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살짝 훑어본 내용은 어렸을 적 나의 모습을 추억할 수 있을 법한 책 갈피속의 사진들 주인공..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간 영희언니처럼 맑은 미소의 여자,
저기 멀리 섬에서 시집온 이쁜이 언니처럼 수줍은 모습의 여인,
이쁜이 언니와 함께 살던 종현이 오빠의 모습..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동네 굳은 일 마다 않고 일 해주시던 제비기아저씨(훗날 난 그 아저씨 이름이 주재복이었던것을 알게되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저씨라고 부르긴 했지만 라닥의 할아버지 모습에서 제비기 아저씨가 읽혔다.
그리고 어느 손녀를 안고 있는 할머닌 말 못하는 제비기 아저씨 부인...
이렇든 이 책을 대충 훑어본 나의 느낌은 나의 유년기를 추억할 수 있는 좀 편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겠다였다.
역시 책을 읽고 나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 우주의 생명체들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사는 모습들은 비슷한갑다...
그런데 라닥을 다녀와서 다시 읽은 후 느낌은 전혀 달랐다.
막연한 추억을 넘어 대안을 찾고 싶었다.
'우린 지금 체제에서 변화를 위한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것이다.
한 사회의 가치를 평가할 때 여러 요소가 평가 지표로 사용될 수 있겠으나
'그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과 그 사회가 지속 가능한가'가 가장 중요한 평가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이 책은 라닥의 전통 사회 모습을 설명하고, 그 전통사회가 변화라는 소용돌이속에 어떤 모습으로 위치하고 있는지, 그리고 미래의 라닥을 넘어 우리 지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3부로 이루어져있다.
1부 전통에 대하여는 우리의 어렸을 적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은 나는 어렸을 적엔 나를 포함 나의 부모들이 이 가난을, 현재의 환경을 되물림하지 않고 좀더 잘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잠을 더 적게 자면서 까지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라닥은 현재를 가장 숭고하고 열심히 살 뿐이다. 이미 나의 어렸을적은 1974년 라닥이 이제 막 개방된 시간대를 넘는 시간이어서 그랬겠다.
암튼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 환경부터 공부해나가는 모습은 지금 다시우리가 찾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로컬 푸드네, 지역 축제네, 그리고 지방자치시대등등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오래된 미래인듯 하다.
우리앞에 올 미래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에서 찾게 될 것이다라는...
단순히 친환경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걸 넘어서야 한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이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연의 한부분을 차지하는 동안
최소한의 것만, 그리고 최대한 그 자연환경을 해석해내서 생활양식을 찾아내는것이어야 하는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것들...
쪼라는 야크와 젖소의 교배종... 젖도 나오고 힘도 세고 가죽과 양모 털도 주는 쪼라는 야생동물을 생산해 낸것.
게다가 이 녀석을 아주 높은 곳까지 쉽게 올라다니며 풀을 먹을 수 있기도 하려니와, 비스듬한 산비탈에 비스듬하게 서서 풀도 뜯어 먹을 수 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척박한 환경에 정확히 부합하는 동물이다.
또 하나는 일처다부제..
아이들은 낳아야 부족이 유지되고, 척박한 환경에서 야생동물과 함께 몇 달씩 집을 비워야 하는 가정 시스템에선
한여자를 형제가 차지하기도 한다
이는 지금 중국 소수민족에게도 잔존한다.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여자만 알고 있을뿐.
누가 더 친절하게 대해주냐는 등의 서양인 질문은 그런 분별심 자체가 이상한듯 다시 되묻는 모습에선
문화의 상대성으로 설명이 가능하겠다.
우리의 시각으론 한여자를 사이에 두고 형제가 같이 자는 모습이 이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어렸을 적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자본 적이 있지 않나..
그것의 연장선으로 생각함 어떨까?
지금도 이누이트족은 손님이 오면 부인을 손님방에 넣어준다고 하질 않나
그들에게 섹스는 욕망이 아니라 욕구이다
자손을 번식해야하는..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나 간혹 심한 병(실제 간이 아팠던 여인에게 내린 처방이다)에 걸려 찾아간 동네 의사 왈
섹스를 강하게 하라 는
우리의 시각으로 섹스를 이해하면 안되는것이다.
아튼 이렇게 이들이 공동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저엔 불교 생활의 양식이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 공 철학은 깊은 사유와 경험을 결합 할 때만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요. 그래도 간단히 설명해볼게요. 어떤 대상 나무를 예로 들어볼게요 당신은 나무를 다른 사물과 구분하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나무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단계에 도달하면 그 나무는 독립된 실체가 아닌것이 됩니다. 대신 그것은 관계의 사슬 속으로 놀아들어가는 것이지요.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그것을 흩날리게 만드는 바람, 그리고 그것을 지지해주고 있는 토양등 그 모든 것이 나무를 구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ㅇ로 우주 만물이 바로 나무라는 존재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인 것입니다. 가각의 존재는 절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 그 본질은 결코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변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공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각각의 사물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불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로 염세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행복을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감각과 선입관에 의존하는 세상의 경험으로 사물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일상세계 너머의 영속성을 못 본다. 계속 그런 무지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우린 존재의 굴레속에 갇혀 버리게 되는것이다. 불교는 우리에게 세계의 실체를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시각을 바꾸라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숨을 쉬기 위해 공기를 필요로 한다. 중요한 문제는 과연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이다. 감각기관에 의해 인지된 세계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종류의 빛을 통해 바라보라는 것이다. 부처는 우리가 감각과 한계성에 의해 만들어지 이 세상 너머에서는 현상의 세계가 역동적인 변화속으로 녹아들어간다고 가르쳤다. 현실의 진정한 본성은 언어체계와 선형적 분석 체계 너머에 존재한다.
" 존재를 믿는 사람은 소만큼이나 어리석다. 하지만 비존재를 믿는 사람은 그보다 더 어리석다. 사룸이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둘 다인것도 아니고 둘 다 아닌것도 아니다. "
우주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전체성과 단일성은 변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강물은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 흐름을 멈추거나 관찰 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는 움직이 속에 존재하는 동시에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다
" 모든것은 연기라는 법칙에 따릅니다. 나가르주나가 말한 것 처럼 관계로부터의 기원이야말로 부처님의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바로
이 단계에서 우리의 범주와 특성과 너와 나 혹은 정신과 물질 같은 경계는 사라지고 모든것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는 겁니다. 나무의 본질이 공인것 처럼 자아의 본질도 공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당신 주변에 있는 모든 거의 한 부분으로 놀아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아라는 것은 우주에 있는 다른 사물들로부터 분리된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다는 착가은 아마도 깨달음에 이르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분리된 자아와 분리된 사물에 대한 관념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찾던것을 얻는 순간 그 빛은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다. 만족스렁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고 아주 짧은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헬레난 노르베리 호지가 라닥 인과 직접 이야기 내용을 책에서 옮겨 적었다.
따옴표 안이 락닥인의 설명이고 그 외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설명이다.
불교에 대한 공사상을 이보다 더 정확히 날 설득한 귀절이 없어서 그대로 옮겨 적었다.
이렇듯 생활 속 모든 면에 스며든 불교의 공과 인연사상이
라닥인을 행복한 모습으로 만든것이다.
2부는 변화의 모습이다. 서양인들이 들어오고 자본이 들어오고, 돈이라는 경제속에서 살게 강요되고 요구받고, 그러면서 공동체가 분열되는 모습... 왜 그러지 않겠는가?
사람이 변하기 시작함 여반장처럼 쉬운것을... 편하다는 달콤한 유혹을 떨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자본은 가만 놔두질 않지.
빚이 많아 매달 이자를 내면서도 또 다시 빚을 내서 집을 사는 나의 행태를 봐도 돈이란 유혹에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금 이시간 자금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말이다. 고장난 폭주 기관차인줄도 모르고 모두들 타니 그냥 탄다..
안타면 나면 손해볼 것 같아서..
세상 이치가 이런가보다.
그럼에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3부에서 흑백논리는 없다면서 서로가 좋은 정책을 쓰도록 유도한다.
집을 지을땐 라닥의 풍부한 햇살로 난방이 가능하게 큰 이중 유리를 달게 한달지,
글자를 배우고 익혀 기록으로 남기기를 요구한다는등
라닥 프로젝트를 제시하면 미래로 나아가자고 한다
라닥 여행중에 만났던 선한 남자들의 눈빛과
수줍게 웃던 여자들의 미소가 지금도 강한 잔상이다.
돈이 좋지만 결코 돈때문에 이런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와 당신네들은 이 우주에 같이 사는 자매이고 형제이니
제가 가진것을 나눠주고 제가 가진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돈 역시 변하고 나 역시 당신네들 역시 변하니
지금 이렇게 만나 인연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이렇게 그리워 하는 정도는 바다를 향한 것 만큼 강하다...
믿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날을 세우고, 냉정한 지금의 내 형편에
따뜻함이 고파서 그런가보다.
이 책 어서들 읽어보세요.
읽는 동안은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밀려들겁니다.
읽은 후엔 삶에 자신감이 생길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