족 생각도 짙게 밀려왔습니다. 살아 계실 때 조금 더 자주 고맙다고 다정하게 말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피어올랐습니다. 괜찮다고 웃어넘겼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던 날들도 생각났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둔 채 제때 건네지 못한 말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냥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어떤 말은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 소설은 화려한 말로 당장의 상처를 덮어주는 위로라기보다는, 오늘 하루 내가 던지는 말 한마디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해볼 수 있다고 조용히 토닥여 줍니다. 오늘 미안하다고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고, 오늘 고맙다고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대단한 변화가 아니더라도 말의 방향이 조금만 달라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가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문장들이 잔잔하게 흘러가서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어 읽게 되는 힘이 있었습니다.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들이 참 많았고,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오늘 하루 타인에게 건넨 말들을 오랫동안 곱씹어 보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말들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지쳐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이 가닿기를 바랍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왠지 어색해진 사람에게도, 미안하다는 시기를 놓쳐버린 사람에게도, 겉으로는 괜찮다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매일 무너져 내리던 사람에게도 이 책은 조용히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줍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단어들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따뜻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내가 내뱉는 작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며, 오늘은 조금 더 다정하고 부드러운 언어들을 골라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