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라르스 소뷔에 크리스텐센 지음,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어려운 소설만이 작품성 있고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이 아닌 것을 읽으며 느낀다.

나는 중학교때 읽었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으며 여름 밤 꺼억꺼억 소리를 내가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눈>을 읽으며 어지러지는 마음을 다잡기란 어려웠다.

아기였다가 아이였다가 소년, 소녀였다가 어른이 되어간다.

자라는 중에 영면하지 않는 다면 예외없이 모두가 그러하다.

그러나 몸이 자라날 뿐이지 어릴 때 슬픔은 적고 어른일 때 겪는 슬픔도 함께 자라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되어 이룬 세상에서- 그렇기에 어른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상이고  어른이 된 사람들의 잣대로 보기에 그러하지 아이때를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매일 보내지는 학교는 무서웠고, 나를 둘러 싼 아이들의 머리에는 뿔을 하나씩 달고 오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보는 대로 다정하지만 않은 선생님들은 또 어떠했는지.

내게 권해진 것을 부정할 힘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은 문학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쓸쓸한 삶을 벌써부터 관조하는 것은 모두 어른들이 좋자고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대부분은 심연을 들여다보기 보다 소리내 울고 어깨를 움츠리고 주변을 몰래 살피게 된다. 이혼을 결정한 부모를 둔 아이도 그렇다.

아이의 결정은 어른들에게 미치는 힘은 그저 미미할 뿐이다.

제제에게는 제제의 남다른 감수성을 예리하게 돌봐줄 부모가 없지만 헤르만에게는 녀석이 상처를 받을세라 녀석의 이불 속에 드는 바람마저 돌보는 부모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달걀이 되어가고 민둥민둥한 달이 되어가는 머리를 매일 거울로 확인해야 하는 헤르만에게는 크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도울 뿐이지.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있는 권능은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이 소설의 힘은 어린 애 같은 순수한 묘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불룩한 배를 손으로 치는 엄마의 손을 나비같다고 표현하는 것에 있어 작가가 지키고 싶었던 시선의 높이가 느껴져서 좋다. 마음이 착해지고 어린 때의 내 슬픔이 수면 위로 가만히 떠오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