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하는 공감은 화살이 된다
유원의 어릴 적의 트라우마는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지만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줬던 화재 사건이었다.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기에 모두의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의 경험자가 아닌 관조자의 입장에서 말해지는 사건은 그 화재로 상처받은 유원에게는 또다른 화살이 되었다.
매체가 발달한 만큼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일도 우리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가지 사건을 접하는 우리는 종종 공감이라며 사건을 쉽게 말하고, 공감이란 명분 하에 사건을 하나의 컨텐츠로 소비하기도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사건들이 어떤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지우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기사에 남아 있는 댓글들은 뭐랄까,
너무 해맑다고 해야 하나.
기분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인생에서 그런 드문 사건을 겪었다고 해서, 누구도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 내면의 상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도 복잡한 것은 아니다. 해결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감정선은 어렵다가도 어느 순간 쉬워진다.
이 장편 소설이 한 아이의 외로운 상처를 다루면서도 따뜻함을 주는 이유는, 그의 상처의 치유책은 결국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사람은 상처를 입히는 존재인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는 존재이다.
소설의 결말은 건강하다. 유 원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딜레마를 그만의 건강한 방법으로 극복하며 한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람직한 성장 소설이다.
막상 배가 든든해지니 비참하다는 생각이 더 이상 안 들었다.
평화로움의 기준
이 부분에서 멈춰서는 오래 생각했다. 결론짓기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평화로움의 기준이 무엇일까. 나에게 평화는 행복이나 슬픔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가라앉은 행복이나 슬픔과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행복이나 슬픔보다 기준을 확립하기 어려움이 있다.
평화를 생각하면 '무해함'이 떠오른다. 내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은 나에게 무해한 것이다. 내가 동경하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게 무해한 사람, 평화를 주는 사람.
나는 평화로움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옥상에서 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