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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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주체의 자리는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사랑에 대한 니체적 읽기?

사랑의 불가능성과 사랑의 폭력성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서, 폭력성은 불가능성이라는 문학적 수사로 쉽게 포장될 수 있다. 그것이 문제다. 사랑을 '견딜 수 없는 약자'의 처연한 몸부림은 기실 정념에 사로잡힌 노예의 폭력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문학이 범하는 윤리적 오류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폭력의 미화다.

사랑은 주체의 자리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들린') 사람은 객체가 된다. 타인의 객체인 동시에 사랑이라는 사건의 객체가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를 약자로 만든다. 주체의 자리를 사랑에 빼앗긴 나는 주체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분투한다. 분투의 양상은 객체화다. 사랑을 객체화하거나, 타인을 객체화하거나. 그러나 사랑의 실재성은 언제나 의심스러우므로, 주체로 돌아오기 위한 분투는 쉽게 후자로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나는 사랑의 주체가 되기 위해 너를 소유해야만 한다.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의 불가능성은 대체로 폭력성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불가능성은 타인을 소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불가능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쳐야 한다. 사랑에 있어 '견딜 수 없는 약자-객체'가 되어버린 나는 또다른 누군가를 약자-객체로 만들 것이 아니라, 나의 객체성을 견뎌야만 한다. 소유할 수 없음을 소유하고자 하는 분투가 아니라, 견딜 수 없음을 견디고자 하는 분투가 사랑의 분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숭고한 분투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랑은 르상티망에 기인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우리를 숙주로 삼아 기생한다. 이 책이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사건 속에서 절대적 객체가 된다. 상처 받기 쉬운 객체의 자리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분투한다. 그러나 사랑의 분투는 타인에게 닿기 위한 '응석'처럼 드러나서는 안 된다. 약자는 응석받이가 아니라 상처받기 쉬운 자다. 사랑이 노예도덕을 요구하는 순간, 사랑은 폭력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고 사랑의 '주인'이 되기 위한 분투가 아니라, 사랑의 불가능성을 소유의 불가능성으로 대체하여 사랑의 '응석받이'가 되는 모습을 그린다.

'견딜 수 없음'은 타인에 대한 폭력의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실체없는 '사랑'에 대한 자기극복을 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노예가 아니라 사랑의 주인이어야 한다. 견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뎌내고자 하는 자가 사랑의 주인이다. 이렇게 사랑의 주인이 되는 일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사랑이라는 의심스러운 실재에게서 빼앗긴 주체의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분투가 사랑을 숭고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의 불가능성과 사랑의 폭력성 사이의 모호한 경계짓기는 결국 폭력을 미화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과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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