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도 다 지나갔습니다.

2018년은 유독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하니, 2018년의 시간이 가장 빨리 흐르는 게 맞는 말이겠네요.  


서설이 길었습니다. ^^


2월이 지났으니 2월 독서목록을 올려보도록 할게요.


문학작품



01. 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2. 몬테크리스토 백작 2,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3. 몬테크리스토 백작 3,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4. 몬테크리스토 백작 4,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5. 몬테크리스토 백작 5,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한 권당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께에 전체가 5권이라 읽을까 말까 고민을 좀 했지만, 역시 읽기를 잘 했어요. 

누가 그랬죠.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재미있어서 많이 읽히다 보니 고전이 된 거라고. 

그 말에 딱 맞는 책이 바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닐까 싶네요.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이들, 누구하나 피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파멸하는 장면을 읽다보면  아주 통쾌하죠.

그런데 말예요. 소설의 세계에서 떠나 현실을 생각해보면 좀 씁쓸한 마음이  들어요.

결국 복수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복수는 복수하려는 자가 복수대상자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거나 능력이 뛰어나야만 가능하죠.

그렇지 않을 경우는 희생자는 복수고 뭐고 저절로 세상에서 잊혀지고 소멸되겠죠.

이건 뤼팽이나 프랑켄슈타인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점인데요, 뤼팽도 남들보다 뛰어난 변장술이 없었다면 괴도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도 인간보다 특출난 능력이 없었다면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시원하면서도 찜찜한 이 기분. ㅜㅜ



06.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저, 바른번역 역, 코너스톤, 2015



07.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저, 임종기 역, 문예출판사, 2008 (2독, 전에는 열린책들 번역으로 읽음)

* 프랑켄슈타인 리뷰는 여기 아래

http://blog.aladin.co.kr/745395197/9921755



에세이



08.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저, 서해문집, 2016


은유님 글이 그냥 좋아서 자꾸 사서 읽게 되네요. “쓰기의 말들”도 샀지요. 엄청 기대 됩니다.  



09.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저, 가나출판사, 2018



글쓰기



10. 소설가의 일, 김연수 저, 문학동네, 2014


소설을 쓰려면 이 공식을 반드시 기억해야 해요.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주인공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죄로, 생겨서는 안 될 욕구가 생긴 인물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는 세상의 방해로 좌절하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욕구가 충족이 되는 결론이더라도 그는 생고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고생을 하지 않는다면 주인공이 아닙니다.

소설에서는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주인공 따위 되고 싶지 않군요. 

그냥 평범하게 개고생 따위 모르고 살고 싶어요. ㅜㅜ 

하지만 나중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나의 주인공은 험난한 골짜기를 엄청나게 굴러야만 하겠지요. 벌써 감정이입 되어서 슬퍼지네요. 



11.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수전 티베르기앵 저, 김성훈 역, 책세상, 2016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 이예요. 

이 책 덕에 지난밤 꿈 이야기들을 눈 뜨자마자 적어 두곤 하는데, 나중에 이 이야기들이 훌륭한 글감으로 사용될 거 같아요. 

(훌륭한 글이 될 거 같다고는 안했어요. 그건 아직 자신이 없어서....)


인문/사회



12. 프랑켄슈타인, 장정희 저, 살림, 2004


소설 프랑켄슈타인 해설서입니다. 소설 읽고 이 책 읽으면 금상첨화.

 


13.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저, 박선령 역, 나무의철학, 2017


몇 년 전에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3권을 읽었는데요, 그 때는 모든 게 낯설어 이름도 헷갈리고 지명도 헷갈리고 내용도 난해한 거 같더니, 두 번째로 북유럽 신화를 읽으니 이제서야 좀 이해도 가고 재미있네요. 

세계의 끝 이야기는 아무래도 유럽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이 돼요. 성경의 요한계시록이랑 비슷한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오거든요. 



14. 명견만리 : 새로운 사회, KBS 명견만리 제작진 저, 인플루엔셜, 2017


1권, 2권은 지난달에 읽고 이번에 세 번째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사회라는 부제에 걸맞게 향후 근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를 예측하여 보여주고 있어요.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바뀔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으니 교양으로 읽어두면 모임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과학



15.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팀 르윈스 저, 김경숙 역, Mid, 2016


과학책이라기보다는 철학책에 가깝습니다. 

즉, 읽기가 어려웠다는 얘기죠.^^ (철학책이 제일 어려워요. ㅜ ㅜ)

포퍼의 변증가능성 문제, 쿤의 패러다임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과학의 정치적 영향력, 진화론에서의 이타주의 문제, 자유의지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의 서술 방식이 명확한 의견 피력이 아니라서 주장하는 바가 뭔지가 명확하지 않더군요. 

나는 과학적 지식에 아직은 문외한이라서,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책 보다는 정보를 주는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나 봅니다. 



16. 과학잡지 에피 1호, 이음 편집부, 이음, 2017


과학비평을 표방한 잡지입니다. 

이번호의 주제는 ‘가짜’인데요, 가짜는 거짓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라이고 중력파 검출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는데요. 

2010년에도 한번 중력파 검출기에 신호가 잡혔었답니다. 

이 신호의 분석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잠도 안자고 연구 분석에 매달렸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신호가 눈가림 신호(가짜)였다고 합니다. 

이는 라이고의 자료 분석 방법이 진짜 중력파를 관측할 수 있는지 시험한 것 이였고, 이러한 검증을 통해 2015년 발견된 신호가 진짜 중력파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가짜 신호가 없었다면 진짜 신호인지 가짜 신호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는 얘기죠.

가짜는 거짓인가? 물론 가짜가 진짜는 아니겠죠. 

하지만 진짜의 조력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니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 말고도 재미난 기사가 많았어요. 

구입하기 편하게 이북으로도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음 출판사 대표님 부탁드려요!!)


이상으로 총 16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진다면 야외활동에 시간을 많이 쓰겠지만, 당분간은 맹추위가 이어질 듯하니 3월에도 집에 틀어박혀 부지런히 독서를 하지 않을까 싶네요.


3월... 현실은 아직 겨울이지만 마음은 벌써 봄이 온 듯 싱숭생숭.

조심해야지. 이러다 감기 들라.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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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프랑켄슈타인”.

올해 출간 200주년을 맞았다.

이 책은 고딕풍의 공포스럽고 기괴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유사한 괴물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과학자의 지적호기심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등, 현재에도 여전히 그 의미가 살아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다. 화자가 3명인 이중 액자 구조로서,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해준다. 화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이 이야기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우선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A-B-C-B’-C’로 되어 있다.

 

A의 화자는 월턴 선장이다. 북극항로를 개척하려고 탐험을 떠난 그가 북극해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구조한 이야기와, 프랑켄슈타인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지에 대해 적고 있는데, 이는 편지로 누이인 사빌 부인에게 전해진다.

 

B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자신이 생명체를 만들어 낸 과정과 그 생명체가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살해한 것, 그래서 그 괴물을 찾아내어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자신을 구조한 월턴 선장에게 들려주고 있다.

 

C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생명체이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그저 괴물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사회에 받아들여지고자 애쓰지만 결국 추한 외모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고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여성 생명체를 만들어 내라고 강요한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을 갖는다. 아주 선하기만한 사람도 없고 아주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괴물로 불리는 생명체가 자신을 창조한 자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 부터도 추방되어, 생명체에서 괴물로, 괴물에서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프랑켄슈타인조차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해 갖는 혐오감은 사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는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의 생명체는 창조자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여서 통제가 불가했다. 또한 그가 괴물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의 존재가 인류에게 위험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포와 비극적 정서가 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상대를 나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것.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나누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이러한 파국상황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월턴 선장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항의와 북극으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타협을 하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나는 메리 셸리의 세련됨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야기가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지만, 중심이야기의 바깥에서는 타인의 의견 경청과 자신의 욕구 보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은 2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현재 더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인 듯하다. 21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호모 데우스, 즉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일 것이며, 괴물의 존재는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현 인류를 뛰어넘는 존재를 만들고 싶은 지적, 기술적 욕구를 가지면서도 인공지능이 우리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을까하는 공포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지 디스토피아를 가져올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신기술개발은 너무나 거센 물결이라 아마도 그 방향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이 소설이 어느 정도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입장과 욕구에 대한 공론화가 아닐까. 하나의 기업체나 기관이 신기술 개발을 하게 되면 그것을 공론화하고 시민사회와의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 합의되지 않은 기술은 일부의 낙관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일부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지나친 낙관론이나 공포에 치우지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정치적인 기술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우리는 하나의 사회, 국가, 인류라고 뭉뜽그려 이야기하지 않고, 사회, 국가, 인류가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서로 다른 개인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과 합의의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문외한이긴 하지만, 무작정 두려워하거나 혹은 기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공부라도 하면서 걱정 또는 기대를 하련다.

 

감상문의 결론이 너무 교과서적이라 재미가 없긴 하지만, 어쩌랴, 의사소통과 합의가 현재까지 민주사회에서 가장 합리적 방법이라고 합의된 것이고, 또한 아는 게 힘인 것을.

 

암튼 200년 전 탄생한 괴물이야기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되다니, 이 책이 한번은 읽어봄직한 문제작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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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연말에 한 달 동안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습니다.

그 기간 내내 도스또예프스키에게 빠져서 허우적 허우적 대었는데, 오늘은 그 중 한 가지 얘기를 해 볼게요.

 

주인공은 막내아들인 알료사 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둘째 아들인 이반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반은 공부도 많이 했고, 러시아 전통과는 대비되는 유럽식 사상을 받아들인 자이며,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인물이지만, 자기 사상이 타인에게 미친 영향으로 아버지가 죽게 되고, 형이 그 누명을 쓰게 된 죄책감에 의해 섬망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와중에 악마와 마주하게 되지요. 저는 이 장면이 너무 너무 맘에 들어서 나중에 이 부분만 또 읽었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명문으로 알려진 부분은, 이반이 알료사에게 전해주는 대심문관이야기입니다만, 이반과 악마가 대화하는 이 장면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할 만큼 극적입니다.

내용은 워낙에 심오해서 제가 이러고 저러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고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상상력입니다.

이반을 찾아온 악마는 자기에 대한 이러 저러한 얘기를 하다가, 우주 공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다 감기에 걸리게 된 사연을 얘기해 줍니다.

뻬쩨르부르크 귀부인이 연 파티에 급하게 가느라, 우주공간을 날아오게 되었는데, 연미복 앞섶이 열린 조끼 차림으로 태양광선으로도 8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영하 150도의 온도에서 사람으로 변신한 상태로 오다가 그 매서운 추위 때문에 감기에 걸려버렸다고 하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구에서 태양광선으로 8분 거리에 있는 곳은 태양 바로 그 곳 인데, 악마가 그곳에서 왔다는 의미일까요?

우리가 아는 바로 악마는 빛이 있는 곳 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곳에 존재할 것만 같았는데, 게다가 하늘 위 우주가 아니라 지구 안 깊숙한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예요.

밝게 빛나는 태양이 악마가 사는 거처였을까요? 악마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곳에 있었다고만 말하죠.

갑자기 소설의 내용이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서 우주로 확~ 확장되어 버렸습니다.

 

덧붙여서 악마는 죽어서 1천조 킬로미터의 암흑 속을 걸어서 통과하라는 판결을 받은 사상가이자 철학가인 사람 이야기를 해 줍니다. 내세를 믿지 않았던 그는 거의 천년을 걷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1천조 미터를 걸어 천국 문 앞에 이르게 되었는데 망설임도 없이 그 문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1천조 킬로미터를 걷는 데에는 10억년이 걸렸지만, 그가 천국 문을 통과 하는 데에는 2초밖에 걸리지 않았죠. 그는 <호산나>를 불러댔고,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랍니다.

 

이반은 도대체 어디서 10억년을 가져 온 거냐고 묻고, 악마는 대답합니다.

 

자네는 현재의 우리 지구만을 생각하고 있군! 현재의 지구도 일정시간이 지나면 얼어붙고 갈라지고 부서지고 구성 분자로 분해되고 허공의 물이 되고 다시 혜성이 되었다가 다시 태양이 되고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오는 일을 아마 10억 번은 반복했을지 몰라.”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우주의 역사에 대해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주의 항성들과 행성들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원리 같은 거요. 물론 우리 우주는 138억년 쯤 된 걸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우주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니까요. 10억년이면 상상 불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위에 나온 우주의 온도가 영하 150도라는 설정도 그래요. 지금은 우주의 평균온도가 영하 270도라고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정확하게 몰랐을 텐데, 아무튼 엄청나게 추울 거라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이야기들을 만들었겠죠.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출간년도가 1880년이라니 그 당시 과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쪽에 관심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닐 거라고 봐요.

 

그래서 의문이 듭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소설을 통해 러시아적인 전통과 그리스 정교적 전통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겉보기 교훈은 아니었을까? 무신론적이고 유럽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이반의 생각을 묘사하는 데에 작가가 들인 공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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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하면 이곳에 업데이트가 좀 잦아졌지요?^^

20181월에 들어서는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은 게으름을 이유로 몇 달에 한 번, 혹은 상반기, 하반기로 나누어 읽은 책 목록을 정리했습니다만, 이젠 열심히 업데이트 하기로 맘 먹었으니 한 달에 한 번씩 해보도록 하지요.^^

 

우선 문학

 

01. 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 저, 손영미 역, 문예출판사, 2009

 

사랑은 가도, 삶은 살아야만 하는 것.

 

 

02.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저, 송은경 역, 민음사, 2010

 

저녁이 되었다고 하루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03. 호르두발, 카렐 차페크 저, 권재일 역, 지만지, 2013

 

말하지 않은 진심은 전해지지 않는다.

 

 

여행

 

04.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빌 브라이슨 저, 권상미 역, 21세기북스, 2008

 

유럽의 볼거리 이야기 보다는 호텔과 식당과 길에서 겪은 사소한 이야기 투덜투덜.

그러나 무척 재미있는 게, 이런 여행 책이 독보적이라서 그런 듯하다.

여행가고 싶다.

 

 

05. 미술관의 탄생, 함혜리 저, 컬처그라퍼, 2015

 

전시된 작품들 위주의 미술관 소개가 아니라 건축물로서의 유럽 미술관 소개.

... 여기 소개된 미술관들 다 둘러볼 기회가 올까?

음... 진짜 여행가고 싶다.

 

 

여성

 

06.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장수연 저, 어크로스, 2017

 

나도 엄마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엄마가 되었을 뿐.

엄마라는 것은 나를 이루는 여러 가지 정체성 중 하나일 뿐. 내 전체가 아니다.

 

 

글쓰기

 

07. 매일 아침 써봤니?, 김민식 저, 위즈덤하우스, 2018

 

엄청나게 동기부여 되는 책이다. 이 책 읽고 지금 이렇게 독서 목록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일단 쓰자. 은유님이 비밀글만 쓰면 글은 늘지 않는다고 하셨다니, 일단 쓰고 온라인 업뎃.

 

  

08. 100일 글쓰기 곰사람 프로젝트, 최진우 저, 북바이북, 2017

 

매일 아침 써봤니를 읽고 매일 글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하다 발견한 책.

이 책 읽고 매일 쓰기 해 볼까 하다가 금새 포기할 거 같아서 1주일에 3,4회 꾸준히 써보기로 했다.

 

인문/사회/경제

 

09. 박물관의 탄생, 전진성 저, 살림, 2004

 

박물관의 역사에 관한 책. 상류층이 자기 수집품을 모아 놓았던 경이로운 방에서, 현재의 박물관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역사.

 

 

 

 

10. 명견만리 : 인구, 경제, 북한, 의료 편, KBS 명견만리 제작팀 저, 인플루엔셜, 2016

11. 명견만리: 미래의 기회편, KBS 명견만리 제작팀 저, 인플루엔셜, 2016

 

보통은 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생각할 여유가 없을 거 같은데, 주제별로 우리나라의 문제, 선진국에서의 해법, 우리나라에 적용 및 미래 대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12.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저, 어크로스, 2018

 

혐오표현은 물리적인 상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거의 그와 동일한 강도의 심리적 상해를 입힌다. 법적인 혐오규제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별을 금지하고 공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법적으로는 차별금지법으로 어느 정도의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고, 또 국가에서는 혐오표현의 문제에 대한 교육과 홍보, 소수자 지원 등의 방법으로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다. 시민 수준에서는 자율적으로 혐오표현을 규제하고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대항표현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이 책 일독하시기를 꼭 권하고 싶다.

 

 

13.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저, 유강은 역, 고유서가, 2017

 

구입 후 방치해 두었다가, 작년 연말 이 책이 한국출판문화성 번역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읽기 시작. 1960년대 쓰인 책인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시의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종교, 정치, 기업, 교육에서 나타난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길게 길게도 펼쳐진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현재의 미국 및 미국식 개신교가 이식된 우리나라 개신교의 문제점을 해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개신교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책이 없을 거 같다고 생각한다.

 

14.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대니얼 웨그너. 커트 그레이 저, 최호영 역, 추수밭, 2017

 

우리들은 인간 뿐 아니라 동물, 로봇, 집단 심지어 죽은 사람이나 신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여긴다. 그 대상은 행위자 혹은 수동자로 여겨진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경우 우리는 행위자와 수동자를 한 쌍으로 엮어, 행위자에게는 도덕적 책임을 지우고, 수동자에게는 큰 책임을 면해주려는 경향이 있다. 결국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의 문제이고, 그 지각의 결과는 도덕적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상으로 총 14권을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이번 달에 과학 관련 책을 한 권도 못 읽었다는 것입니다. .

2월엔 좀 더 다양하게 읽어야겠어요.

그리고 발칙한 유럽산책과 미술관의 탄생을 읽고 나니, 마음에 바람이 잔뜩 들어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집니다.

암튼, 5월말에 친정 식구들과 유럽여행계획이 잡혀 있으니 그 날을 기다리며 맘을 좀 가라앉혀 봐야겠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2월의 시작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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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ABC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동시에 사랑할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반칙으로 여겨진다). 반면 BC는 동시에 A를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사랑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진다. 게임은 영원히 계속되고, 승자와 패자는 계속 바뀐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이런 사랑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장례식에 두 여자가 있다. 결국 한 여자만 미망인의 칭호를 얻는다.

전쟁 후 돌아온 남편에게 옆집 여자가 친절하게 굴자,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엄마의 행동이 변한다. (남자의 수가 적으니 여자가 약자가 된다)

유명해진 극작가는 배우를 버리고 무용수를 선택한다.

한 여자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기미에 순순히 게임을 포기하고 그를 보내준다. 등등.

 

우리의 주인공 는 중년의 여성이다. 어느 날 급작스런 마비와 발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회복되고, 그 사건으로 사랑을 삶의 절대 가치로 삼는다. 그 후 는 프란츠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는 이미 남편과 딸과 8마리의 거북이들을 떠나보냈는데, 그는 반칙을 하면서 그녀와 자기 부인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부인과 게임을 해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는 외친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죽는 것이라고(어느 희곡의 대사이다). 사랑의 승자가 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라고. 프란츠가 부인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자 의 망상과 집착은 극에 달한다. 어느 날 프란츠는 를 떠난다(아니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는 그를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의 외침대로 죽지는 않는다. 떠나간 사랑의 허상을 만들어 놓고(프란츠라는 이름도 사실은 그녀가 새로 붙인 이름이다. 실제 그의 이름은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와 함께한 기억으로 40년인지 50년이지 모를 긴긴 삶을 산다. 결국 에게 삶의 의미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죽음 대신 기나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의 허상까지 만든 것을 보면. ‘사랑 아니면 죽음이라는 외침은 단지 게임의 승리를 기원하는 구호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나는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가 떠오른다.

자신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우선시 하는 어머니 덕에 두 아들 부뤼노와 미셀은 버림받고 사랑으로부터 배제된다. 어머니가 사랑을 찾았기 때문에 자식들은 사랑을 잃었다.

브뤼노는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은 젊고 매력적인 사람들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늘 변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반면 미셀은 사랑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학문에만 매진한다. 그는 모두 사랑을 찾지만 사랑 때문에 공격적이 되고 슬픔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현 인류의 상황에 절망하여, 현 인류의 멸종과 신인류의 창조를 제안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의 제안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신인류가 만들어진다. 무성생식으로 자가복제를 하여 이기주의와 잔혹함과 분노에서 벗어난 인류 말이다. 그리고 현 인류는 서서히 멸종의 길을 간다.

 

평단에서는 우엘벡을 성적인 프롤레타리아들의 예언자라고 한단다(동감한다). 돈을 많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로 계급이 나뉘듯, 사랑을 많이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 사이에도 사회적 계급이 생긴다 . 이렇듯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을 가장 큰 삶의 가치로 여기고, 여기서도 사랑 저기서도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외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사랑을 잃은 자들이여,

사랑 때문에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그렇다고 죽지도 말고

그저 나의 살던 삶을 살자.

사랑은 그렇게 고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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