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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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이렇게 한탸의 고백은 시작된다. 그는 책에 한눈을 팔고, 자신만의 꾸러미를 꾸리느라 두시간씩 초과근무를 하고 한시간 먼저 출근하지만 가방 안에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이 들었기 때문에 미소짓는다.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한탸. 그가 혼자인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그렇게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하고, 파괴될 운명에서 구출한 아름다운 책들을 추려서 나름의 미학으로 장식하고 감상한다.


그와 책들 사이의 아슬아슬해보이는 관계 사이사이로 외삼촌의 정원과 과거 연인 만차, 이름을 잊은 어린 집시와 보낸 순간 등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펼쳐인다.


비참한 운명과 환경 가운데서도, 책만으로 충분했던 한탸의 행복은 거대한 압축기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반복적으로 쓰고 있으면서도 결코 한탸의 하루하루가 불행해보이지 않았기에 오히려 읽는 초조한 심경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건가...


책이 가차없이 처리되는, 그가 사용하는 압축기 스무대 분량의 일을 해내는 압축기를 보면서 그는 닭 가공공장을 떠올리며 허겁지겁 그 곳을 떠난다. 현대적 시설의 컨베이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깔끔한 스타일의 젊은이들이자만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모든 폐지더미를 파괴하고 파괴할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멋진 젊은이들이 그의 지하실을 차지한다. 그에게 새로 주어질 일은 백지를 꾸리는 일이 될거라고 한다.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한탸는 평정심을 잃고 '벌렁 나자빠졌다.' 하지만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는 책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하게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한탸는 기적적으로 나치에 희생당한 "성령의 숨결처럼 단순했던" 어린 집시여자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인간적이지 않은 하늘, 가차없이 집어 삼키고 내리누르는 압축기. 과연 책은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은퇴후에도 곁에 둘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압축기는 어느날 갑자기 "모든 사소한 일들과 작은 기쁨을 끝장내고" 그를 배신했지만 어쩌면 그건 언젠가는 불쑥 들이닥쳐 누구의 삶이든, 어떤 종류의 삶이든 끝장낼 수 있는 예견된 종류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영원히 옆에 있어줄 것 같고 나의 일상인듯 생각되지만 자의든 타의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타인처럼 몰락의 예감을 감추고 있듯이 말이다.


분별없는 발전에 대한 은유 또한 강렬하게 느껴졌다. 효율적이고 훌륭해보이지만 제자리를 맴돌뿐인 컨베어벨트 앞에서 영혼없이 파괴행위를 벌이는 젊은 노동자들,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는듯 하지만 사람은 점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요즈음의 우리 모습을 보면 남들과 똑같은 토막정보들을 수집하기 위해 뭉턱뭉턱 시간을 쏟아붓고도 스스로 점점 스마트해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지경이다.


이 소설은 결국 사라져가는 숭고함, 인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새로움으로 빠르고 무자비하게 대체되는 과거 인간들의 정신. 이 모든 것에 대한 비통한 찬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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