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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뜨겁게
배지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다 잠시 방공호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건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곳에서 숨을 돌리는 건 절대 비겁한 짓도 아니고, 현실 도피도 아니다. 살기 위해서 숨어든 거니까, 다디단 숨을 쉬려고 숨어든 거니까. 그러나 방공호에서 마침내 나올 수 있다면 그건 더 큰 인생의 행운이겠지. 그래서 삶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일까. 272쪽
나는 운이 좋게도 버스조차 탈 필요가 없는 집 근처에 있는 대학교를 다녔다. 다른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어떻게 대학교를 걸어서 다닐 수가 있냐며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다. 특히 기숙사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나 상처를 숙소에 간다고 해서 풀어지기는커녕 룸메이트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면서 하소연을 하곤 했는데... 식구들이랑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생활을 하는 너는 얼마나 행복하냐면서...
나에게 방공호 같은 집이 요즈음 지진으로 인해서 위협받고 있다. 누구는 이러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막 살자 하는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나만의 방공호에서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조차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하루의 일부분이라서 그저 좋다.
"그럼 너 휴가마다 여행도 안 가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게 돈이 없어 그런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그냥 쉬고 싶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96쪽
"넌 도무지 젊은 애 같지가 않다, 도무지. 어린애였다가 젊은 시절은 건너뛰고 확 늙어버린 애 같아. 하고 싶은 거 없어? 뭐든 끓어오르는 거 없어?" 96쪽
"요즘 같은 세상, 돈도 없는 주제에 하고 싶은 거 많고 꿈만 크고 그러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 '열정페이'다 뭐다 하면 착취당하는 애들, 다 그런 애들이야."
"이것저것 다 해봐서 하고 싶은 게 없는 거랑, 하나도 해보지 않아서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하는 건 다른 거야. 뭐든 좋으니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97쪽
모녀간의 대화를 읽는데 완전 내 이야기인데 하면서 깜짝 놀랐다. 엄마는 대장부 같은 성격의 자기랑 달리 딸은 아주 평범하게 남편 그늘에서 조용히 살기를 바랐는지 마마걸처럼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딸로 키워놓고는 또 그건 그것대로 못마땅했는지 특히 집에서 책 읽고 있는 걸 엄청 싫어했다, 어릴 때부터... 그래서 그런지 힘든 백화점 아르바이트도 막 찾아와서 시키고 운동하라며 수영장으로 쫓아내고 연애하라고 난리고... 지금도 우리 모녀는 엄마만 열정이 끓어올라서 피부관리며 패션에 관심이 넘치셔서 옷이며 화장품도 내가 얻어서 쓰고 있는 상황이다. 친정엄마 납시면 나는 그저 책 숨기느라 바쁠 뿐이다.
그런데도 난 남들 다 한다는 어학연수나 여행을 다니지도 못했고, 좀 더 특별한 자격증을 따거나 혹은 학과 공부 이외의 것을 배우기 위해 시간이나 돈을 낼 수도, 그러한 것을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걸까.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것도 못하는 주제라 힘들다고 투덜대기도 민망했지만 그래도 난 늘 숨 가빴다. 그게 다 게으르고 나약해서 그런 거 아니겠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한편으론 여기서 얼마나 더 숨이 차야 하나 싶었다. 98쪽
두근거림이 아닌 평온한 상태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나... 하루하루 특별한 생활을 꿈꾸기보다는 나쁜 꿈을 꾼 날은 하루를 매우 조심해서 보내는 것처럼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화낼 일도 없이 나쁜 일 없이 오늘 하루가 지나갔음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지 않을까... 나랑 비슷한 모습의 윤제이를 보면서 옆에 있다면 안아주고 싶고 토닥거려 주고 싶을 만큼 공감하면서 위로받으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어서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병들고 늙은 부모를 산에 버렸다는 이야긴 들어봤어도, 지긋지긋하게 들러붙는 애인 떨궈내려 굳이 산에 올랐다가 혼자 몰래 내려갔다는 이야긴 난생처음이었는데, 하필 이런 게 나의 일이 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131쪽
"실은 저, 그때 산에서 내려온 이후 다짐했어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뺏기지 않을 거라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까."209쪽
이 구절을 읽고 있는데 "이런 나쁜 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연애를 하다가 심하게 상처받은 적도 없는데 그냥 연애를 하는 게 겁나고 회피하고만 싶어지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에게 길들여지고 싶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신랑을 소개해준다는 걸 1년 동안 도망 다니면서 거절했는데 만날 인연이었는지 결국은 결혼까지 했지만 혹시나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나도 주인공처럼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결심까지 했을지도 모르니...
중학교 2학년 때 체력검사를 하던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운동장 모퉁이에 앉아 있는데 서로가 관심은 있었지만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친구랑 이야기할 틈이 생겼다. "나 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너에게 단짝 친구가 있어서 말 걸 기회가 없었다"라는 이유를 듣고는 "나도 그랬는데..."라며 우리는 그날 사차원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다느니 우주인이나 우주선은 진짜 있는 걸까 하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던 기억이 아직도 학교 운동장의 풍경과 같이 가끔 생각이 난다. 지금은 수많은 편지와 빽빽하게 적혀 있는 교환 노트 한 권이 그 시절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처음 만나는 배지영 작가... 그녀의 신작 '안녕, 뜨겁게'에는 외계인이랑 교신을 시도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학창시절인 중2를 생각나게 해서 추억에 젖어들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어서 앞으로도 행복하게 읽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순수했던 나이였기 때문에 우주인이 있다는 걸 믿었고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고 책에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