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
이동원 지음 / 두란노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로역정은 오랜 기간동안 기독교 역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존 번연은 기독교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천로역정을 내놓았지만 그 역시도 비판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저 천국', 우리가 죽어서 갈 천국에만 몰두하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책임을 등한시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요즘 기독교 비판에 가장 앞서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기에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쩌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은 내세이든 현세이든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하나님 나라를 다양한 사역의 방향과 연결시켰다.

하나님 나라의 성경적 중요성은 서론부분에서 5가지 주제로 다루고 있다. 18p.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 본질적인 핵심이라는 사실을 기초한한다면 그 이후는 적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특별히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12장은 올바른 성경해석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1. 본문의 문자 뜻을 원 의미대로 풀어야 한다.
  2. 성경의 핵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
  3. 성경 해석 사역은 우리를 교회 공동체의 교제 안에 머물게 해야 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의 과제를 주시면서 "가서 모든 민족(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는 이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징일 뿐 아니라 동일한 세례를 받은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소속하게 도니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경해석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제자다운 제자로 성숙해지도록 돕는 것이 또한 성경 해석의 역할입니다. " 210p.

저자가 천로역정에 대한 관점을 핵심으로 사역과 연결시키는 방향은 추후에도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며 이미 찾아온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역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여년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라면? 한 세기를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에 있어 진보와 후퇴를 목경하며 해석하고 적용하는 '반복'을 통해 통찰이 깊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나는 100년을 살아가며 변해가는 과정을 목격한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해석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선 겸손하게 고개가 숙여지기 마련이다. 평생 동안 학문 연구와 집필에 심혈을 기울인 저자는 수 많은 베스트셀러를 집필하였으며 건강한 신앙과 삶의 길을 제시하고자 평생 노력해왔다. 

연세대 철학과 명예 교수로서 100세가 넘었음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후대에 많은 통찰을 전해주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희망>이다. 

책의 목록은 전체 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 
(2)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기독교 
(3) 민족에 희망을 주는 기독교
(4)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기독교

책의 목록을 먼저 살펴보는 나로서는 큰 제목이 주는 의미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그 희망은 결코 현실을 외면하는 희망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한 희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을 그저 신비로운 것, 거룩한 것, 선한 것과 같이 형이상항적으로 혹은 두리뭉실하게 안개처럼 환원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 가운데 또렷이 바라볼 수 있는 수준과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적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이웃에게 희망을 주며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기독교 신앙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저자와 깊은 공감대를 이룰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참 많았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세 번째 과제는 교권주의 또는 교권의식을 축소하거나 불식시키자는 것이다. 교회가 커지고 사회적 영향력이 강화되면 자연히 뒤따르는 것이 교권의 확장이다. 그것이 보편화되면 기독교는 점차로 교권주위에 치우치게 된다. …… 그것이 가장 뚜렷한 예는 종정일치 또는 야합으로 드러난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이슬람세계에서 비슷한 현상을 발견하곤 한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못하면 자연히 종교가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며 정치권력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결과를 낳는다. p.25

요즘 코로나 시대에 종교와 정치에 대한 생각을 잘 정리해주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의 숭고함이 싸구려 세력으로 전락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크리스천은 누구보다도 인권을 존중하며 생명과 개성 및 인격의 가리츠 높이 받는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이 인간애와 인간 목적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만일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목표달성을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역행하는 행위가 된다. 우리는 이념의 노예가 된 공산주의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33

무픞을 탁 치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몇 달 동안 한국 기독교가 보여준 특별히 개신교가 보여준 부끄러운 실상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만큼 안타깝고 아쉬운 일들이 참 많았다. 100년 후에 모든 크리스천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바뀌기 전에 반드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영역은 흔하게 일어나는 '이념'에 관한 문제였다.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은 투쟁의 대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평등을 뒷받침하는 정의는 인간을 위한 사랑이며 사랑이 정의의 질서를 높여줄 때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정의는 사랑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현관에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들어선다. 그리고 정의의 현관을 통해 들어서는 곳은 사랑의 집니다. p.148
최근의 나의 고민은 과연 이 땅에 선함이 어디에 있으며, 이 땅에 양심과 도덕, 정의가 인간에 의해 세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현실 정치에 소망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촛불과 같은 것이고 과학과 이념의 분화와 발전은 또 다른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에 위기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런 혹독한 상황 속에서 과연 인간에게 '구원'이 가능한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확고한 결론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안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응답한다.
기독교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쓰는 것은 비교적 선한 삶과 악한 삶을 상대적으로 구별하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따라 구원 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적인 선과 악은 세례 요한까지의 문제로, 하늘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것에 속한다. 그리스도 이후에는 인간의 완성과 구원을 위한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 되는 것이다. p.198

혼돈이 계속되고 있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여호와는 피할 바위요 산성이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절로 흘러나오게 되었다. 책을 마무리 하며 권하고 싶은 대상이 떠올랐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 기독교에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 기독교에 희망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편하게 그리고 시끄러운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기독교에 아직 희망은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험을 만나거든 - 현실과 씨름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야고보의 지혜
박대영 지음 / 두란노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시험>이라 말한다.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걸림돌은 안타깝게도 누구에게도 찾아온다. '믿음이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이런 스토리가 있는 법이다. 그들의 믿음이 연단을 받고 새로워지는 과정이든 믿음이 더 성숙해지는 과정이든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시험>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 "하나님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내 인생에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이 고난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물 밀듯이 밀려 온다. 그 때 우리는 좌절을 느끼며 절망감에 허우덕 거린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기댈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자부할 만큼 주님을 의지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실망감을 느끼고 주저 앉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저자는 야고보서 강해를 통해 <현실과 씨름한느 이들에게 들려저눈 야고보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다. 9가지의 지혜를 본문 주해의 순서를 따라 차분하게 그리고 깊게 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영역은 이 세상이 바로 광야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이 땅에서 천국을 꿈꾸며 때때로 천국을 누리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넓은 영역에서는 광야의 시간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이러한 영적 현실 속에서 각각의 질서와 삶의 원리를 깊이 있게 터득해가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광야로 표명하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그분의 손길('지혜')을 의지하는 광야를 순례하는 데 보탬이 되는 소박한 도구로 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 

각 챕터 끝에 정리된 <지혜 핵심 정리> 부분만 보아도 책의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핵심을 잘 정리해 놓았다. 강해도 참 좋았지만 핵심적으로 정리된 부분과 나눔을 위한 정리는 <삶의 적용>을 고려한 저자의 배려이자 도전으로 느껴졌다. 

야고보서는 늘 <행위>가 강조되는 성서의 대표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배경과 그 의도와 목적을 살펴 보면 꼭 행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행위가 나오기까지의 그 중심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를 묻지 않고서는 야고보서를 온전히 알았다고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광야라고 알려 준다. 우리는 본향을 향해 가는 흩어진 열두 지파이다. 새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새 이스라엘로 보내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셨다. 이제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으로서 광야 세상에서 당신의 새 언약 백성을 창조해 가고 계신다. (p.67)  

그러면서 저자는 야고보를 통해 우리에게 <인내>를 강조한다. 그 인내 속에서 야고보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외면하게 만들 수 있는 시험의 예로 소유를 제시하고 있다. 야고보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의 영적인 소속이지 결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험 가능한 광야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

나는 이 질문에 에리히 프로의 <소유냐 존재냐>가 떠올랐다. 우리의 존재 양식은 언제나 소유 양식보다 더 가치가 있고 우월함을 잊지 않기 위해 야고보는 우리의 존재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존재 양식을 이 고난 많은 세상에서 유지코자 할 때 부딪치는 문제들은 한 두가지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침착하고 또 차분하게도 인내를 강조한다. 인내심이 증발하기 전까지 말이다. 어쩌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지만 <말씀과 순종>의 동력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멈추지 않게 만든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메시지가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 방법과 깊이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엘리야의 모습을 보며 배울 수 있기에 얼마나 부담이 덜 되는지 모르겠다. 기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현실을 초월해 능력 있는 사람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하늘 소망이 실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주신 시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난의 한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교 듣는 법 - 분별과 은혜
김형익 지음 / 두란노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교 마저 소통의 영역에 함몰 시킨것이 아닌가라는 나름의 색안경을 끼고 책을 읽어내려 갔다. 

이런 점에서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던 동시에 꽤 유익한 부분들이 많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한 단단한 교리 위에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서의 위치와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논리적으로 잘 풀어낸 책이다. 

전체 파트는 총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설교듣기의 중요성과 목적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자의 정체성을 다루는 것으로 내용을 마감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각인 시키며 설교를 통해 듣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3가지 용레>는 다음과 같다. (1) 로고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 경배의 대상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3)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 (p.25)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는 구분되는 방식으로 분별력을 가지고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차분히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독서를 이어가니 저자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설교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라고 말하는 혹자들의 의문에 한 줄기 빛과 희망처럼 효율이 아닌 탁월한 방식으로서의 <설교>를 이야기하는 문장 속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탈권위 시대에 설교는 누군가에게 미련한 방식이라 매도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에 사용하시는 탁월하고 신비한 방법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며 "그렇다면 설교를 하는 것과 듣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어가기 시작하는 것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몇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말로써 온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양 무리들에게 들리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온전하게 드러나실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 음성을 들으면 그들 속에 없던 믿음이 생겨나서 거듭나는 일이 발생하고, 거듭난 사람들은 그 ㅁ라씀을 통해서 믿음이 견고해지며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말ㅆ므을 순종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p.120-121)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기관은 눈보다 귀다. 성경은 믿음을 언제나 들음과 관련지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눈보다 귀와 관련된 말씀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고 있다. 신앙의 3요소는 말씀, 들음, 믿음으로서 (롬10:14) 그만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만약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된다면 개인적으로는 반드시 6장을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설교를 듣는 사람들보다 설교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 혹은 리더쉽의 자리에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진실도 함께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잘 듣고 잘 말하며, 잘 말하고 잘 듣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서 설교가 주는 유익이 찬란히 빛나게 할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님의 진심 - 산상수훈을 통해 듣는
스카이 제서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기

흔히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은 황금률이라 불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인생에 중요한 교훈과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황금률이라 부릅니다. 직접적인 단어의 정의로는 황금률(黃金律)은 수많은 종교와 도덕,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원칙의 하나로, '다른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는 윤리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예외없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도 쉽게 부정하지 못할 정직한 욕구요 마음입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이런 (이기적일 수 있는)욕구와 마음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가르침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서도 매우 탁월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 산상수훈이 사회적인 함의와 자신의 욕구와 나아가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기록된 가르침이며 교훈정도에 그치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이 만약 도덕적 철학적 교훈의 차원에서 그친다면 굳이 두꺼운 책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며 더 실존적이고 실재적인 것을 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산상수훈이 적지않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감동을 넘어 깨달음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그런 관점을 이해하고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 해당하는 산상수훈을 오늘날의 말로 쉽게 풀어낸 글입니다. 읽기에는 가볍지만 결코 그 내용은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어로 쉽게 쓰여진 산상수훈의 해석이 주는 묵직한 감동은 여전히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의 형태는 변하지만 의미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욱 쉽게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총 9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5장 1~12절을 첫 파트로 7장 24~29절의 마지막 파트까지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루에 한 파트씩만 읽어도 9일이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니 읽는 이로하여금 부담을 줄여준 산상수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알려지는 책들이 더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책을 펼친지 얼마되지 않아. 산상수훈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혹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아름다운 윤리 이론 혹은 좋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고원한 이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 분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 (p.216)

사람들을 만나고 사역을 하면서 의문점이 가시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 이런 아픔을 경험해야하는 지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일이며 과연 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존재할까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이미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면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에 산상수훈의 말씀이 가깝게 때로는 아무 멀리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어찌 보면 제게 있어서는 당연시 되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과 감정은 <심플하다>로 줄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대해서 몰랐던 영역이 존재한다고 하면 거짓말일테고 모두 알았다하면 교만한 태도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복잡하게 엉켜 있던 생각과 감정들이 심플하게 정리되고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풀어쓴 문장과 현대에 맞게 잘 해석된 문장들이 마음에 더 쉽게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3가지 부분을 뽑아 간략하게 요약해보고 정리해보았습니다.

1)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닌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대게 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하기도 하지만 사실 어떤 마음의 동기에서 선행을 행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동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의 변화가 진정한 선행의 시작이라는 주장은 익숙하지만 마음 속 깊히 새길 수 밖에 없는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저자는 외적인 규칙이 아닌 <내적인 은혜>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변화의 주체로써> 내적인 태도가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될 때에 가능함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환영하고 대접하는 외향만 멀쩡한 이들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p.74)

2) 원수 사랑하기.
현대인들에게 '사랑'하면 애틋하고 달콤한 감정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사랑을 부드러운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불가능 합니다. 원수를 보며 애틋하고 달콤한 감정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이 교정되어야 합니다. (p.111) 예수님이 말씀하신 감정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상댕방을 위한 행동이요 의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이 치우쳐진 이 사랑에 대한 정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와는 많은 차이를 보여줍니다. 
진짜 사랑은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과는 많이 다르며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그가 싫어해도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p.112) 

3) 가장 지혜로운 인물 예수를 만나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을, 우리를 정말 아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지만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그냥 사람만 좋은 동네 아저씨쯤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을 그냥 좋은 말 정도로만 흘려 듣는 경향이 있다. (p.271) 그러나 산상수훈의 메시지의 중심인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는 착각 중에 하나가 예수님은 전지, 전능하시며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고 믿으면서도 그분의 지혜와 명철, 총명함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며 주님은 모든 면에서 그리고 역사상 가장 지식과 지능이 높고 풍부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마무리
책의 내용들을 모두 간결하게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주 꺼내보고 또 설교의 자리에서 선포해야 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어느 순간 말씀의 일부로 생각하고 실천과 행함에는 예외를 두고 살아가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크게 와닿았던 부분들은 바로 <행함과 순종>에 관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순종을 일으키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제 개인의 죄성과 악함으로 인해 말씀에 불순종하고 살아갈 때가 무척이나 많았음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루지지 않는 비 실존적인 말씀이라 치부하며 어느 순간 주님의 말씀을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으로 내려 놓은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삶에 순종함과 진리에 대한 실천적인 지침이 필요한 분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될 것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