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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평점 :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사형수가 넘어가던 살아생전 마지막 고개, 서울 남산 언덕에 있었다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허락되는 자유란다. 김산과 님 웨일즈의 만남은 바로 이 죽음과 절망의 노래, “아리랑”으로 시작된다.
조선인 김산. 본명 장지락, 평북 용천 출생으로 일본 만주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을 누비며 중국 공산혁명을 통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신흥 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한 뒤 상하이로 가 이동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1925년 중국 대혁명에 참가, 1930년, 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7년 중국의 옌안에서 미국 신문기자인 님 웨일즈(대륙의 붉은 별, 에드거 스노우와 결혼하여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참여했다.)와 만나게 되었고 님 웨일즈는 이 만남의 성과를 담아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아리랑의 노래>를 출간하게 된다. 1938년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으나 1983년 중국공산당은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을 결의하였다.
김산의 삶은 바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죽음과 탄식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운동적 삶을 회고한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 소리와 싸움하는 소리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 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서 나와 인간 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 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 것이다.”
1920-30년대 중국 공산당 속에서의 조선인으로서 혁명의 열기 한 가운데 있었던 사람,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조선인의 투쟁과 혁명을 비밀리에 이끈 사람, 못다 이룬 사랑과 비극적 죽음, 잘생긴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 마지막으로 스파이라는 혐의로 비밀리에 처형되기까지 일견 그의 삶은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안전한 부가 보장되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쿠바 혁명의 한 복판에 뛰어들었던 체 게바라가 젊은이들에게 붉은 별을 단 검정 베레모를 쓴 낭만적인 모습으로 곧잘 기억되듯이.
하지만 혁명이 낭만일 수 있으랴. 이들 모두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혁명의 한 복판에서 감성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하게 자신을 견지하며, 자신의 삶을 오롯이 던진 혁명가이자 지략가들이 아닌가.
광둥 코뮌을 경험하면서 김산은 혁명의 허무함과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조국과 만주에서 2000만 조선인들이 전 아시아의 자유를 위해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는 기개 넘치는 선언은, 하지만 국공합작이 깨어지면서 산산히 부서지고, 혁명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역사 속에서 그는 분명 승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비통과 절망, 허무와 패배 속에서 병든 모습으로 죽어 갔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고, 개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모든 것을 다 패배하더라도 ‘나 자신에게만’은 승리하는 경험, 김산이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바로 그 말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거듭나게 하는 힘은 아닐까? 오늘, 우리에게 감성과 분위기에 휩싸이지 말고, 냉철하게 운동의 지평을 바라보며 올곧게 투쟁하는 것이 곧 승리하는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엇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 나 자신에 대하여 -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죽음과 절망을 넘어 김산의 아리랑, 우리의 아리랑이 생생하게 울려 퍼지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인간 김산을 존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미국인 님 웨일즈의 모습이, 인종과 국경을 넘어 숭고하게 여겨진다. 같은 조선인으로서 조선인의 생애에 무관심했던 우리의 게으름과 안이함을 꾸짖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