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생화학자이자 서울시립과학관 관장님이신 이정모님이십니다. 


이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판타스틱 과학책장>이라는 책 덕분이었는데, 글이 얼마나 재밌는지 생전 관심이 1도 없었던 공룡에 관심을 가지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과학하고 앉아있네> 시리즈 중 제 1권 <이정모의 공룡과 자연사>까지 읽었더랬죠. ^^


그러니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을 제가 다음 순서로 읽은 건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생물이나, 우주의 행성, 자연의 법칙 등에 대해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까지 곁들여가며 어렵지 않게 설명해 준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마무리 부분에서는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일침 한방씩 날려주시는데 심각한 방식이 아니라 매우 유머러스하게 날리시기 때문에 통쾌하기도 하고 반성하게 되기도 하는 반전의 재미가 있습니다.


서문에는 “과학은 삶의 태도다” 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은 “과학은 단순히 지식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생각하는 방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도 같은 의미로 “과학은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라고 했고요. 

과학이 삶의 태도 혹은 생각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과학적으로 살아야겠지요. 

그게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가 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합리적인 길일 것입니다.


책 본문 중에는 논어의 말씀 한 구절이 인용됩니다.

“믿음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해롭게 한다.”

(호신불호학(好信不好學)이면 기폐야적(其蔽也賊)이라.)

믿기만 좋아하고 그에 대해 공부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사회의 문제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공부의 시작은 자기 믿음이나 사회의 믿음에 대한 의심 혹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라. 

그게 공부의 시작이고, 그게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무기이고, 또 과학적인 태도이고,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저는 역시 어쩔 수 없는 회의주의자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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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책은 로저 젤라즈니의 SF 중단편 소설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입니다.

SF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생소한 분야였는데, 요즘은 관심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시작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였고, 저의 관심 폭발을 유도한 책은 테트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였습니다. SF의 진정한 맛을 알게 해 줬다고나 할까요?

로저 젤라즈니가 이 책을 낸 게 1971년이니까, 이 분을 SF계의 근 조상님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원 조상님은 당연히 <프랑켄슈타인>을 쓰신 메리 셸리 님 이시고요. ^^


책을 아직 다 읽은 게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소개를 할 수는 없고요.

소설집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12월의 열쇠>라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도록 할게요.


주인공인 쟈리는 고양이 형태로 태어났습니다. 한랭 식민지 행성에서 일할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주 추운 곳에서만 살 수 있는 몸이었지요. 하지만 한랭 행성이 신성폭발로 사라져버리고, 쟈리와 같은 2만 8천 5백 66명의 고양이 형태 인간들은 지구에 남아 극저온 메탄 탱크 안에서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쟈리는 자기 동료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행성을 구입합니다. 그곳을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만들고자 한 것이죠. 행성을 냉각시킬 수 있는 행성 개조 유닛을 20대 설치하고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상태로 행성이 개조될 때까지 3000년간 냉동수면에 들어갑니다. 그 동안은 250년마다 한 번씩 깨어 당직을 서야하고요. 

별은 점점 차가워지고, 쟈리는 250년 만에 한 번씩 깨어나서 원래 그곳에 살던 생물들이 차가운 기온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나하나씩 멸종을 향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특이한 두 발 짐승 한 종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변하는 모습을 보고, 쟈리는 그 종이 지적인 생명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정찰 중에 큰 곰에게 습격당하는 그 동물들을 도와줍니다. 그 사건 이후, 쟈리 일행이 이 행성이 도착한 지 15세기가 흐른 후, 다시 당직을 서던 쟈리는 그 두발 짐승이 사는 마을에서 고양이 형태의 신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자신을 신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죠. 쟈리는 결심합니다. 자신을 섬기는 그들이 결코 멸종으로 사라지게 하지는 않겠다고.... 

쟈리는 동료들과의 전투도 마다하지 않고, 결국 기온을 더 천천히 낮추기 위해 동면기간을 원래의 3천년에서 7- 8천년으로 더 늘리게 됩니다. 그 동물들에게 적응할 수 있는 기간을 더 주기 위해서죠. 

그리고 쟈리는 더 이상 동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 동물종의 신이 되어서요. 


새로운 행성의 신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나? 하는 일종의 신화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도 외계인 문명설 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회자되지 않습니까? 신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신의 이야기보다는 생존의 이야기, 적응의 이야기로 보았습니다. 신이 된 쟈리의 관점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는 쟈리와 또 살아남으려는 두발 동물들의 이야기로요.

지구에서 살 수 없었던 쟈리는 살기 위해 새로운 행성을 이주를 합니다. 하지만 그 고양이 형태 인간들 덕에 행성은 점점 차가워지고, 이렇게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다른 동물과 식물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해갔지요. 하지만 두발 짐승 종족은 추위를 이기려고 불을 피우고, 추위를 이기려고 동물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을 정도로 지능을 진화시킵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은, 자신에게 충분히 봉사한 자들에게 보답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 대한 해석이야 어려가지로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석하고 싶어요. 살아남고자 했던 쟈리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살아남으려고 했던 두발 종족이 멸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이순신 장군님은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하셨고, 그 깊은 뜻이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 저는 “생즉생, 사즉사”라고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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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막 다 읽은 따끈 따끈한 글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소개를 해 보고 싶습니다. 

소개 하고 싶은 책은 우치다 타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입니다. 

이 책은 교수인 저자가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 학기에 ‘창조적 글쓰기’라는 강의에서 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불문학자답게 소쉬르나 롤랑 바르트, 부르디외 등 프랑스어권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해석하고 있고, 또 하루키 문학의 세계문학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번역본의 제목대로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마지막 장에 실린 한 단락이 이 책 내용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이 강의에서는 몇몇 주제를 임의대로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언어가 전해지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수사적으로 아름답다든가 논리적이라든가 내용이 정치적으로 옳다는 차원과 관계없이 ‘전해지는 언어’와 ‘전해지지 않는 언어’가 있습니다. 아무리 비논리적이라도, 아무리 알아듣기 어려워도, 모르는 말이 많이 있어도, ‘전해지는 말’은 전해집니다. 어떤 언어든 뜻이 명료하고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아름다운 운율을 실어 말한다고 해도, ‘전해지지 않는 말’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차이는 바로 하나뿐입니다. ‘전해지는 언어’에는 ‘전하고 싶다’는 발언자의 절박함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면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언어를 움직입니다. 뜻하지도 않은 곳까지 언어가 닿도록 합니다.“



위의 내용과 연관해서, 제가 가장 감명 깊에 읽은 부분은 9강에 나오는 ‘메타 메시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메타 메시지는 메시지를 읽는 법을 지시하는 메시지를 뜻합니다. 이야기의 내용 보다는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방식이죠. 

저자는 아가들의 예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가들은 어릴 때 엄마가 하는 말의 내용은 알아듣지 못해도, 엄마가 자기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가 있지요.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예를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언어는 비언어적 기호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도래했고, 아브라함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이 언어의 수신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결국 메타 메시지는 수신자가 있는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수신자가 그 메시지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온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메시지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발언자의 전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수신자에게 가 닿아 ‘나에게 보낸 메시지로구나’하고 받아들여질 때, 그 메시지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의 글쓰기는 배설의 기능이 강했습니다. 말하자면 대상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나 오다가다 보겠지 하는 정도.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다 읽을 누군가를 막연하게 상정했거나. 

그동안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었으니, 이젠 좀 뱉어내야겠다. 혹은 마음의 응어리들을 글로 풀어야겠다는 수준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읽는다면 좋겠지만 안 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그게 글쓰기의 부담을 갖지 않는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었죠.


이 책을 읽고 나니 글쓰기에 대해 고민이 많아지네요.

배설해서 우주에 흩어버리는 글쓰기가 아니라 수신자를 상정하는 글쓰기.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닿길 바란다는 것은 어떠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고, 목적이 있다는 것은 내 글이 일으킬 결과 -소소한 결과라 할지라도- 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겠죠.

그 동안은 가벼운 글쓰기였는데, 갑자기 무거워졌어요.

그렇지만 나는 초보니까 일단은 나와 내 주변을 제1수신자로 삼아보겠어요. 아직은 소심하니까요. 

차근차근 수신자를 늘려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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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을 잘 참고 지냈더니 진짜 봄이 왔네요.


그동안은 마음이 구져진 신문지처럼 꼬깃꼬깃 안 좋더니, 요 며칠은 쫙 펴진 것 같습니다.


기쁜 맘으로 3월에 읽은 책 목록을 올려볼께요.



문학



1. 바깥은 여름, 김애란 저, 문학동네, 2017


겨울도 혹독하지만 여름도 역시 혹독하다.



2.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저, 박찬원 역, 문학동네, 2016

너무 문학적인 책이라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슬프고 아름답다. 

불가촉 천민의 처지가 거미만도 못하다는 사실에 괴롭다.



글쓰기



3.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 윌리엄 케인 저, 김민수 역, 교유서가, 2017


21명의 위대한 작가들의 글쓰기 기법을 소개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 덕에 필독서들이 더 늘었다. 작가의 대표작들을 읽고 싶게 만드는 글쓰기 책.



4. 소설 쓰기의 모든 것 Part 1 : 플롯과 구조, 제임스 스콧 벨, 김진아 역, 다른, 2010


플롯의 기본원리 : 주인공, 목표, 대결, 완승을 절대 잊지 말 것.

소설 꼭 쓰고 싶다. 이 책 따라 쓰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착각이 아니면 좋을 텐데. 




5. 우리는 모두 저자가 되어야 한다, 한기호 저, 북바이북, 2017 

6. 이젠, 함께 쓰기다, 김민영.최진우.한창욱.김은영.윤서윤 저, 북바이북, 2016

7. 이젠, 함께 읽기다, 신기수.김민영.윤서윤,조현행 저, 북바이북, 2014

8. 서평 글쓰기 특강, 김민영.황선애 저, 북바이북, 2015


위의 4권은 모두 3월에 숭례문 학당 글쓰기 과정에 등록하면서 알게 된 책들이다. 

글쓰는 삶을 살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 물론 글쓰기 과정 덕에 매일 글도 썼다. 글의 질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제일 중요한 것은 매일 글을 썼다는 점이다.  



인문/사회/예술



9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오찬호 저, 블랙피쉬, 2018


시민들이여, 정치에 관심을 갖자.



10.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저, 동아시아, 2017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이 책 너무 너무 추천하고 싶다. 



11.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조지. 레이코프. 엘리자베스 웨흘링 저, 나익주 역, 생각정원, 2018


진보와 보수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질문 한 가지. 아기가 한 밤중에 울 때 안아 올리는가? 

즉, 가족양육 모형을 엄격한 아버지 모형으로 그리는지, 자애로운 부모 모형으로 그리는지에 따라서 사회의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진보적 의견이나 보수적 의견을 지지하게 된다. 전작인 “도덕, 정치를 말하다”에서도 가족 양육모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책은 다소 학술적인 듯하여 읽기가 수월치만은 않지만, 이번 책은 대담집이라 읽기 편하다. 



12.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 전진성 저, 천년의상상, 2015


프로이센 당시 독일의 국가 텍토닉 (기능이나 공학보다는 이념이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건축양식)이 어떻게 도쿄를 거쳐 일제 강점기 때 경성에 까지 이식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생소한 내용이라 몹시 흥미로웠다.  



13. 로봇의 부상, 마틴 포드 저, 이창희 역, 세종서적, 2016


과학기술은 특이점을 향해 가고 있다. 이 방향성을 바꿀 수 있는가? 없다면 이제는 과학기술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된다. 시민들이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14. 어쨌든 미술은 재밌다, 박혜성 저, 글담출판, 2018

박물관의 도시 베를린에 살다 보니 미술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많다. 하지만 설명 없이 그림만 보면 뭐가 뭔지 뒤죽박죽인데, 이런 책을 읽고 나면 감상했던 명화들이 그나마 머리 속에 잘 남아있게 된다. 그나저나 이 책은 정말 재밌다. 



과학



15. 한국 스켑틱 Skeptic Vol.9, 바다출판사, 2017


스켑틱이 많이 밀렸다.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이번호의 한 문장. “현재로서는 동성애 보다는 동성애 혐오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만 과학과 정의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 혐오가 문제란 이야기.



16. 과학하고 앉아있네 1 : 이정모의 공룡과 자연사, 원종우.이정모 저, 동아시아, 2015


어렸을 때도 관심 갖지 않았던 공룡인데, 이정모 관장님 덕분에 공룡한테도 관심이 간다. 



이상 16권을 읽었습니다.


4월엔 봄 햇살이 독서를 방해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책 들고 나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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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기체의 운명은 죽음을 향한다.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 유기체로 여겨지는 문명이나 사회, 국가 등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지녔다. 

생성되고, 발전 혹은 유지되다가 소멸하는 굴레. 

고대문명사회의 멸망이나 로마제국의 쇠퇴, 사회주의 국가들의 해체 등 역사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소멸을 향해 가는 사회는 모두 아포칼립스적 상황을 맞게 된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역시 신자유주의적 질병을 앓고 스러져가는 파국의 상황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저자는 현재의 파국의 상황이 오히려 유토피아로 갈 수 있는 기회임을 역설한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냉소와 허무주의이며, 냉소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과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반-유토피아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인 존 그레이를 비판한다. 

인간주의도 진보도 역사도 진리도 가치도 그레이에게는 모두 판타지에 불과하며, 세상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디자인하려는 ‘유토피아 기획’을 그는 혐오한다. 

그는 유토피아의 대안으로 현실주의를 주장하는데,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현재 발생 가능한 재난을 막는 데에 더 치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비판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저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학자의 의견에 몹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강조하는 열정과 과잉의 가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그간 사회의 재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가 진일보하는 데 열정과 과잉이 기여한 바 크지만, 실제적으로 유토피아의 도래를 이끌어 낸 적이 있던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이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것이다.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의 선택지는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다. 유토피아를 이루는 사회 역시 하나의 유기체로서 생성 발전 유지 소멸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파국의 기회를 잡자고 했지만 정작 본인이 어떤 형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지 제시하지 않는다.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 인정하는 한 가지 형태의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가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 일 수 있다. 

정작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완벽히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가 도래한들 그 사회에 영원히 균열이 발생하지 않을까? 

균열이 발생한다면 그 결과는 결국 파국일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생겨난 이래 우리의 삶은 늘 파국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갈라진 곳을 메꾸고 봉합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왔다. 

파국은 또 다른 사회를 만들었지만 그 사회 역시 또 파국을 맞이했다. 

편안하고 아름답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결국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 바로 유토피아일 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유토피아를 막연하게나마 그려보면 과연 그곳에서 내가 행복할지 의문이 든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플라톤의 이상국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꿈꾸는 우파 유토피아. 

나는 그 어디에서도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 계시록의 아마겟돈 이후 천년왕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저자에게 철저히 동의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까지 했다. 

저자가 이야기를 끝말잇기처럼 자연스럽게 끌어가고, 중간에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도 쉽게 소개해주고, 영화나 소설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지루하지 않게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위해서는 최고로 친절하고 다정한 저자라고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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