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시대 랜덤소설선 12
손홍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옛날 옛적에 사이좋은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오누이는 어머니와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매일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 떡을 팔았습니다. 여느 때처럼 어머니는 떡을 팔러 가고 오누이는 집에 남은 어느 날. 어머니는 떡을 팔러 가다가 몹쓸 호랑이를 만나서... 
(중략)
오누이는 나무 위로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호랑이는 기다렸어요.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오누이는 하늘에 기도를 했어요.
- 저희를 불쌍하게 여기신다면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어요. 오누이는 줄에 매달렸습니다. 그걸 본 호랑이도 똑같이 기도했지요.
- 미 투.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어요. 그런데 말이죠, 결말부터 말씀드리자면 셋 다 죽었답니다. 오누이는 매일 어머니가 장사를 하고 남은 떡을 처리하느라 고도 비만 상태였거든요. 뭐, 호랑이는 말할 것도 없죠. 줄은 둘 다 멀쩡했는데 서로 죽자사자 난리를 치는 통에, 안그래도 과적단속에 걸릴까 말까했던 줄은 뚝, 끊어지고 만겁니다.
The end.

모든 이야기는 여러분께 그럴 듯한 구라를 치고 있습니다.

귀신. 
죽었지만 죽은 것은 아니고, 산 것은 더더욱 아닌 구천을 떠도는, 형체 잃은 것들.
귀신은 필연적으로 어두운 음의 존재. 촛불과 등잔으로는 해소시킬 수 없는 그늘.
초를 켜 본 사람은 안다. 일렁이는 불꽃 뒤로는 어둠만큼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것을. 
우리네 과거는 귀신과 더불어 살던 시대였다. 전기가 들어오고 전구가 보급되면서 찾아온 빛의 시대 이전의 시기.
이 책은 그들의 시대이고, 시대는 서사다. 

S#. 1  - 이 귀신들은 말한다.
자자, 이 얘기부터 먼저 들어보드라고, 아따, 좀 기다리오, 나가 말하고 있지 않소,
어허, 내 얘기가 먼저네, 아니, 이것부터 시작을 해야 한단께요, 글쎄 이게 먼저...
예예, 알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죠.

미리 말하는 바이지만, 이 이야기는 끝이 없는 이야기이다.
낫을 든 영수네 아버지와 체육 선생의 뜀박질처럼.

이 책의 각 인물들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주 중요하다. 한 인물은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며, 그 다른 인물들은 바로 이 인물에 의해 정립된다. 이거, 그물망이다. 지금 세기에 이 말은 너무 뻔한 상투적인 말이 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귀신’’서사’다.

그 그물망의 한 지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본 궤도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점차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원경에서 근경으로 확대된다. 그 과정에서 우스꽝스러운 개인의 일대기는 괄호() 속에서 팔딱거리고, ’나’는 미신을 ’실험’ 한다.
이 모두는 귀신의 일대기이며, 사라져가는 그림자이고, 나의 여섯 번째 손가락이다.

S#. 글쎄? - 폭발적이고 숨가쁜 읍내 장면
나는 저수지로 들어간다. 
나는 죽는다?
물은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도 그렇듯이.
물은 양수다. 양수는 생명이다. 나는 물로 걸어들어간다. 물에 몸을 맡기는 것은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되돌아 나오려 파닥였다. 수면의 파문은 점점 거세어져 갔다.
나는 귀신이 되는구나. 물로 돌아가는구나.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발견됐다.
여섯 번째 손가락의 자맥질만 저수지에 남았다.

따식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 존재의 비루함으로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매순간 역설하고, 위태롭지만 존재하는 끈질긴 생명의 연속성을 증명한다.
뭐? 아니라고?
당신의 18대조 할아버지가 총각귀신이 되었다면 당신을 비롯한 앞선 17대의 삶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48대조 할아버지가 고자였다면 당신을 비롯한 47대조의 삶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당신을 이 시대의 사람이라는 존재로 현전케 하기 위해, 수천만 대의 생명이 끈질기게 이어져왔다. 그사이 단 하나라도 생명의 연속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다시 말해 대를 잇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지금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경외감.
귀신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현재까지.

이 소설, 존재가치,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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