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재 동문선 현대신서 41
아티크 라히미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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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때때로 고통은 녹아내려서 우리의 눈으로 흘러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말이 되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기도 하지요. 아니면 우리 안에서 폭탄으로 변해 어느 날 갑작스런 폭발로 우리를 파열시키기도 하고 말입니다......

80쪽 정도밖에 안되는 분량의 본문 뒤엔 아무런 해설도, 역자의 말도 없다. 2000년, 2001년에 프랑스와 캐나다의 여러 지면에 실린 리뷰와 인터뷰 번역이 실려있을 뿐. 아무 장식도 없는 편이 어울린다, 이 책에는.

무대는 말라버린 강을 지나는 다리 위. 노인과 손자가 주저앉아 탄광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다. 탄광에는 노인의 아들, 손자의 아버지가 있다. 노인은 이곳에서 기억 속, 꿈 속을 오가며 독백을 뱉지만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그 독백의 주어는 언제나 '너'다. 누구에게나 화를 내는 건널목지기를 피해 친절한 가게 주인에게 물을 얻으러 가면서 겨우 노인은 폭격으로 마을이 모두 불탔고, 아내와 며느리와 다른 가족 모두가 죽었음을 털어놓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아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러 간다고, 그러나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아이는 귀가 멀었고, 아직 자신의 귀멂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왜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 사라진 걸까 의문한다.

- 폭탄 소리가 굉장히 컸어요. 그 소리가 모든 걸 조용하게 만들어 버렸어. 탱크들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빼앗아 갔거든. 그것들이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가져가 버렸어요. 그래서 할아버진 이제 말을 못해요. 그러니까 이젠 날 야단치지도 못해.......

그리고 노인이 손자를 가게 주인에게 맡기고 탄광에 갈 때까지의 짧은 시간. 이 짧고 간결한 단막극 속엔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왜 전쟁이 났는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죽은 이들이 오히려 더 행복한 시절이라는 말만 몇 번이나 되풀이될 뿐. 그러나 이 글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에 대해, 아니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대해, 아니 보통은 잊고 사는 이런 세계만이 아니라 아예 눈에 띄지도 않았을 수많은 마을과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모든 전쟁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본문이 더없이 담담하고 꾸밈없었던 것만큼이나 글 바깥에서도 어떤 수식이나 분석도 쓸모 없어지는, 그런 진정성이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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