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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이런저런 경로로 꽤 오래 전부터 귀에 익숙한 작가, 배명훈. 내게는 까닭없이 베일 뒤에 숨어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던 작가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소설을 읽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뭔가 선입견을 주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을 힘껏 잊어버리며 첫 장을 펼쳤다.
'과거'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 '역사'에 대해 우리는 꽤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낸 것들이 과거라는 축적된 총량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일부분일 뿐일 것이다. 이 책이 상정하는 고고심령학자들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과거의 조각들을 살려내는 이들이다. 혼령을 보고, 그들을 직접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으로 말이다.
고고심령학 / 고고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심령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츠정해 역사 연구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해주는 학문.
물론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학문이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만큼 직접적인 역사 연구방법도 없을 것이다.
소설은 서울에 갑자기 나타난 검은 성벽의 미스테리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빙의 현상으로 보여지면서 이 현상을 진지하게 추적하는 몇몇 고고심령학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성벽이 점점 자주 출몰하고 점점 파괴적이 되어가는 가운데 '누가', '왜' 빙의하는지, 빙의가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아내려는 이들의 추적은 조금씩 구체화되어간다.
뭔가 굉장히 비과학적으로 보여지는 소설의 설정과는 달리 그들이 소위 '요새빙의' 현상을 추적해가는 과정은 일종의 지적인 게임처럼 보인다. 하나의 단일한 문화요소가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그 지역마다의 개별문화를 흡수하고 변형되어 가는 과정들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그리고 일부 공명심에 사로잡힌 고고심령학자들의 행태들, 사건 자체보다는 이것을 흥행시킬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진지한 유머처럼 읽히기도 했다.
SF이거나 판타지이거나 괴담이거나.. 그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었던 소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재미있었고,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에 크게 호소했던 소설이었다.
한편으로 줄거리와 관계없이 저절로 다시 읽게되는 문장들, 맞아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런 문장들도 많았다.
"오래된 망원경은, 자세히 볼 필요는 없는 대신 긴 시간을 들여 지켜봐야 하는 별들을 관측하는 일에 노년을 바쳤다." 사람도 망원경도 노년에 가장 내세울 것은 시간인지 모르겠다. 자세히 볼 필요는 없지만 긴 시간을 들여 지켜봐야하는 별들은 어떤 별을 말하는 걸까?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니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자세히 보기보다 멀리서 오래 지켜봐주길 바라는건 다만 그 별들만은 아닐 것 같다.
이런 문장에도 포스트잇을 붙이고 말았다. "웃어주지 않았다는 자부심. 별것도 아닌 것에 저항해놓고 별것도 아닌 성취감을 챙겨가는 청춘들." 맞다, 청춘은 바로 그런 묘한 시기이고, 여전히 철들지 못한 나는 청춘의 가장 부끄러운 조각들을 여전히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휘두르며 살고있는건 아닐까?
"각주 가득한 700쪽짜리 학술 서적 사이에 낀 삽화 세 장처럼 귀한 날이었다." 한창 겨울, 뜻밖에 봄날씨같은 순간을 묘사한 장면이다. 학술 서적에 묻혀 지내면 귀하고 소중한 걸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모든 비유는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의 한계 속에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옷가게를 하던 지인이 돈계산을 할 때면 늘 '저 돈 벌려면 티셔츠 몇 장을 팔아야되는데' 했던 생각이 문득 나기도 했다. 사실 글자가 빽빽한 책에서는 흐릿한 흑백사진 한 장도 큰 위안이 되긴 한다. 끄덕끄덕.
"저는 인류를 신뢰해요. 다만 구체적인 인간을 믿지 않을 뿐이지, 추상적인 인간은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모든' 인간은 추상적인 인간이 아닌 구체적인 인간이라는게 비극인걸까? 구체적인 대학원생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쓰고있다. "구체적으로 멍청하고 저마다 독창적으로 게으르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무기력하고 겁에 질려 있는 인류의 표본들"이라고. 나의 매우 독창적인 게으름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독창적인 비난에 딱 어울릴만한.
"공부라는 건 스스로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으면 이어지기보다는 끊어지기가 더 좋은 사치스러운 취미였다." 지금까지 어떤 시대에서도 의식주와 직접 관련이 없는 활동을 하는 것은 '사치'이며 '과시'의 한 표현이었다는걸 생각한다면, 오늘날 누군가가 입시나 취업(돈벌이)와 관계없는 공부를 한다면 그다지 크게 격려받지 못할 것이고, 사치스런 취미로 여겨질 것이다. '사농공상'의 전통이 있다보니 공부하는 일을 높이 치면서도, (구체적인 성취 없이) 공부하는 사람을 은근히 백안시하는 분위기 또한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