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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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할 땐 SF

 

나는 그 현상이라고 부른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온 상식이 마치 처음 들어본 잠언인 양 깨달음을 줄 때. 어떻게 이걸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싶기도 하고 왜 한 번도 다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순간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도 그랬다. 우리는 당연히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이 명제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짧은 문장을 지나쳐가면서 이 소설 속에 내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의 너머의 이야기가 숨어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을뿐더러, SF를 읽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영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제목의 힘이란 위대한 법. 작은 호기심은 평소라면 지나쳐갔을 서평단 모집 글을 덜컥 클릭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안나라는 노인이 등장하는 소설 속 미래에서는 우주선 주위의 공간을 왜곡하는 워프 버블과 인체 냉동수면 기술인 딥프리징을 교차 사용하여 빛보다 빠르게 우주를 넘나든다. 인간 자체가 빛보다 빠르진 못하지만 연구와 신기술을 이용해 행성 간 이동에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던 거다. 혁신적인 발전은 인간사에 혁명을 가져오고 이대로 모든 게 잘 될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워프 항법은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웜홀의 발견으로 곧 쇠퇴하게 된다. 단순히 발전이 또 다른 발전으로 대체된 것 같지만, 역사는 단계론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일직선으로 발전하지도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는 정치적 쟁점이라든지 윤리적 문제, 기업의 이윤 창출 같은 대단히 복합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그런 과정에서 항상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리고 안나는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은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선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녀의 가족은 워프 버블을 이용해서 새로운 행성으로 개척 이주했다. 그리고 웜홀이 발견되고 워프 항법이 폐기되는 과정에서 안나가 가족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사라졌다. 웜홀은 더 빨리이동할 수 있지만 웜홀이 있는 장소만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안나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비록 입 밖으로 꺼지 않아도 화자와 안나, 그리고 나는 알 수 있다. 회사에서는 폐쇄된 우주정거장을 강제철거하기 위해 화자를 보낸다. 안나를 설득하라고.

안나는 어떻게 했을까?

 

SF를 많이 읽어보지 않았기에 추론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대충 예상되는 결말이 있었다. 그건 시대를 뛰어넘어 지속되는 인간성을 토대로 한 예측이었다. 비록 우리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행성에 도달하는 신기술의 시대를 살 지라도, 과거의 유물은 남는다. 우주정거장 강제철거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떠오른 사람은 작년 영화관에서 본 <공동정범>의 철거민들이었다. 화자가 자신을 파견직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맙소사, 비정규직은 미래에도 사라지지 않을 거다. 논픽션이라도 읽은 양 눈에 훤히 보이는 모습에 속이 쓰린 것도 사실이었지만, 절망이 유산이라면 희망 역시 우리의 유산이다. 안나의 선택처럼.

 

처음 제목을 봤을 때 느꼈듯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그 너머를 이야기하는 글이 맞았다. 빛을 뛰어넘는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세상에서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이 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건 안나만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 역시 살릴 수 있지만 살지 못하고, 갈 수 있지만 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던가.

 

마지막 페이지를 마저 읽었을 때, 조금 생뚱맞지만 목적지를 똑바로 직시하며 사는 안나의 삶이 조금 부럽게 느껴졌다. 목적을 향해 남은 삶의 전부를 내던질 수 있는 용기도. 그래서인지 다 읽고 나니 글의 제목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을지라도.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내분실>

 

몇 년 전 돈이 없어 굶어 죽은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노약자도 아닌 건강한 청년이 굶어 죽는다니?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으면 전혀 믿지 못할 사실이었다. 기사는 풍요의 시대에도 아사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어렴풋이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이들은 집단의 수에 상관없이 소수자라고 불린다. <관내분실>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미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소수자의 이야기다.

 

<관내분실>의 미래 세계는 고인의 기억과 행동패턴을 저장해 뇌의 패턴을 스캔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마인드라는 생생한 정신을 만들어낸다. 마치 고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인드는 고인을 완벽하게 복제해낸다. 이 마인드들은 고유 인덱스가 붙여진 채로 도서관의 책들처럼 저장되어있다. 고인이 그리워지면 사람들은 인덱스를 이용해 거대한 저장소에서 그들을 검색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주인공 지민의 엄마 김은하의 인덱스가 지워지면서 발생한다. 지민과 은하는 그리 사이좋은 모녀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는 은하가 죽은 후에야 마인드를 찾을,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은하의 인덱스가 지워졌기 때문에 그녀가 살아생전 소중하게 여겼던 어떤 특별한 것을 찾아야만 검색이 가능하다는 관리인의 설명이 뒤따른다. 설명을 들은 지민은 어쩌면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고 은하의 추억조각들을 찾아 나선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독자를 위해 남겨두고 싶다. 왜냐하면누구나(적어도 당신이 여성이라면) 한 번 쯤 잠시 숨 고르고 갈 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요약했지만 <관내분실>의 중심소재는 엄마. 그럼, 엄마는 소수자일까? 관리자는 은하의 마인드를 설명하면서 찾을 순 없지만 어딘가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존재를 느낄 수 없다면 과연 실재한다고 할 수 있나? 엄마도 마찬가지다. ‘김은하라는 이름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엄마라고만 불릴 때, 김은하는 존재했던 걸까? 소수자의 정의가 권력을 갖지 못하고 사회에서 존재가 지워진 채 소외된 집단이라면. 혹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아기 옆에는 엄마가 필요하다는 편견으로 직장을 관두고 돌봄노동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된 여성이라면. 우리는 모두 정답을 알고 있다.

 

물론 엄마와 딸의 미묘하고 오래된 관계를 주제로 한 글들은 흔하기 때문에 자칫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김초엽 작가의 놀라운 점은 여기서 나온다. 뻔한 주제를 가지고 다르게 다가와서는 마음을 도닥여주기 때문이다조금 느슨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독서는 뒤로 갈수록 허리를 꼿꼿이 세워 자세를 바로하게 만들었고, 마지막엔 고개를 끄덕이며 반성하게 했다. 누군가는 지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소수자의 이야기는 절대 진부할 수 없다. 그러니 부디 지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면.

 

 

 

같은 우주에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산다

 

김초엽 작가가 단편들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상당히 분명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관내분실>뿐만이 아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 이타성일까?”, “인간의 대표성이란 무엇인가?”부터 언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하는 원초적인 질문까지. 그리고 당신의 우주는 어디에 있냐고 다정하게 물어주는 작품도 있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일관될 수밖에 없다. 다만 어떻게풀어내느냐, 어떤 컨텍스트를 지니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긴 한다. SF가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결국 인간이 가지는 근원적인 질문에 다시 돌아오는 장르라면, 이 책이야말로 SF의 충실한 구현물이다.

 

또 곳곳에서 작가가 여성이기에 고민하고 고뇌했던 문장들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특정 성별이라서 캐치해 낼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꽤 명징하게 드러나는 문장도 있다. 끈질기게 소수자의 이야기를, 여성의 입을 빌려 말하는 글들을 보며 쏠쏠한 위로를 받았다. 비난받는 여자우주 비행사라는 단어에 가슴이 철렁하기도 하고(<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한 여성이 어떻게 세계를 만들어냈는지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기도 하며(<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최초의 외계생명체를 발견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가슴에 품었던 여성을 보며 두근거리기도 했다(<스펙트럼>). 이렇듯 김초엽 작가는 여성에게 목소리를 주고 가장 철학적인 질문에 답하게 한다. 단순한 시작이지만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수자에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같은 우주 아래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세계를 살지는 않는다. 나 역시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이 배신당하면서 인생이 뒤바뀌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절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몇 년 새 분노해야 할 곳에 분노하고 투쟁해야 할 곳에 힘을 보태면서 조금 지쳐있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이 필요했다, 나에겐. 그 어느 때보다. 언젠가 김초엽 작가의 장편소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 스포일러를 굉장히 싫어하기도 하고, 소설 서평은 처음이라 내 멋대로 내용요약을 최소화하고 딱 두 편만 골라서 썼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지 못한 글들도 한 편 한 편 모두 소중하다는 점을 꼭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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