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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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찍한 집에 작은 정원, 엔티크 가구들, 사랑스러운 반려동물, 천천히 음미하는 정찬 디너코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온갖 이미지들을 모아 이상적인 삶이라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서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는 '문득' 떠난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완벽한 궤도 이탈'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이러한 삶의 지향에서 1만 광년쯤 떨어진 곳에 서있다.

그 시작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작가는 아사히 신문 기자였다. 그날 이후 자신이 쓰는 전기량에서 원자력발전소 공급량을 뺀 만큼 전기소모를 줄일 결심을 하는 것에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었고, 현재는 월 150엔의 전기요금을 내며 최소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도전은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책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이다.

첫달에는 전등 하나를 끄고, 전원 코드를 빼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전기요금은 거의 줄지 않았다. 여기서 작가는 '파나소닉'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마쓰디타전기가 경비 절감을 위해 전기요금을 10퍼센트 줄이자는 목표를 세웠다. 좀처럼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간부들이 모여 이러쿵저러쿵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고노스케 씨가 한 말
"알겠습니다. 그럼 목표를 바꾸죠. 10퍼센트가 아니라 50퍼센트 절감으로 바꿉시다."

그렇다. 전에 <와일드>라는 책에서 비숫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한발짝도 걸을 수 없어서 뛰기 시작했다는... 발상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이제 작가는 없으면 안될것 같았던 가전제품을 하나씩 없애기 시작한다. 사실 우리가 필수품이라 부르는 것들 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있어서 편리한 물건이 어느새 당연히 있어야하는 것으로 변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청소기를 버리고, 이어서 전자렌지를, 냉난방 용품을 버린다. 하나씩 버릴 때마다 작가 특유의 멋진 '사유'가 깊이를 더해가니, 버리기의 철학, 無의 美化라고나 할까.

  "아무리 혹독한 추위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다가오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나는 처음으로 봄이라는 계절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감각이었다. (중략) 냉난방 기기에 의지하다보면 더위는 그저 '더위', 아무런 변화 없는, 물리쳐야 할 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익숙해져버리면, 누구도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미묘한 다름에는 흥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어 가장 크게 망설였던 냉장고 버리기, 나 역시도 전기없는 생활을 상상하다가 '역시, 냉장고때문에라도 불가능해'라고 생각했었다. 그야말로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기어코 냉장고 버리기를 실행한다. 이로써 동시에 장보기의 즐거움도 빼앗겼다고, 언제나 '지금'을 살게 되었다고 무소유의 철학이 이어진다.

  "나는 지금, 미래(앞으로 쓰게 될 식재로)도 과거(사서 냉장고에 넣어둔 식재료)도 없는 날을 살고 있다. 사실 따분하기는 하다. (중략) 이상한 얘기지만 나는 냉장고를 졸업하고 나서 음식을 상하게 한 적이 거의 없다. 필요한 것만 사니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사실 냉장고가 클수록 더 많이 보관할 수 있지만, 더 많은 음식물이 상해서 버려지는 아이러니가 상존하다. 그러고보니 미래의 식재료를 지금 사고, 과거의 식재료를 지금 먹고, 그로써 진정한 '지금'을 훼손하는게 냉장고라는 물건의 본질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인생 역시 이런 꿈 저런 꿈을 그러모아 한자리에 방치한 다음, 조금씩 상하게 만들어온 건 아닐까?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실 '냉장고'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물건으로서 여러 사회심리학자들의 일종의 연구대상이었고, 관련된 책들도 제법 나와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냉장고 속만 사진을 찍는다는 사진작가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다. 24시간 문을 여는 마트가 있고, 집에는 또 거대한 냉장고가 있고, 결국 먹고 사는게 뭔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버린다. 욕망과 욕망이 아닌 것의 경계도 애매해지고, 나아가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점점 알수없게 되어버리고, 그래서 막연히 불안해지고... 결국 작가는 냉장고를 없앰으로써 폭주하던 욕망이 급정지했다고 쓰고있다.  다만 음식으로 끝나지 않고 이제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핫한 키워드 '미니멀'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기없는 생활로 나아가는 그녀의 길과 사유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필요와 욕망의 문제를 되돌아 보게 된다. '언젠가 쓸 것들'이 넘쳐나고, '지나간 추억'들 역시 넘치도록 쌓아두고, 그리고도 매일매일 뭔가 사야할 것들, 사고싶은 것들이 무수하다. 이런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물론 아직 냉장고를 버릴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말이다.

이제 그야말로 최초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욕심을 비우다보니 타인의 행복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더이상 비교의 대상도 아니고, 나를 평가하는 사람도 아니게 되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당연히 전기를 대신해 몸을 더 많이 움직여야 하는 생활이자만,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마음만은 홀~쭉한, 홀가분한 생활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가전제품이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이야기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건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얽매어 살아가고 잇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더 편리한 가전제품을 사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도 아니다. 좀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바꾸는 것,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버리기보다는 사들이고, 움켜쥐는 일이 더 쉽게 느껴지지만, 진심으로 이러한 생활방식이 부럽다. 응원을 보내고 싶다. 회사를 그만두고, 냉장고를 버리고, 씩씩하게 자신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용감한 그녀의 생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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