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좋은 책.

한편으로는 사멸해가는 언어의 보호가 생태계 보호나 동물 보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쓴 책이지만, 현재의 언어 상황과 그 역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원인을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총체적인 문제를 이야기해야 했다. 언어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언어적인 다양성이 집중된 지역은 생물학적/생태학적 다양성이 집중된 지역과 거의 일치하며, 사멸해가는 소수 언어들의 상황은 생태계는 물론이고 중심과 주변, 다수와 소수, 지배와 억압의 체계 전체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나의 식물이, 동물이, 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고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세상을 보는 창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자 우리가 엿볼 수도 있었을 세상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자는 것은 단순히 그 언어를 박제화시키자는 뜻이 아니라 (박제화도 차선책, 혹은 지연책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언어가 위기에 처한 상황 전체를 보고 대안을 생각해보자는 호소다. 아무리 몇천명, 몇만명의 소수민족이 쓰는 언어라 해도 그 언어가 열등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과거에는 유럽인들의 대량 학살 때문에 많은 언어가 사라졌고, 지금은 경제적인 압박과 제1세계의 산업에 유리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독재자 지원과 자본주의 논리와 되풀이되는 중심-주변의 폭력 때문에 또 많은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언어가 사라져갈 때 그 언어의 주인들은 언제나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게 마련이다. 

고릴라의 멸종을 막는 것과, 숲과 초원이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 무기상들만을 위한 잔치로 전쟁을 벌이거나 무도한 독재자들을 지원하여 굶어죽는 아이들이 무수히 나오게 만드는 짓을 막는 것, 부가 소수에게만 집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그럭저럭 살만한 사람들도 박탈감과 피로에 시달리게 만드는 시스템을 막는 것, 그리고 소수민족이 단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전통을 버리고 자기네 언어를 포기하고 술에 찌들어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미국에서 흑인과 인디언의 지능평가가 낮게 나오는 이유는 그 지능평가의 기준이 '영어'와 그와 연결된 생활방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주변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
을 경멸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추레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무엇보다도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되지 않는 사회와 삶을 누리는 것, 이것들은 각기 따로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며 당연히 해결 역시 단독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와 관계없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생태계의, 자연의 원리는 강한 것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사실 이것 자체도 약육강식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기이하게 해석한 것이지만)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점.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외에도 다른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어쩔 수 있나'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수많은 탄압과 폭력의 일화들을 읽다보면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자행되는 많은 일들을 떠올리면)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인데 아닌 척 발버둥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암울한 생각마저 몰려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자들의 호소는 마음에 남는다. 

다소 감정적으로 썼지만 -_- 책은 상당히 균형이 잡혀있고 생각해볼 여지도 많다. 이 책을 읽고 당장 위기언어 보호론자로 돌아설 필요는 없다. 미시적인 관점과 거시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며, 폭넓은 역사해석과 언어학/생태학에 관련된 풍부한 사례가 들어있고, 글도 재미있고 읽기 편하게 썼으니, 그저 재미있게 읽고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만 가진다 해도 책 한권의 몫으로는 족하지 않겠는가.

덧. 한국어는 위기에 놓여있는 언어도 아니고, 소수어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어는 사용자의 숫자상으로 세계 14위의 '덩치 큰' 언어이며, 아직도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분화과정이 지속되고 있는 비교적 안정적인 언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멸해가는 언어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먼 것만은 아니다. 영어 공용화론도 그렇지만 각종 지방 사투리들도 '단지 중심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해결책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며, 공식적으로 부과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잠재우려고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해결책은 권력의 불균형이 시정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현대화가 반드시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지역적 정체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국민 국가의 대안이 되는 다른 형태의 통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민 국가 체제는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 아래서 생겨났으며, 정치적 통일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언어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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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돌 1 - 제1부 뉴턴의 대포 환상문학전집 9
그레고리 키스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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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만 알고 있는 아이작 뉴턴이 사실은 연금술사요, 신비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엄정한 과학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 중에 연금술이나 신비주의와 무관한 사람도 별로 없다)

이 책 철학자의 돌(원제 비이성의 시대)>은 그 부분을 전면에 내세운다. 뉴턴이 연금술을 연구하다가 곁다리로 다른 법칙을 발견한 게 아니라, 진짜 연금술의 핵을 얻어냈다면? 마법이라는 게 허황된 기적이 아니고, 일정한 규칙이 있고 발견과 발명이 가능한 자연법칙이라면? 그랬다면 역사는 어떻게 굴러갔을까. 이것은 바로 그런 생각 위에서 18세기 역사를 새로 써낸 대체역사물이다. 뉴턴은 철학자의 돌을 만들어내고 루이 14세는 영약을 써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며, 천재 발명가 벤자민 프랭클린은 알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에 쫓기는 세상.

하지만 이 마법에는 또다른 마법--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라는 그림자가 있고, 연금술과 마법 역시 지금 우리가 아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만큼 위험한 법이다. 기왕이면 18세기 세계사, 그 중에서도 특히 유럽의 역사를 알수록 즐겁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젊은 주인공들이 겪는 파란을 따라가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벤자민은 좀 얄밉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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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 - 길 잃은 고양이, 한 밤의 침입자 애프터 다크 1
게리 디셔 외 지음, 숀 탠 외 그림, 정진영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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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학교에는 언제나 무서운 이야기가 떠돈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대개 비슷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배경. 몇 년에 한번씩 새로운 히트작이 탄생하기는 하지만 (엘리베이터 이야기처럼) 대개 괴담이란 상식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이야기의 변주곡을 반복하며 소름끼쳐 하곤 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 알고 있는 비밀이기에 더 선명한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듭거듭 되풀이되는 이야기들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던 바로 그 부분을 찌르는 것일 테니까.

이 시리즈에 실린 이야기들은 때로는 끔찍하고, 잔인하고, 무섭다. 각기 다른 작가가 쓴 만큼,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포담을 총망라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처럼 고등학교 시절까지 괴담 이야기를 즐겨 듣고 즐겨 하던 사람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다. 괴담 모음집이 아니라, 공포소설인 것이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고 뒤통수를 치는 게 소설의 목적은 아니다. 소설이 정말 공포스러우려면, 사람의 심리를 제대로 읽어내고 스멀스멀 그 틈으로 기어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리즈는 제법 만족스러운 공포소설을 여러 편 담고 있다. 플롯은 깔끔하고, 심리묘사는 적절하다. 스케치화같은 삽화도 마음에 든다.

이렇게 다커버린 다음이라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기는 했지만 (다 커버린 다음이라서일까?) 확실히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청소년 정도 아이들에게 더 생생한 인상을 남길 듯 싶다. 물론,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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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브라운 신부 전집 4
G. K. 체스터튼 지음, 김은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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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브라운 신부 전집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권. 비밀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이 어리숙하고 귀여운 신부님이 어째서 그렇게도 범죄자들을 잘 꿰뚫어보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 펼쳐지며, 1권을 읽으면서 제일 궁금했던 점 - 대체 플랑보를 어떻게 회유했을까 싶었던 의문도 해결해 준다. 트릭이나 범죄 자체보다는, 심리적인 허점과 맹점을 꿰뚫는 브라운 신부 특유의 통찰력이 유난히 빛을 발한다고 할까. 귀여운 면보다는 약간 어둡고 사색적인 면이 돋보이는 편. 2, 3, 5권에도 빛나는 단편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전집을 다 보기가 버겁다면 1권과 4권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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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
아이작 아시모프 외 지음, 정영목, 홍인기 옮겨 엮음 / 도솔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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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보고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말 그대로 걸작이 줄줄이 실린 걸작선이건만 절판되어 한동안 구하지 못했던 그 책들이 아닌가. 하지만 앞에 '마니아를 위한'이 붙은 것은 섭섭하다. 이 안에 담긴 단편 중 3분의 2는 SF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읽는다 해도 감탄사를 발할 만한 글인 것을...

장편도 좋지만, SF라는 장르 최고의 묘미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촌철살인의 시원함이 아닐까. 여기 실린 20여편의 단편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수를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특히 좋아하는 소설은 어슐러 르귄의 특징이 너무나 잘 드러난 단편 '아홉 생명'과 에일리언의 원작 소설을 쓰기도 한 반 보그트의 '괴물'. 하지만 그 외에도 모두 훌륭하다. 너무나 통렬해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소 괴로워하며 읽었던 코니 윌리스의 '사랑하는 내 딸들아'나 날카로운 페미니즘 시각이 돋보이는 팻 머피의 '채소 마누라'같은 소설, 뛰어난 반전을 자랑하며 처음 읽었을 때 말 그대로 전율을 금치 못했던 필립 K.딕의 '두번째 변종', 장중하고 무거웠던 장편과 달리 유쾌한 렘의 '용과 싸운 컴퓨터 이야기'...... 즐겁고 따스한 '은하치과대학'이나 너무나 잔인한 상황이 설득력 있게 느껴져 읽고 나서 아연해졌던 '째째파리의 비법', 분위기가 나를 사로잡았던 '나는 불타는 덤불이로소이다'......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걸작 한권이 재판으로 나올 때마다 이렇게 기뻐해야 하는 SF팬의 처지가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고, 최근 필립 K. 딕의 단편선에 이어 이 책도 다시 나왔으니... 다른 책도 새로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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