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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243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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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서 '바깥', 에피파니는 더 이상 남성 작가들에게서 그랬듯 불현듯 '나'를 덮치며 도적떼처럼 '안'으로 침투해들어오는 추상적.신적인 초월의 세계가 아니라, 예전에 버려졌던, 지금도 계속해서 버려지고 있는 여성 존재의 물적 심연이다. (...) 초월을 향한 극기, '저편'을 '저편'으로 가둬두는, 선적 시간의 흐름에 기대고 있는 훈련과 견딤의 방식은 처음부터 집 밖으로, 죽음의 나라로 버려진 여자 아이에게는 맞지 않는, 필요 없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냥 "뜬구름 같은 미음"을 먹고 이편의 생활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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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초월이 얼마나 쓸 데 없는 것들인지, 버림 받지 않은 자들은 전혀 모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바깥'으로 태어난 자들에게 신이니 초월이니 하는 것들은 코웃음의 대상이다. 오로지 '안'에 있는 사람들만 '바깥'을 희구한다. 허나 왜 우리는 곁에 있는 '바깥'을 보지 못하고 위에 있는 '바깥'만을 바라보고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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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공장 공장장은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이 그려진 달력들을 똑같이 찍어내기만 한다. 색색의 비키니를 입은 채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여성과 똑같기만 한 숫자들. 김혜순에게 이 세상을 주재하는 신은 이처럼 '남성' 달력 공장 공장장에 불과한 것이다. '바깥'에 있기에 가능한 '초월'에 대한 시각. '남성' 달력 공장 공장장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질서는 '안쪽'에 존재하는 자들에겐 달력의 정연한 숫자들처럼 지겹도록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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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리데기적' 여성의 몸으로, 달력 같은 이 세계의 질서에 끊임없이 조소를 던지고자 한다. 그것은 '로고스-말'로서가 아니라 '에로스-살'로서이다. 여성의 몸이 곧 이 세계에 대한 치열한 투쟁의 장소다. '바깥'에서 울리는 이 살의 언어는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바깥'을 내몰지 않는다. 신과 초월로 향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금-여기의 주변을 살핀다. 그렇게 김혜순의 시적 주체는 '어머니-몸'으로서 또다른 '바깥'들을 보듬어 보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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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파니의 신성성에 자주 의탁했던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한다. 나는 본성적으로 '바깥'이 될 수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어쩌면 불가해한 '바깥'에 이끌리는 것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먼저 내 곁의 '바깥'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었을지. 버림받은 존재들의 목소리가 눈송이처럼 쏟아지는 그 풍경을 자주 떠올리기로 한다. 그 자체가 '바깥'에서 쏟아지는 '신성성'임을 명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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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공장 공장장 아저씨에게 자주 반항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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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65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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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부터, 눈끝에서부터, 서서히 묽어지는 기분. 물속에 잠긴 채 오래 숨을 참으며 천천히 떠오르는 기분. 물밖으로 나와 축축히 젖은 몸의 열기를 느끼는 기분. 그렇게 기화하는 나. 겹겹이 확장되는 시간 속에서 도처에 기포처럼 심어지는 나. 그렇게 얼추 천사가 되어보는 기분. 천사의 살비듬 같은 시편들. 나는 내가 아닌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번 아침에는 웃어도 좋을 기분. 한껏 투명해지고 나서야 보이는 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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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설탕 문학과지성 시인선 314
이승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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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와 냉담의 극치. 타락해버린 허연 같다.
증오의 시인이라고 한다. 타인은 타인일 뿐이라고 한다.
나는 타자가 아니고 타자도 내가 아니지만, 그러한 명제에서 냉정만이 길어올려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나고 타인은 타인이기에, 도달할 수 없는 미지에서 뿜어져나오는 열정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회는 결국 불가능하고 우리는 소돔-고모라-고담-씬시티-서울에 살지라도, 세상에 던질 수 있는 건 비정의 폭발물만이 아니진 않은가? 나는 내가 아닌 타인으로서의 타인을 믿는다. 완벽한 타인들로만 구성되는 그물코의 그림자 아래 드리운 꽃밭을 믿는다.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진 않을지라도, 시인의 말마따나 꽃보다 강한 냄새를 풍긴다. 그 냄새가 독한지 향기로운지 우리는 맡아봐야 아는 것이며 나는 그 향기로움을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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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 시인선 315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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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은 일인칭 자아의 신비와 권위를 지워버리는 자리에서, 다시 어떤 다른 '사랑'을 발음한다. 주체의 정념의 자리를 소거한 채로 '나'는 그 첨예한 개별성만으로 겨우 존재한다. 이장욱의 '나'와 '그'는 주체의 인격적 권위와 실체성을 비워버린다는 의미에서, 탈인칭적이거나 비인칭적이다. (...) 그래서 이장욱의 사랑은 '나'의 인격적 지위를 주창하지 않는 다른 '나'의 존재 방식이다."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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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의미의 서정시에서 사랑은 나라는 주체가 너라는 대상을 나의 의미 체계 안으로 포섭하여 동일화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세계의 자아화 또는 자아의 세계화라는 구조 안에서, 이러한 일인칭적 자아의 사랑은 언제나 그 대상을 동일성의 폭력에 노출시킨다. 타인의 모든 언술과 행위는 나라는 주체로 인해 곡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와 '나'의 소통, 그리고 사랑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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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와 단절되고 싶어 / 네가 그리워'라고 말한다. 너를 사랑하기 위해 너와 단절되고 싶다고 한다. 내가 나로서 너와 연결되었을 때, 나는 완벽한 의미에서의 '너'와 마주하지 못한다. 너는 나의 주체성으로 인해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너와의 단절을 꿈꾼다. 나의 그리움 속에서, '너'라는 존재는 완벽하게 모호한 타자성이 되며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너는 여전히 나의 주체적 정념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장욱은 일인칭적 자아에서 벗어난 새로운 존재론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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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이장욱의 '나'는 끊임없이 이탈하고 실종되고 지워지고 흩어지며 증발한다. '나'의 주체성이 지워졌으므로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난 존재가 된다. '나'의 존재방식은 이제 오로지 '나'의 외부에 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탈인칭적' 자아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뒤틀린 시공간의 진공을 부유하는 비닐봉지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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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개인적인 관계로 가득하다'. 나는 존재하기 위해 '나의 유일한 외부, 당신'을 필요로 한다. 당신에게 이송되는 형태로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일인칭적 자아였던 나는 이제 탈인칭적 자아로서 타인에게 거주하는 임시적 존재가 된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너와 나는 계속 서로의 인칭을 바꾸며 지속된다. 이것이 탈인칭적 사랑의 모습이다. 확실한 것은 '나'가 아니라 타인 혹은 타인과의 관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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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랑은 타자의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의 폭력에서 멀어진다. '나'는 없고 오로지 '너'에게 머무르는 '나'만을 간신히 획득할 수 있는 존재방식은 너를 너로서 존재하게 한다. 내가 '나'를 통해 너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너를 알고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현대적 사랑이 아닐까. 우리는 더 이상 '코기토'라는 뒤주 안에 타자와 세계를 가두어 놓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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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일 테지만, 특히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재확인한다. 나는 그림자가 있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는 '나'의 간접적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오가 되면 우리의 그림자는 가장 짧아진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근대적 세계의 종말을 알렸을 때, 짜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정오에 있었다. 니체를 기점으로 포스트모던의 세계가 열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정오는 그림자를 통해 알 수 있는 확실한 나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시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신이 죽은 자리를 대신하여 해가 없이도 거할 수 있는 완전한 주체가 되었지만, 이제는 신이 죽은 자리 자체를 지울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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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죽고 근대적 자아가 신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필요없다. 이 세계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유아론적 환상에서 벗어나, '너'라는 무한한 타자성을 통해서만 나도 이 세상도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탈인칭적 사랑이며, 이 사회에 만연한 '과잉-주체'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 널 사랑해". 투명한 비닐봉지 같은 내가 세상에 대고 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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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문학동네 시인선 111
이현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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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실패한다. "손끝만 닿아도 스륵 풀려버릴 것 같은 매듭들"처럼,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도 쉽게 떠나가버린다. 실패하는 것이 사랑의 본모습이라면, "곁에 없는 사람만을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빈자리로서만 실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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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는 이러한 마음의 빈자리를 궁구한다. 당신이 없는 빈집에 앉아 없는 것과 잃어버린 것의 자취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며", "빈자리가 가장 짙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당신이 없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직유를 던지며" 노는 것 뿐이다. 직유는 대상에 한없이 가까워지기만 할 뿐 영원히 닿지 못한다. 이곳엔 당신이 없고, "당신같이 당신처럼 당신인 듯이" 있는 것들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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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다. 당신이 떠난 빈집에서 나는 혼자다. 키에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처럼, 말하자면 이현호의 화자는 지금 '당신 앞에 선 단독자'다. 이때의 삶은 거창한 실존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사라진 삶은 위태롭다. 그러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을 잊고 오로지 생활할 뿐이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내 삶을 향하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생활한다"는 것이다. "철학의 대가들이 삶의 전문가는 아니라고" 말하며, 당신 없는 지금의 생활을 오로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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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삶은 지탱된다. 마음의 빈자리를 받아들이며 사소한 생활을 모두 살아냄으로써 삶은 계속된다. 그러다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다. 사랑은 반드시 실패하고, 언제나 "나와 함께 나는 혼자"일 것이다. 혼자된 내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 불가능한 사랑을 긍정하는 또하나의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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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름다운 혼자를 생활하는 것으로 이현호는 계속 사랑을 꿈꾸는 것이다. "더듬지 않으면 지워져버리는 꿈이 있"으므로, 끊임없이 빈자리를 더듬는 것이다. 사랑의 이후를 아는 나는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무섭게 사랑해야 할 것만 같았다"면서. 그렇게 사랑은 무섭게 진행되고, 또다시 빈자리를 더듬을 것이다. 괜찮다. 우리 다 알지 않는가. 사랑은 언젠간 떠나고, 혼자가 된 우리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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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응, 나도 잘 지내"
이현호의 마음은 이토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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