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세계문학의 숲 43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윤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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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저 모든 책들보다 우리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와 맞서 겨룰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 p.11

병이나 돈 문제,서글픈 집안의 근심사들. 그 이야기들은 저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둔 음울한 감옥의 담벼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운명의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여기 있는 나의 동료 늙은 관료여, 그 어느 것도 너를 탈출시켜주지 않는데, 너는 거기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구나. 너는 흰개미들처럼 빛으로 향한 모든 출구들을 시멘트로 꽁꽁 틀어막은 덕에 너의 평온을 일구었다. 너는 소시민의 안온함 속에 몸을 둥글게 말았고, 틀에 박힌 일과와 숨 막힐 듯한 시골 생활의 관례들로 바람과 파도와 별에 맞서 그 초라한 성벽을 쌓았다. 너는 커다란 문제들로 근심하려 들지 않고, 너의 인간 조건을 잊으려 무척이나 애를 썼다. 너는 떠돌이별의 주민이 아니며, 스스로에게 대답 없는 질문은 던지는 법이 없지. 너는 그저 툴루즈의 소시민일 뿐.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그 어느 것도 너의 어깨를 붙잡은 적이 없다. 이제 너를 이루고 있는 진흙은 말라붙어 굳어버렸고, 앞으로 그 무엇도 네 안에 잠들어 있는 음악가나 시인 혹은 이전에 네 안에 살고 있었던 천문학자를 깨우지 못하리라. p.24-25

설령 아무 사고 없는 여행이라 해도, 자기 노선의 어딘가를 비행하는 조종사는 단순한 풍경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대지와 하늘의 빛깔, 바다 위로 남겨지는 바람의 흔적, 석양 무렵의 황금빛 구름, 조종사는 그것들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p.34

이처럼 동료가 죽으면 아직은 그의 죽음 또한 직무상 행위처럼 보이고,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죽음보다 더 큰 상처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분명 그는 자신의 마지막 기항지를 변경하여 멀리 떠나갔지만, 아직까지는 빵이 아쉬운 만큼이나 그의 존재가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에겐 다시 만날 날을 오래도록 기다리는 습성이 있다. 왜냐하면 항공 노선의 동료들은 파리에서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고, 별로 말을 나누지 않는 보초들처럼 다소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는 같은 직업을 가진 대가족의 일원들이 여기든 저기든 한자리에 모이려면 비행하다 우연히 마주쳐야 한다. 카사블랑카, 다카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저녁식탁에 둘러앉아, 수 년간의 침묵으로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시작하며 옛 추억으로 다시 엮인다. 그러고 나면 다시 떠나는 것이다. 대지는 이렇게 황량하면서도 또한 풍요롭기도 하다. 풍요롭다는 것은 감춰져 있고 찾아가기 어렵지만 우리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날인가는 가게 되는 비밀스런 정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할이 바빠 떨어져 있고 자주 생각할 수도 없지만 동료들은 말없이 잊힌 채로, 알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있으며, 서로에게 무척 충실하다! 그래서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환하게 터지는 불꽃같은 기쁨으로 우리의 어깨를 흔드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기다리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렇지만 차츰 우리는 그 동료의 환한 웃음소리를 결코 다시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가 있는 정원에 우리는 결코 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애절하진 않지만 약간 씁쓸한 우리의 진정한 애도가 시작된다. p.39-40

사실 그 어느 것도 잃어버린 동료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랜 친구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함께한 그토록 많은 추억들, 함게 겪은 수많은 고된 시간들, 그토록 잦았던 다툼과 화해, 마음의 움직임, 그런 보물만큼 값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우정은 다시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떡갈나무를 심어놓고 곧바로 그 그늘 아래 몸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헛된 일이다.
삶이라는 게 그렇다. 처음 우리는 풍요로웠고 여러 해 동안 나무를 심었지만, 시간이 그 작업을 해체하고 나무를 베어내는 그런 시기가 온다. 동료들은 하나씩 우리에게서 자신의 그늘을 걷어낸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에는 늙어간다는 말 못할 회한이 서린다. p.40-41

오로지 물질적인 부만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감옥을 짓는 셈이다. 우리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재와 같은 돈을 움켜쥐고 고독하게 스스로를 가둔다.p.4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를 넓혀 간다. 우리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서로 바라본다. 그런 우리는 감옥에서 풀려나 바다의 광활함에 경탄하는 죄수와도 같다. p.43-44

다행인 것은 그래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이지. 한 걸음 더. 항상 똑같은 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p.53

그의 진정한 장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 그것은 자신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기 자신, 우편 비행기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 말이다. 그는 그들의 고통 혹은 기쁨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다. 저 아래 살아 있는 자들이 사는 곳에 새로이 세워지고 자신도 참여해야 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 자신의 일의 한도 내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어느 정도 가지는 책임감.
그는 자신의 잎사귀들로 기꺼이 넓은 지평을 덮고자 하는 대범한 존재들에 속한다. 인간이라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을 마주했을 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몫의 돌을 놓으며 자신이 세상을 구축하는 데에 기여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p.55

인간의 제국은 내면에 있다. p.88

다른 이들이 기다리다 지쳐 초라한 행복에 머물 때, 바르크는 노예 상태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노예 주인의 선심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지 않았다. p.115

그는 유대인 노점 앞을 어슬렁거렸고, 바다를 보았으며 이제 자신은 자유로우므로 어느 방향이든 마음대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유가 그에게는 씁쓸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무엇보다도 얼마만큼이나 그가 세상과의 연관성이 없는가를 깨닫게 했기 때문이었다. p.121

그는 자유로웠으므로 기본적인 재산, 사랑받을 권리, 북쪽이나 남쪽으로 걷고, 노동으로 자신의 빵을 벌 권리가 있었다. 그러니 그깟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강렬한 배고픔을 느끼듯이, 그는 사람들 틈에서의 한 사람이 될 필요를 느꼈고 사람들과 엮인 사람이 될 필요를 느꼈다. 아가디르의 무희들은 바르크 영감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왔던 것처럼 수월하게 그녀들과 작별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랍 카페의 종업원, 길거리의 행인들, 그들 모두 자유인으로서의 그를 존중했고, 그와 함께 평등하게 자신들의 햇빛을 나누었지만, 그 누구도 그가 필요하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유로웠지만, 무한히 자유로워 더 이상 대지 위에서 무게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에게는 걸을 때 거치적거리는 인간관계의 무게, 눈물, 작별, 비난, 기쁨, 사람이 어떤 몸짓을 할 때마다 아껴주거나 고통을 주게 되는 그 모든 것, 그를 다른 사람들과 묶어 무겁게 만드는 수많은 관계들이 없었다. 하지만 바르크에게는 벌써 수천 가지의 희망의 무게가 생겼다...... p.123

다시 한 번, 난파당한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난파당한 사람들,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침묵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끔찍한 실수로 이미 가슴이 찢길 대로 찢긴 사람들이다.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기요메 역시 안데스 산맥에서 돌아오자 내게 자신은 난파당한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다.
˝내가 이 세상에 혼자라면, 난 그냥 누워버릴 텐데˝하고 프레보가 내게 말한다. p. 163-164

한 번이라도 바닷바람을 맛본 사람들은 그 자양분을 잊지 못한다. 동료들이여, 그렇지 않은가? 위험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다. 위험하게 산다는 그 말은 잘난 체 하는 것이다. 나는 투우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삶이다. p. 174

오직 정신만이, 그 바람이 진흙 위로 불어올 때에만 비로소 인간은 창조된다. p.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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