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 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덜컹덜컹.
맹수의 숨소리 같은 규칙적인 쇳소리. 그것은 달릴때만 온전하다. 
온전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삶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다가온다.
깜빡이던 필라멘트, 하나, 둘, 셋과 동시에 팍, 하고 꺼져버리는 불빛.

그 이외의 모든 순간은 불규칙함과 혼돈의 결정체다. 
출발과 도착은 늘 불안정하다. 뒤뚱뒤뚱 커다란 몸뚱이를 뒤틀어 기지개를 켜는 출발과 제 속도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뒷걸음질의 도착. 비명처럼 문이 열리고, 짓뭉개지듯 밀리고 밀치는 살덩어리들까지. 

끼긱끼긱.
달리는 지하철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멀리서 환청처럼 들리는 것이기에 누구도 신경을 쓰진 않는다. 아니,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비명소리 앞에서 숙연해지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본다. 
검은 양말에 흰 구두를 신은 할아버지, 이어폰을 꽂은 채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젊은 여자, 과장된 몸짓으로 신문을 쫙쫙 펼치며 읽는 중년 남자, 발 밑에 무언가가 잔뜩 들어있는 비닐 봉지를 너댓개는 쌓아둔 채 졸고 있는 아주머니, 닌텐도 하나에 몽땅 달려들어 왁자지껄 소리치는 중학생들, 하모니카를 불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저쪽 칸에서 이쪽 칸으로 건너오는 할머니, 아마 다음 역에서는 단돈 이천원짜리 기능성 양말을 파는 남자가 타겠지.

Rewind 
"지하철에선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고."

Rewind
그는 지상과 지하의 어디쯤에 서 있다.
어디에 소속되어야 할 지 모르겠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유령처럼, 유령같은 사람들을 보고 듣는다.

우리는 모조리 경계에 서 있다.
우리는 모조리 배제된 채 산다.
우리는 모조리 소속된 척 살고 있다.

Fast Forward
유령은 어디까지나 유령일 뿐이라고. 지상을 낙원처럼 생각하는가 본데, 지하에서도 삶은 분명히 존재하는거야. 지상에서 당신이 하루쯤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당신의 자리는 금세 누군가에 의해서 대체될거야.
뭘 망설여? 이 지하에서 당신은 완전한 하나의 존재야. 
우리는 여기서 누구나 동등한 방을 가지고, 동일한 수준의 삶을 살아.
모든 남자는 똑같이 여자를 품을 수 있고, 모든 여자는 똑같이 남자를 고를 수 있지.
말해봐. 넌 뭐지? 
넌 누구야? 

덜컹덜컹. 
그건 농담이다. 지독한 농담.
매트릭스를 보고나서 내가 했던 말.
나도 배꼽이나 열심히 파 볼까. 혹시 알아? 거기서 엄지 손가락만한 벌레가 튀어나올지.

이게 꿈이라고 믿고 싶다.
아무렇게나 울리는 공중 전화를 붙들고 소리쳐야 한다.
나, 여기있어!

Fast Forward
절대로 지하철을 벗어나지 마라. 사악한 탐욕이 넘쳐나는 지상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당신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Fast Forward
나는 서커스에 와 있다.
저 상자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사라진다.
관객들은 열정적인 박수로 화답할 것이다.
쇼는 성공적으로 마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끼긱끼긱.
"어이, 일어나"

그건, 정말 지옥같은 악몽이었어. 아직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세상에,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하나,
둘,
호흡을 가다듬고,
셋.

Rewind
Rewind
Rewind


캠코더가 연결된 TV에서 화면이 켜진다. 복잡한 소리가 제멋대로 들린다.
거기엔 내가 있고, 아내가 있다.
"자, 여기보고. 그래그래,"
"안녕, 복잡하지만 너무 좋아. 당신과 이렇게 둘이 와 있으니까."
"으흠."
"다음엔 바다로 갈까? 너무 맑아서 에메랄드 빛이 나는 바다. 추워서가 아니라 햇살이 뜨거워서 옷을 입는 곳으로 말야. 침대에 누우면 창 밖으로 수평선이 보이는 그런 호텔에서. 거기에 누워있으면 바다 한 가운데에 누워있는 것 같을거야, 그치?"
"무섭지 않을까?"
"남자가 겁만 많아가지고. 그땐 내가 꽉 안아줄게. 행여나 파도가 쳐도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나 힘 엄청 쎄잖아."
"하하하!"

Rewind...







Fad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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