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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시간은 서두르지 않는다 - 안나푸르나 트레킹 이야기
이필형 지음 / 실크로드 / 2017년 12월
평점 :
네팔,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많은 이들에게 이런 단어는 낯익으면서도 먼 이야기로 들린다. 내게도 그저 실현 불가능한 버킷리스트의 한 줄처럼 꿈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니 가끔은 전문가가 아닌 '아무나'가 훌쩍 그곳에 다녀온 이야기가 솔깃하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사진과 영상물로 그 곳을 본다고 해도, 단 한 번 그 곳에 서보는 경험과 바꿀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매우 부러운 마음으로, 언젠가 나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특별한 山사람이 아닌 저자의 13박 14일, 안나푸르나 산행기를 읽었다.
이아기는 그 산에 가기 전의 준비과정부터 시작된다. 정신적인 준비와 신체적인 준비, 물건의 준비(준비물 체크리스트) 등등. 무엇보다 몸을 단련하며 팀원들끼리 호흡을 맞추어보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걷기에도 예절이 있고 요령이 있고, 서로 너무 멀어져서도 안되지만 '내 길'에 집중해야한다는 것. 출발하면서 팀의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은 체력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다. 오르고 싶은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오르는 것이다."
트레킹 출발지로 향하면서 저자는 "네팔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매 순간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쓰고 있다. 매 순간 새로운 풍경과 마주서게 되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그 곳으로 떠나는 일'과 '그 곳에 머무는 일'만으로도 정말로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것 같다. 어쩌면 그건 내 안의 다른 나를 발견해가면서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가난해 보이는 집들도 페인트로 야한 멋을 부렸다. 하늘이 맑아서 그런지 허름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여기서도 햇볕은 강렬하다. 강렬한 빛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카트만두 외곽에서 본 한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적고있다. 눈(雪)이 어수선한 풍경을 덮어버리는 것처럼,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강렬한 빛을 떠올리며 함께 실린 수수한 사진 한 장을 본다. 빛이 강한만큼 더 선명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흙길을 활기차게 걸어가는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서사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버린 우리에게 가난과 불행은 한 쌍처럼 생각되지만,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어느 틈엔가 잃어버린 것들, 넘치도록 가지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풍요와 정겨움과 구체적 일상 속의 행복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어지는 산행 이야기 역시 구체적인 등반일기라기보다는 새로운 '배움'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 산이라는 존재에게서, 산에 오르는 과정 속에서, 함께 오르는 사람들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배운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또한 죽음에 대해서.
이곳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갖는 마지막 생각이 그 다음 환생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힌두교 경전은 '인간은 육신을 버릴 때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의 삶을 얻는다. 그가 몰두해 있는 그 상태를 그는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당연히 구체적인 산행 지도와 필요한 정보들도 있었고, 더불어 그들 문화에 대한 소개와 정보도 꼼꼼하고 다양하게 실려 있어서 네팔에 대한 소소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살아가는 날들 가운데 13일은 작은 날들'이지만 '그렇게 13일을 보낸 뒤 나는 안나푸르나를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내 속에 새겨진 안나푸르나는 누구 것도 아닌 나 자신만의 안나푸르나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나는 나만의 안나푸르나를 영영 갖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나만의 어딘가를 갖고 있고 또 새롭게 갖게될 것이 분명하다. 내가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곳이 많아지는만큼 나 역시도 더 많이 배우게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