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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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마침내 문명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는 순간을 소설로 쓴다면 바로 이런 소설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헤아리기 힘들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일테지만, 한 가족과 한 시대로 압축해 '소설'이라는 도구로 정리해본다면 말이다. 그렇게 인류 진화의 결정적 '과정'은 이 소설 속에서 거의 '순간'이 된다.

여기까지 적고보니 뭔가 심오한 소설같지만, 이 책의 띠지에 쓰여있는 "지난 50만 년 동안 나온 책 중 가장 재미있는 책이다!"라는 문구처럼 이 소설은 매우 재미있는, 말하자면 술술 읽히는 소설이다.

아마도 원제인 'The evolution man'의 그 사람은 에드워드일 것이다. 원시시대 초유의 과학자, 빨리 진화하고 싶어 안달이 나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하는 그. 그는 마침내 불을 다루게 되고, 가족 내 결혼을 금지시킴으로써 가족단위에서 부족단위로의 성장에 기여하기도 하고, 그 아들들을 통해 원시예술이나 동물 길들이기의 시작을 지원하기도 한다. 맹수가 만물의 영장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이 마침내 나무에서 내려올 용기를 내었다는 것 만으로도 놀라운 도전이었을 것 같다.

이러한 도전들이 늘 성공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을 마다하며 과거의 삶을 고집하는, 그의 형으로 대표되는, 이들도 있다. 다시 나무로 돌아가 유인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형은 에드워드의 태도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앞서 말했듯 재미있게 읽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시인들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아니다. 이처럼 진보를 지향하는 이들과 보수를 지향하는 이들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각기 다른 재능과 성격을 가진 이들이 모임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경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고, 새로운 과학기술들(불을 다루는 능력 혹은 새로운 형태의 사냥무기 개발과 같은)이 진전을 보이면서 첨예한 가치충돌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기술독점'의 문제이다. 평소 이러한 부분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신중하면서도 긴급하게 다루어져야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일이 있어서 관심을 더 집중해 읽어나갔다. 이 문제는 결국 책 띠지 뒷쪽의 카피문구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 How I Ate My Father / 이것은 1만 년 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불과 발전된 석기 기술을 나누어 모은 인류가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아버지, 그렇다면 불을 만드는 비법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려줄 거라는 말인가요?"

아버지가 날 쳐다보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불을 독점하고, 기술의 대가를 받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결국 아들 어니스트(이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다)는 "아버지에게 도전했고, 논쟁에서 이겼으며, 나머지 가족들을 편으로 만들어 아버지를 고립시켰다." 그렇지만 아버지 역시 쉽게 뜻을 굽히지는 않았고, 그것은 결국 교묘한 사고로 위장된 부친살해로 이어지게 된다.

진보의 역사가 결국 이전 세대를 넘어뜨리지 않고는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일지, 진보와 진화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게 아닐지, 오늘날의 새로운 기술들이 정말로 온 인류를 위한 축복이 될 수 있을지... 재미있게 읽은 압축된 진화 스토리는 흥겨움보다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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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도쿄행 -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유람기
이상 외 지음, 구선아 엮음 / 알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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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20년대 세계 곳곳을 다녀온 조선인들의 기록들을 엮은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본다면 그다지 오래전도 아니지만, 그 시절에 대해 배운 것도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게는 아득히 먼 시대처럼 느껴진다. 국사 시간에 비교적 꼼꼼히 배웠던 조선시대가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사에 대해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에는 정말 허술하게 배우고 넘어갔던 것 같다. 그래서 최근에는 조금 가볍게 당시의 시대를 보여주는 책들에 가끔 찾아 읽곤 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당시 여러 이유로 세계를 다녀온 이들, 여섯 명이 쓴 것으로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던 것들이다. 제목 속의 이상은 이 책에 글이 실린 작가의 이름 李箱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삶을 의미하는 理想, 이렇게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렇게나 느린 교통수단과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세계 곳곳으로 떠났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하지만 걸어서만 다니던 근대 이전을 생각한다면 철도와 연락선은 근대를 상징하는 대단한 속도였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들의 대담한 여정을 쫓으며 책을 읽다보면 '속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무엇을, 어떻게 행하고 느꼈는지가 훨씬 중요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더이다'와 같은 표현처럼 예스러운 어투들이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광수, 이상과 같이 잘 알려진 이들도 있었지만, 최초의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도 활동했지만 북한으로 넘어갔기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허헌, 납북된 독립운동가 박승철 같은 이들도 있었고, '교사'라는 짧은 소개만이 붙어있는 이도 있었다. 서로가 다른 이유로, 조금씩 다른 장소에 다녀온 이들은 당연히 조금씩 다른 스타일로,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사진기 없이 다니는 여행,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낯설고 새로웠을 풍경들을 온전히 말로 풀어썼던 여행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이전에 알고있는 단어들만으로 묘사하는 일이야말로 창의력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 그를 가옥의 대삼림 지대라고나 설명할까, 그 외에 다른 해설의 말을 나는 못찾겠고 ... 자동차가 까만 박개미 떼같이 늘어선 것과 해륙에서 울리는 쇠망치, 기적소리 등 동원령이 내린 전쟁지대가 아니면 상상도 못하리만치 복잡, 다단한 폼이 졸한 내 붓끝으로는 그려낼 재주가 없는 것을...

허헌은 샌프란시스코 시가를 소개하면서 이처럼 쓰고 있다. 제법 훌륭하지만 본인은 보이는 것을 더 잘 표현할 수 없는 점이 조금쯤 답답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다뤄지는 소재나 감상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연락선이 출발하는 곳의 풍경에 대한 것이다. 환송하는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고, 눈물로 이별을 고하는 이들의 모습 등등이 묘사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일이 드물었고, 아픈 사연을 안고 떠나는 경우도 많았을테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 같다. 또 한가지로는 중국인들을 가여이 여기는 시각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과 모욕 속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던 중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언급되어지고 있었다.

... 매우 속이 불편하였다. 그네가 왜 그리도 염치를 잃었는가. 그네가 요순과 공맹을 가지고 ... 5천년의 문화를 지닌 국민이 아닌가. 그가 어찌하여 손해를 천성보담 더 두려워하게 되고 내 집에 기류하는 자에게 도로 수모를 달게 여기게 되었나.

이광수의 중국 체재기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글은 교사 성관호가 일본에 다녀와서 쓴, 길지않은 글이었다. 당시 그가 일본에 가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글들은 예사롭지 않은 예리하고도 정확한 시각으로, 우리가 그들의 어떤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지, 또 어떤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지를 싣고 있었다.

그들의 민족성의 단기협에는 대외적으로는 여러 가지의 반감을 매하는 해악됨이 불무하나 대내적으로는 잠점 되는 것이 불무하니 즉 자국을 위하는 모든 일에는 일시의 희생을 불구하고 능히 공동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네가 모든 인류와 협동하여 세계적으로 나아갈만한 성과 덕을 가지지 못한 것은 물론이나 자국 자민족의 보호에는 능히 감내할 것이다.

그의 일본 체류기 뒤쪽에 나오는 이 글은 지금의 일본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해설이나 설명을 통해 한 시대를 배우는 일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그 시대를 담고있는 텍스트를 직접 읽으며 스스로 여러가지를 궁리해나가는 일도 좋은 역사공부인 것 같다. 책을 읽어나가며 그 시대의 인물들과 간접적이나마 교감을 나누는 느낌, 그들과 조금쯤이나마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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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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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 누구라고? 나만 처음 들어보는걸까? 일단 읽어봐야겠다! 곧바로 장바구니에 담긴 책은 <태고의 시간들>이었다. <방랑자들>이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왠지 제목이 더 끌리는 <태고의 시간들>을 먼저 읽고 싶었다.

이름의 발성조차 낯설게 들리는 올가 토카르추크는 폰란드 작가로 심리학과 문화인류학, 철학을 공부했고 '신화와 전설, 外典, 비망록 등을 차용해 인간의 실존적 고독, 소통의 부제, 이율배반적인 욕망 등을' 포착한다고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 소개글이 매우 적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내용이 바로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신화 전설, 외전, 실존...

폴란드의 한 신화적인 마을 '태고', 그 '곳'은 허구적 공간이지만 현실을 피해가지 못할 만큼은 실재하는 공간이고, 그 곳의 '시간'은 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담고있지만 역시나 현실을 피해가지 못할 만큼은 우리와 나란한 시간이다.

그 곳에 깃든 모든 생물(인간군상, 개..)들과 무생물(그라인더, 게임..) 들의 삶과 죽음과 영원을 작가는 조금은 비장한 느낌으로, 조금은 연민을 담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신, 천사의 경우는 생물에 넣어야할지 무생물에 넣어야할지, 잠시 혼동이 든다. 불멸하는 생물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태고에 깃든 것들의 '시간'을 주체를 바꿔가며 짧게짧게 쓴 많은 조각들이 모여 커다란 서사가 완성되는데, 각각의 조각들은 그들만의 깊이와 광채를 지니면서 동시에 다른 조각들과 얽혀있게 된다. 이런 부분에서는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금'의 시대에, 어떤 작품에 대해 이른바 賞이라는 걸 준다면, 바로 이런 작품에 주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지금'의 우리가 고민하고 의심할만한 모든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태고'는 한 시대, 한 국가(폴란드)의 시간이 아닌 '지금'의 모든 공간을 품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서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인 것 같다. '나'를 뺀 세상, '지금'을 뺀 시간은 어쩌면 주변부이고, 배경일 뿐이어서 내가 사라지는 순간 동시에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책이 이야기하듯이 여기서 '나'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 모든 무생물일 수 있다. 만물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세계 경험이 있고, 그러므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런 사고의 흐름 속에서 '시간'을 보는 특별한 경험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해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원하는 것들은 늘 충돌한다. 불변과 불멸을 원하며 동시에 변화를 원하고, 타인을 필요로 하면서 타인이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평화를 원하지만 스스로 전쟁을 만들어 자연과 신의 개입없이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 것 같다. 이런 부조리함과 충돌이 에너지가 되어 인간의 삶이 움직이는 것도 같다. 그것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각가의 인물들의 시간은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그 중 이지도르의 죽음 앞에서 크워스카는 이렇게 말한다. "크워스카는 이지도르를 향해 몸을 숙이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세상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얼른 떠나렴. 다시 돌아오라는 꼬임에도 절대 넘어가선 안 돼.'" 우리는 농담처럼 '이번 생은 망했도, 다음 생에...' 운운하기도 하는데, 솔직한 나의 심정은 크워스카의 조언처럼 절대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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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과정에 수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쁜 인간은 결국 숲에 왔던 애초의 그 남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쁜 인간은 이미 그 자신이 아니었고,...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드는 것처럼, 망각은 다른 '나'를 만드는 것일까?)

...은 상속자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뭔가가 변화하고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모든 것은 발전한다는 확고한 믿음, 모든 종류의 낙관주의는 결국 청춘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만은 어쩌면 '문명' 이후에 비로소 일반화된 것이 아닐까?)

사물은 시간도 움직임도 없는 다른 현실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단지 그 표면만 드러나 있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나머지 속에 물직적 대상의 의미와 본질이 숨겨져 있다.

(생물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을만큼 미세한 닮아짐만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 무생물의 삶일까?)

인형처럼 조그만 미시아의 옷가지들은 항상 미하우를 뭉클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빨래줄에 걸려 있는 옷가지들을 보니, 시간이 이토록 빨리 흐르고 있음에 분노가 치밀었다.

(시간의 흐름에 '분노'하는 지점은 모두 다르겠지? 아이가 자라는 것이 뿌듯하기만 한 부모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여행의 일종이다. 여행길에서 가끔 선택의 기회가 나타날 것이다. 선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게이머는 때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하리라.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마저 없다면 너무 슬프겠지?)

카인이 벌판에서 아벨을 만났다. 그가 말했다. "법도 없고, 법관고 없어! 저승도 없고, 정의로운 자를 위한 상도, 악한 자를 위한 벌도 없지. 이 세상은 신의 자비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연민으로 다스려지지도 않아. 그렇다면 어째서 네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내 제물은 내쳐진 거지? 대체 죽은 양 따위가 신에게 무슨 소용이라고?" 아벨이 대답했다. "내 재물은 받아들여졌어. 나는 신을 사랑하니까. 네 제물은 버려졌어. 너는 신을 증오하니까. 너 같은 인간은 애초에 존재해선 안 돼." 그리고 아벨은 카인을 죽였다.

('게임 설명서' 중에서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곳엔 아벨의 후예들이 살고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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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문화사 -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아리 투루넨.마르쿠스 파르타넨 지음, 이지윤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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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쟁과 정치를 중심으로 한 역사,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교과서로는 정작 궁금한 것들을 알기가 힘들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인간 개개인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러한 크고작은 과거의 유산들이 오늘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과 어떻게 이어져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요즈음은 다양한 렌즈를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있어, 학창시절 암기과목 이상이 되지 못했던 역사, 특히 세계사를 재미있게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미술을 통해서, 사물을 통해서, 진화 심리학을 통해서 등등...

이번에 읽은 <매너의 문화사>는 인사, 건배와 같은 정말 사소한 우리의 행동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변화되어 왔는지를 재미있게 쓰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양식들이 특별히 '매너'라는 이름으로 반쯤 강요되어지고 있는 부분들도 흥미로웠다. 뭔가 본능적일 것만 같은 비언어적 소통 언어들이 사실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적 행위, 나름의 문명화의 결과이고 이로써 어쩌면 본능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행위인 것도 같다. 동물적인 목적이나 생존의 목표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느새 이성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온 행동 규범이 또한 '매너'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작가가 책 앞 부분 '매너의 시작'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좋은 매너가 선한 마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너의 진짜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성문에 암살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중세 기사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레이디 퍼스트'인 것처럼 말이다.

책은 모두 9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몸가짐과 바디랭귀지, 인사법, 식사예절, 눈물과 웃음 등등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절'에 대한 여러 책들이다. 매너가 있게 한 산파와도 같은 책인 1530년 에라스무스가 쓴 <어린이들을 위한 예절 핸드북>을 시작으로 이후 온갖 예법서들이 유행했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오늘날 각종 자기계발서들이 출간되고 있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소위 '예절'들은 왕가에서 시작해 귀족으로, 다시 부유한 시민계급이나 성직자들을 거쳐 점차 모두의 행동규범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너라고 생각하는 행동 중 상당 부분이 중세 유럽의 궁정 귀족과 교육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 그 당위성을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한다고 말이다. 어쨋거나 유럽의 문화가 세계가 공유하는 문화가 되고, 살아남은 다른 문화들은 지역적인 유산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우리는 오늘도 중세 유럽 귀족에서 시작된 '매너'를 지키는 것으로써 문화인인 양 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대 이래 시대에 따라 '모범적이 행동거지'의 기준은 대체로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시대와 지역을 포괄하는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제국에서는 유유자적한 걸음걸이가 자유 시민의 특징으로 제시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네 양반 걸음이 떠오르기도 했다. 비가 와도 휘적휘적 걸었던 양반네들 말이다. 2천 년 쯤 지나 쓰여진,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예법서에서는 걸음걸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있다고 한다. "걸을 땐 너무 서두르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걷지도 말라. 빨리 걸으면 성급해보이고 천천히 걸으면 게으르거나 유약해 보인다.". 최근의 책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건강하려면 속보로 걸으라고 말이다. 변하지 않는 것 중 또 하나의 재미있는 예시는 미국 대통령의 큰 키이다. '심리학자인 그렉 머레이와 데이비드 슈미츠는 물리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지도자를 선호하던 원시의 가치관이 현대 선거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신언서판'이라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강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외모에 대한 지향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른손을 들어보이거나 악수를 함으로써 손에 무기가 없음을 보이는 다양한 인사법들은 원래 안전장치이자 폭력방지책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실 '국가'에 의해 폭력이 독점되기 이전의 삶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점철된 것이었으니, 자신이 적이 아님을 매번 증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좋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서로를 칭찬하고 친절을 베푸는 문화도 서유럽 궁궐에서 의례적인 말로 동질감을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18세기 런던과 파리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런 인사치레는 오늘날 무해한 말들, small talk라 불린다.

식사예절에 대한 부분도 새롭고 흥미로웠는데, 유럽과 중국의 차이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중국에서 칼은 이니 오래전에 식탁위에서 사라지고, 모든 요리는 '커튼 뒤에서' 작업을 마치고 식탁으로 날라져 온다. 그러니 칼을 들고 식탁에 앉는 유럽인을 그들이 야만인이라 부른만도 한데, 이는 유럽의 상류층이 전쟁을 일삼은 기사들이었던 반면, 중국의 상류층은 지식이 많은 평화로운 기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쓰고 있었다. 일찌기 武보다는 文이 앞섰던 동양의 문화적 특질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소위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일탈'에 대한 사회적 처벌도 강화되고 있다. 예전이라면 그저 부끄러워하거나 미풍양속을 어겼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정도의 일도 오늘날은 '변태적인 행도'으로 분류되고 병리학적인 해석을 거쳐 정신병원으로 격리되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부분은 보다 안정되고 안전한 공동체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평균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남의 고통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는 적어도 직접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런 짓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작가는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여전히 이런 역할을 하며, 타인의 위험과 고통을 상업적 경쟁의 도구로 삼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쉽게 몇몇 프로그램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웃음은 그렇게 광기와도 연결되는 것 같다. 길에서 우는 사람보다 혼자 웃고있는 사람이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여러가지 점에서 '웃음의 매너'는 함께 생각해 볼만한 문제인 것 같다.

맺음말에서 작가 스스로 쓰고 있듯이 "풍속 문화에 관한 역사는 항상 훌륭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충분히 재미있었고, 당연하게 보이는 것에 대해 다시 보고 의심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의 폭력성과 어리석음이 점점 억제되는 쪽으로 변화되어 왔지만, 요즈음은 이러한 부정적인 본래적 특성들이 점차 인터넷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 세상이 점차 확장되어간다는 점에서 디지털 '매너'에 대해서도 더 많은 논의와 변화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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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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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제목을 보고 다윈과 비글호를 떠올렸다면 정답!?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작품을 통해 촌철살인의 유머와 풍자를 선사하는, 그래서 미국에서는 블랙유머의 대가로 칭송받는다는 커트 보니것의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다윈과 비글호'와 그리 먼 곳에 위치해 있지는 않다. 바로 고립과 진화를 소재로 삼고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자신다운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재미있고 또 재미있다'는 것이 될 것 같다. 어떤 추리물이나 스릴러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고 게임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커트 보니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과 이후 인류의 생존, 진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백만년 후의 인간이 1986년, 인류가 새로운 시작을 맞게되는 시점에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지켜보고 서술하는 방식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제1부 '이야기의 전모는 이러하다'에서는 세계가 심각한 경제위기에 봉착해 있고, 알수없는 바이러스가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 에콰도르 엘도라도 호텔에 모여든 사람들이 갈라파고스 섬에 고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갈라파고스로 향하는 '세기의 유람선 여행'의 표를 지닌 이들은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채 이 곳에 모여 바이아데다윈호의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여행을 신청할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닥치리란 것도, 또 그 유람선이 항해하기로 되어 있는 때에 에콰도르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게 되리란 것도' 알지 못했다. 모인 이들 중 일부는 출발 전에 죽음을 맞고, 초대장 없는 몇 명이 우연히 탑승하면서 갈라파고스를 향해 떠난 이들은 이후 새로운 아담과 이브가 되어 인류의 멸망을 막고 고립된 환경에 맞추어 새로운 진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제2부 '그리고 그 배는...'에서는 이들이 출항 후 온갖 어려움 끝에 섬에 도착하고 어떤 식으로 새로운 세대를 출현시키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 속에서 작가가 현 인류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너무 큰 뇌'이다. 너무 큰 뇌 때문에 오히려 생존에 불리하다는 점,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도 결국 한번에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하나의 뇌 속에서 서로 상반된 생각이 공존하기 때문이라고 거듭거듭 언급한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들 자신의 문제를 시니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1986년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상황이 나빠지고는 했다. 너무나도 많은 거짓말이 오가고 있었던 탓에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를 믿지 않았다.

거대한 뇌가 일으키는 각종 성격 장애가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공격한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정말 공감이 갔다.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하고, 타인의 (감정적이거나 육체적인) 고통에 둔감한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우리 역시도 점차 그런 이들에게 둔감해져가고 있다는 생각조차 든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인간의 그런 나쁜 행실에 대해 쓰려니 백만 년 뒤인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백만 년이 지났지만 나는 인류를 대신해 사과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니까.

어쨋거나 사건들은 나름 매우 긴박하게 진행된다. '백만 년 뒤에 영향을 끼치게 될 여러 사건들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지구상의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초조하게 배의 출항을 기다리며 읽다가, 배가 출항하고나면 다시 초조하게 배가 육지에 닿기를 기다리며 읽다가, 배가 도착하고나면 다시 초조하게 다음 세대의 출산을 기다리게 된다. 아니면 백만년 후의 인류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백만년 후의 인류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아주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작가는 수시로 이들에 대해 언급한다. 뇌는 작아지고, 두 팔은 지느러미가 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체취로서 구별하고, 식인 상어 덕분에 더이상 노인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고, 등등등

아마도 처음 생명체가 활동했던 바다로 다시 돌아간 모양이다. 물고기 비슷한 몸에 사람을 떠올릴만한 부분은 어디쯤에, 얼마나 남아있는걸까. 바다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다시 바다로 돌아간 인류의 변화를 '진화'라는 이름으로 부르는게 맞을지, 아니면 '퇴화'? 알쏭달쏭한 의문을 가지며 책읽기를 마쳤다.

이 소설의 본질과는 떨어져있는 얘기지만,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조상탓'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현재의 문제 중 과거에 뿌리를 두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사태에 책임 혹은 공과를 물어 올라가다보면 결국 모든 책임은 최초의 단세포 생물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빅뱅에게 책임을 물어야할수도 있다. 모든 종류의 우연에 경의를 표하고,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신뢰를 보내며, 현재의 '나'에 대한 책임을 '나'로 환치시키는 일은 진정한 용기일거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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