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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평점 :
막연한 믿음이 있다.
가령, 운전자 신호등에 붉은 불이 켜지면 더 이상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든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했을 때 그 폭력의 형태와 상관없이 가해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든가,
대한민국에서는 열여덟 번째 생일과 함께 찾아오는 투표권,
국가 대통령과 그 행정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의무는 모든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규칙.
그리고 법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들.
그 믿음이 과연 믿어도 되는가 하는 물음표로 뒤틀린 2024년 12월 3일 며칠 후, 나는 이 책을 펼쳤다.
교묘하고 탐욕스럽게 허점을 이용, 불공평한 법 집행, 선택적 집행, 법률 전쟁 등 법을 무기로 삼아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현상을 읽어나가는 동안,
대한민국은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이 구속되었다가 다시 석방되고, 그가 탄핵된 후 한국 헌정사상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대법관의 선거 개입 게이트가 열렸다
신문을 읽고 분노하고 뉴스를 들으며 마음을 붙드는 사이사이, 내 마음 같은 생각을 이 책에서 얻는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평화적인 권력 이양을 받아들이는 것.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다는 원칙.
극단주의 세력과의 동맹 거부.
그러나 또한 이 생각 앞에 얼마나 큰 오해의 벽이 자리 잡았는가 역시 읽는다.
어쩌면 지금이 아닌 2024년 12월 3일 이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대한민국에 대해서만은 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는지
투덜대고 화내고 불신하려 하지만, 그 어떤 세대, 그 어떤 나라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더 깊고 세련되게 발전해 갈 것이라 역시 막연하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문장 한 줄을 읽어가는 동안 나라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단주의를 묵인하거나 은밀하게 지원하는 정치인들이 나타나고, 한 줄을 읽어나가면 법의 틈을 교묘히 이용해 불법과 적법의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다시 한 줄을 읽어나가면 계엄 정도는 묻고 가자는 지지자를 목도하게 되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나라의 헌법은 하나씩 무너졌다. 권력을 놓칠 수 없는 기득권들은 법의 틈을 찾아 들어오고,민주주의의 외관을 쓴 채 소수 권력의 횡포는 활개를 펼쳤다. 그리고 새삼 책 속에서, 현실에서 소수가 너무나 큰 권력을 움켜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저자들은 집요한 서술로
군사 쿠데타에 암묵적 지지를 보낸 태국 엘리트들의 민주주의 포기,
민주적 외관을 유지하며 체계적으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킨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1960년대까지 시민권법, 투표권법 등 민주적 개혁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미국의 공화당이 2021년에 정확히 같은 법안 복구에 반대했던 일,
전 셰계를 경악하게 만든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경쟁자보다 적은 표로 당선되었던 사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지배'와 '소수 보호'라는 두 기둥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그래도 결국, 다수가 되는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지켜나가고 있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시 이 대목을 읽는 동안 대한민국 곳곳에 모인 시민들은
12월 3일, 그 어떤 유혈도 기물 파손도 없이 계엄을 막아낸 용기와
12월 7일 탄핵 기각에 '우린 뒷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단호한 선언,
남태령에서 밤을 함께 새우며 부른 노래의 위로,
새벽 눈에 갇혀서도 웃던 키세스.
이 모든 것들 안에 깃든 우아한 자제와 유머, 품위로 전쟁 같은 불합리와 싸워냈다.
그리고 여전히, 또
반다수결주의 제도들은 전제적인 극단주의를 뒷받침할 뿐 아니라,
정치적 소수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를 더 강화한다.
그럴 때, 정치적 소수는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제도에 대한 그들의 통제력을 더욱 강화한다. 정치 세계에서는 권력이 권력을 만든다. -P282
는 사례를 그대로 보여준 오늘.
"소수를 보호하는 제도가 특권을 가진 소수에게 부당한 이익을 제공하는 도구로 변질되었고, 이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위기를 초래"한 일이 우리 앞을 막고 있지만,
결국 시민이 할 것이고 시민이 해낼 것이다.
전혀 다른 대한민국에서,
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고, 약자도 함께 보호받으며, 권력의 폭력은 용인되지 않으며,
국가가 나를 보호한다는 믿음을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전세계 역사적으로 전무후무 철저한 헌법 시스템 안에서 내란을 진압하고, 단 한방울의 유혈도 없이 내란 우두머리를 몰아낸 사례를 만든 2025년 이후 대한민국은
소수는 결코 다수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오래도록, 내내.
"미국에서 정치적 소수는 민주주의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헌법 덕분에 다수를 계속해서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때로 다수를 지배할 수도 있다." - P16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는 소수의 지배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구가 극단주의자나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소수의 손에 들어갈 때 특히 위험하다." - P17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1)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2)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3)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 P78
"반다수결주의 제도들은 전제적인 극단주의를 뒷받침할 뿐 아니라, 정치적 소수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를 더 강화한다. 그럴 때, 정치적 소수는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제도에 대한 그들의 통제력을 더욱 강화한다. 정치 세계에서는 권력이 권력을 만든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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