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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0년 10월
평점 :
100여년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라면? 한 세기를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에 있어 진보와 후퇴를 목경하며 해석하고 적용하는 '반복'을 통해 통찰이 깊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나는 100년을 살아가며 변해가는 과정을 목격한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해석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선 겸손하게 고개가 숙여지기 마련이다. 평생 동안 학문 연구와 집필에 심혈을 기울인 저자는 수 많은 베스트셀러를 집필하였으며 건강한 신앙과 삶의 길을 제시하고자 평생 노력해왔다.
연세대 철학과 명예 교수로서 100세가 넘었음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후대에 많은 통찰을 전해주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희망>이다.
책의 목록은 전체 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
(2)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기독교
(3) 민족에 희망을 주는 기독교
(4)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기독교
책의 목록을 먼저 살펴보는 나로서는 큰 제목이 주는 의미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그 희망은 결코 현실을 외면하는 희망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한 희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을 그저 신비로운 것, 거룩한 것, 선한 것과 같이 형이상항적으로 혹은 두리뭉실하게 안개처럼 환원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 가운데 또렷이 바라볼 수 있는 수준과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적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이웃에게 희망을 주며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기독교 신앙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저자와 깊은 공감대를 이룰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참 많았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세 번째 과제는 교권주의 또는 교권의식을 축소하거나 불식시키자는 것이다. 교회가 커지고 사회적 영향력이 강화되면 자연히 뒤따르는 것이 교권의 확장이다. 그것이 보편화되면 기독교는 점차로 교권주위에 치우치게 된다. ………… 그것이 가장 뚜렷한 예는 종정일치 또는 야합으로 드러난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이슬람세계에서 비슷한 현상을 발견하곤 한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못하면 자연히 종교가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며 정치권력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결과를 낳는다. p.25
요즘 코로나 시대에 종교와 정치에 대한 생각을 잘 정리해주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의 숭고함이 싸구려 세력으로 전락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크리스천은 누구보다도 인권을 존중하며 생명과 개성 및 인격의 가리츠 높이 받는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이 인간애와 인간 목적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만일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목표달성을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역행하는 행위가 된다. 우리는 이념의 노예가 된 공산주의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33
무픞을 탁 치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몇 달 동안 한국 기독교가 보여준 특별히 개신교가 보여준 부끄러운 실상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만큼 안타깝고 아쉬운 일들이 참 많았다. 100년 후에 모든 크리스천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바뀌기 전에 반드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영역은 흔하게 일어나는 '이념'에 관한 문제였다.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은 투쟁의 대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평등을 뒷받침하는 정의는 인간을 위한 사랑이며 사랑이 정의의 질서를 높여줄 때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정의는 사랑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현관에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들어선다. 그리고 정의의 현관을 통해 들어서는 곳은 사랑의 집니다. p.148
최근의 나의 고민은 과연 이 땅에 선함이 어디에 있으며, 이 땅에 양심과 도덕, 정의가 인간에 의해 세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현실 정치에 소망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촛불과 같은 것이고 과학과 이념의 분화와 발전은 또 다른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에 위기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런 혹독한 상황 속에서 과연 인간에게 '구원'이 가능한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확고한 결론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안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응답한다.
기독교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쓰는 것은 비교적 선한 삶과 악한 삶을 상대적으로 구별하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따라 구원 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적인 선과 악은 세례 요한까지의 문제로, 하늘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것에 속한다. 그리스도 이후에는 인간의 완성과 구원을 위한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 되는 것이다. p.198
혼돈이 계속되고 있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여호와는 피할 바위요 산성이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절로 흘러나오게 되었다. 책을 마무리 하며 권하고 싶은 대상이 떠올랐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 기독교에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 기독교에 희망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편하게 그리고 시끄러운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기독교에 아직 희망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