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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0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존 M. 쿳시의 <추락>을 읽었다. 그간 꽤나 묵직하고 긴 작품들이 수상하는 일이 많았고, 상 자체의 권위에 지레 한발짝 물러나게 되는 점도 있다보니 노벨상 수상작품이라면 뭔가 만만치 않을거라는 선입견이 있기는 하다. 물론 한편으론 기대감도 높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 책 역시 조금은 뻣뻣한 마음으로 첫장, 첫문장을 읽었는데 "어라, 요건 좀 읽히겠는걸..." 싶었다.
"그는 이혼까지 한, 쉰 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정말 속도감있게 읽히지만, 그 안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그는 "그의 수입과 기질과 감정의 반경 내에서 살아간다. 그는 행복한가? 대부분의 척도로 보자면 그렇다. 그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후렵구를 잊은 건 아니다. 죽기 전에 누구도 행복하다 말하지 말라."
정기적으로 섹스 문제를 해결해주던 그녀와 예기치않게 결별한 후 자신의 어린 학생을 권위의 힘을 빌어 취하게 되고, 그 후 서서히 추락해가는 이야기이다. (원제는 '불명예') . 자신의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결코 변명하거나 유죄를 인정하지 않은 그는 결국 대학을 떠나 시골에서의 삶을 선택한 딸의 집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모험, 그가 옛날에 학교와 발레 수업과 서커스와 스케이트장에 태워다 주던 그의 딸이 이제는 그를 데리고 나가서, 그에게 삶을 보여주고, 그에게 이 생소하고 다른 삶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만한 관심이 없다."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딸의 생활방식과 가치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그 곳의 거의 모든 것, 남아공에서의 뿌리깊은 흑백갈등이 야기하는 크고작은 심리적 갈등과 사건들이 펼쳐질 뿐이다.
그 자신이 커뮤니케이션을 강의하는 교수였지만 모두와의 소통에 실패하는 그의 모습을 아이러니하다. 자신 안의 자신에게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딸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좋다, 그 일을 하마. 하지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조건에서 하겠다. 나는 개조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내 자신이고 싶다. 그런 입장에서 그 일을 하마." 내 안에 오직 하나의 나를 가지고 있는 것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다른 세상과 다른 사람을 배우고 취하고 새로운 것을 배척하지 않는다는게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미덕인지...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모습 그대로 "희망이 없고, 욕망도 없고, 미래에 무관심한 노인이 된다"
흑백갈등의 문제는 여러모로 내게 어려운 문제여서 그저 소설이 보여주는 만큼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에서 제기되는 또다른 문제 중 가축 이야기가 있다. "양들은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소유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마지막 한 온스까지 활용되기 위해 존재한다. 고기는 먹히고, 뼈는 으깨져 닭들한테 먹힌다. 아무도 먹지 않는 쓸개를 제외하면, 어떤 것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그걸 생각했어야 한다. 검고 쓴 쓸개에 숨어 있는 영혼.". 한편 애완동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왜 동물에게 친절하고자 하는가?하는 물음을 던진다. 죄의식? 보복이 두려워서? 아량을 보이고 싶어서? 최종적으로 그 친절이 무엇에 기여하는가를 생각해볼 문제다. 주인공인 교수는 안락사한 개의 시체의 명예를 지키는 일에 집착을 보인다. "동물의 시체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한다."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더 완벽해지는, 도무지 빈틈을 보이지 않는 소설이다. 빈틈이 없어서, 그리고 기댈 인물이 없어서, 독자를 때로 힘들게 만드는, 그래서 비정하게까지 느껴지는 소설'이다. 아직 한번을 읽었을 뿐인데도 정말이지 개인적으로 편들어주고 싶은 인물이 단 한명도 없는, 그래서 현실세계의 비정함을 고스란히 느끼며 읽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글로 정리해놓고 보니 빠뜨린 부분이 너무 많지만 나로서는 결국 어설픈 선에서 끝낼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는 소설, 빠르게 읽히지만 책장을 덮고나서 그 무거운 울림이 오래 남는 소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추락하셨죠?"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그에게 맞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변방에 속하는 인물. 그는 말한다.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는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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