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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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감동을 준 또 하나의 책'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할 수 있는, 이 책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 그대로 난 이 책을 읽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난 어느 새 작은 나무를 지켜보는 이웃 집 누나가 되어 있었다.

난 그 작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입가에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아직 10살도 채 안된 어린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란 참으로 신기했다. 그 아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품에서, 그리고 또 다른 어머니, 대자연의 품에서 자라난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순수함에 난 다시금 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내 머리 속에는 라다크라는 곳(윤리 과제를 하면서 알게 된 곳)의 옛 풍경이 드리워졌다. 작은 나무가 사는 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정해져 있는 자리인양 꼿꼿하게 서 있고 자연이라고 해 봐야 근처 가로수나 작은 공원뿐인- 이 곳과는 사뭇 달랐다. 난 생각했다.

'작은 나무는 틀림없이 대자연 속에서 행복하리라...!'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숨죽이고 보았던 부분은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가 작은 나무를 목숨을 걸고 구해내는 장면이다. 작은 나무가 뱀 앞에서 얼어 있을 때 그 든든한 할아버지의 팔뚝이 뱀과 맞서 주었다. ( 할아버지의 팔이 시퍼렇게 변해갈 때 내 마음은 작은 나무의 마음이 되어 불안하고 초조했다.) 너무 단순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그 대목에서 난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부분에서 난 사랑이란 걸 느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함께 살아온 할아버지의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 뿐만 아니었다. 울면서 달려간 작은 나무에게서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땋은 머리를 날리며 뛰어가는 할아버지의 아내...자신의 옷으로 덮어주고, 독이 든 피를 빼내는, 작은 나무의 할머니의 모습...그 얼마나 따스한가...!!!

이 책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앞에서 말한 사랑을 절실히 배웠다면 그에 대조되는, 자연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 없는 모습을 통해 지금 시대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할 수 있었다. 작은 나무는 배운 것이 많았다.-나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자연 속에서 개들과 함께 배운 것들은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에서 배우는 것들은 교육이 아니라고 했다. 오직 그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계산적인 것들, 이론적인 것들을 교육이라고 자부했다. 과연 어떤 것이 진짜 교육일까?

난 한번씩 바쁜 생활 속에서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학원을 갔다가 돌아오는 늦은 밤길에서, 혹은 쉬는 시간에 뭔가를 열심히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이렇게 바쁘게 사는 이유는 뭘까...그 이유는 물론 나중에 잘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의 여유를 즐기면서 욕심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잘 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이 책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의 빠듯한 생활, 그리고 그 속에서 편리한 생활이 과연 자연 속에서의 맑고 깨끗한, 여유있는 생활보다 나을 것이 과연 무엇인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것이 나에게 존재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존재하고 있었다면 난 이 책을 통해서 그 기억을 조금이나마 되살릴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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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이광수 / 우성출판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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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이광수가 1917년 그의 나이 26세 때 매일신보에 연재해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봉건적인 가치 의식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는 것과 가난을 극복하고 국력을 배양하기 위해 근대 서구 문명을 수용하려는 계몽사상을 펴는 데 있다고 한다.

사람은 시대가 변하면 그에 맞게 사회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영채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언약만으로 자신이 의지할 사람은 형식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7년을 지냈다. 그 동안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아 했더라면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7년을 거기에 매어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크게 느낀 것은 지금의 물질적인 부만을 추구하는 사회풍조를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도시화 공업화 되면서 사람들은 지나치게 물질적인 삶을 추구해 온 듯하다. 이에 반해 어쩌면 그 보다 더 소중한 정신적인 면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형식의 태도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형식은 자율적이고 근대적인 정신을 가진 각성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영채가 자살을 하러 평양으로 갔을 때 찾아갔다가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무정한 모습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는 소설 속에서 형식도 자신의 무정함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영채를 찾아보지 아니하고 쉽게 포기하고 돌아온 자신의 냉정함을 스스로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선택한다. 이는 개인적인 이기심과 냉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흔히들 외딴 시골에 가면 '역시 시골 사람들은 인심이 좋아.'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는 시골 마을이 현대 도시처럼 도시화 산업화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적인 것들은 모두 서양의 합리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합리적이고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기적이고 냉정한 것에서 벗어나 유정한 인간관계를 이루어 밝은 사회를 기약한다는 뜻을 밝혀두는 것이다. 이는 지금에도 맞는 말인 듯 하다.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우리 나라도 산업의 영향으로 그 동안 사람들 간에 공동체 의식이 많이 줄고, 거의 다 자기밖에 모르는 일이 많아졌다. 평소 그런 일 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웃간에 정을 나누는 일이라든지 사회적 규범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합리화시키는 것을 봐도 그렇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케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이 말은 소설 속에 있는 말이다. 요즈음은 자기가 하는 일이 사회 전체적으로, 국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를 모르고 산다. 다 개인의 일만인 줄로 안다. 그러나 앞의 말처럼 세상이 평생 이렇게 냉정하게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데 달렸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유대의식을 가지고 서로 정을 나눈다면 산업은 물론 발전할 것이요, 더욱 밝은 세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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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 세계명작베스트 100 10
염상섭 지음 / 두풍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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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갈등'

모든 것이 개방화된 오늘날 이 말은 우리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다. 이 것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신세대와 보수적인 구세대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염상섭의 작품 '삼대'에서도 그 시대상 중의 하나로 드러나 있었다.

이 소설은 1920년대 서울 중구 수하동의 만석꾼인 조씨 일가의 삼대를 다룬 것으로써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한 집안이 어떤 의식을 지니고 몰락해 가는가를 사실적으로 파헤친 작품이었다. 그 시대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삼대>의 주인공은 제각기 문제점을 지닌 인물들로 할아버지 조의관은 봉건제도의 전형적 구세대 인물로 젊은 후처 수원집이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탐욕적인 인물이었다. 조의관과 자주 부딪히는 아들 상훈 역시 신문물과 기독교에 기울어진 신사이지만 애욕과 축첩의 이중생활에서 안이하게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상훈의 아들 덕기는 선량하지만 적극성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 인물들 중에서도 특히 조의관과 상훈의 갈등은 더욱 골이 깊어갔다. 봉건적인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조의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개화기 지식인 조상훈 사이의 갈등... 이것은 단순한 도덕 문제라든지 가족 제도의 구습구관의 파기라는 부분적 노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적 의식이 깊어간 신구의 충돌에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난 이러한 조,부,손 삼대 사이의 갈등을 볼 때 그 시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시대에 또 다른 갈등은 없었는가, 있다면 어떤 갈등이었을까?' 하며 그 시대를 상상했던 것이다. 그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소설 속에는 또 다른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갈등이었다. 다름 아닌 '이념간의 갈등'... 이 소설은 배경으로 하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에 따른 갈등이 없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이념간의 갈등은 소설에서 병화와 덕기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덕기와 병화는 젊은 지식인으로서 각기 다른 입장에 놓여 있고 다른 길로 가는 인물이다. 덕기는 잘 사는 집안출신이었고 병화는 집을 나와 살고 있었기에 병화는 덕기를 만나기만 하면 '부르주아' '가진 자' 운운하며 비꼬곤 했던 것이다. 이렇듯 서로 설득도 하고 비꼬기도 하고 밀고 당기는 친소 관계가 계속되면서 주의자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갈등'이란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고 있는 듯 했다. 조의관과 조상훈 사이의 갈등처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조덕기와 병화 사이의 갈등처럼 이념의 갈등, 그리고 사회주의자들과 식민 통치 당국 사이의 대립과 같은 사회적 갈등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러한 갈등에 어떻게 대처하는가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덕기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를 분명 갈등의 현장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안정과 조화를 찾아 나가는 모색 장소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듯이, 갈등을 일으키는 양쪽에서 조화와 안정을 찾기위해 노력한다면 이 사회의 갈등은 한층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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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사감과 러브레터 - 한국문학명작선집 8
현진건 지음 / 태을출판사(진화당)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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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대비되는 것들이 참으로 많은 듯하다. 선함과 악함, 냉소와 연민, 화려함과 단촐함, 이성과 감성, 그리고 권위와 인간 본능...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삶의 복잡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 말하려는 것은 아마도 맨 후자가 아닌가 싶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권위란 것은 B사감이요,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은 러브레터가 아닐까? 아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B사감은 권위와 인간의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이며, 러브레터는 그런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을 우스운 꼴로 만들어버리는 매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처음에 이 소설을 접했을 때는 마냥 웃음만 나왔다. B사감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가 그 이유였을 것이리라. 곰팡이 슬은 굴비, 염소똥만하게 붙은 머리고리...소설 속 B사감은 그렇게 철저하게 비하되고 있었다. 그녀는 여학생들에게 오는 러브레터를 가장 싫어했고, 남자가 여학생 면회 오는 것조차 못 마땅해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난 그녀를 만나 보면서 어느 새 소설 속 여학생이 되어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하여 기숙사생들에게는 엄격히 대하면서 자기가 마치 남성 혐오자인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난 소설이 끝나가는 동안 그렇게 권위적인 그녀를 동정할 수 밖에 없었다. 소설을 다 읽었을 때, 그녀는 남자를 그리워하는 못생긴 노처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밀려왔다. 소설 속 그 셋째 처녀의 그 때 모르는 눈물처럼...

그랬다. 이 소설은 나로 하여금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문체는 B사감의 이중성을 조소하고 그 정체를 폭로하는 데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풍자나 희극에 머무르지 않았다. B사감이라는 위선적 인간형을, 그리고 그 위선적 인간형의 비애를 보여주면서 어떤 교훈을 주었을 뿐 아니라, 마지막 부분에서는 비정상적인 그 인물의 풍자 뒤에 오는 연민의 감정도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게는 악한 면도 있고 선한 면도 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권위적인 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따뜻한 면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모두를 위선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 어느 한 면만을 지나치게 내보이거나 숨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리라. 즉, 두 가지의 면을 꾸미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어느 정도의 제어가 있기에 사람이 위선적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가 한다. 어느 한 면을 지나치게 숨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위선'이 되고 만다. 이 소설은 그 '위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권위적인 사람이라도 인간의 본능이란 것을 숨길 수는 없는 것인 듯 하다. B사감이 학생들 앞에서는 권위적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애정에 대한 본능을 이기지 못했듯이 말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싶다. B사감의 그러한 행동이 과연 그 인물 한 사람에게만 매여 있는 것일까? 또한 그녀의 행동이 과연 그녀 자신만의 어떤 문제 때문에 행해진 것일까?

난 이 글을 쓰면서도 아직 많은 의문이 남는다. 이 소설이 전달하는 메시지에서,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그러나 한 가지 적고 싶은 것은 가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 비할 수 없는 추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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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5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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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와 사랑...
어쩌면 서로가 대립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내면 세계에 있어서 이성과도 같은 존재인 지(知)와 감성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사랑은 서로 상반되는 관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난 이들 두 세계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융합되어야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라는 작품을 통해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마리아브론'이라는 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 곳에는 생활과 교육과 연구가 있었으며 경영과 다스림이 있었다. 또한 그 곳에서 온갖 예술과 학문이 전수되었다. 종교적인 것도, 세속적인 것도,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모두 그러한, 그 수도원에서 두 주인공,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예사롭지 않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졌다. 나르치스는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철학자로, 나로 하여금 차가운 인상을 느끼게 해 주는 인물이었으나, 그에 반해 수도원의 학생으로 들어온 골드문트는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나르치스가 명상가요 분석가라고 한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이며 동심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서로가 상반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와 사랑의 대비되는 모습을 비추기라도 하는 듯...

그들은 그렇게 다른 서로의 모습에서 공통점- 눈에 띄게 두드러진 재능과 특징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찾아냈고, 그것은 그들을 깊은 친구의 관계로 만들어 주는 매개가 되어주는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의 겉모습의 대비만큼, 그들의 삶의 운명 또한 대비될 수 밖에 없었다. 나르치스는 수도사의 길을 걷기 위해 수도원에 남아 오랜 수도를 하고 골드문트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먼 훗날 나르치스는 그 동안의 수도생활로 수도원장이 되어서, 골드문트는 방랑생활 속에서 애욕의 예술가로, 고통과 쾌락, 출생과 사망 등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후, 그 둘은 재회를 하게 된다. 그들은 다시 만나 서로의 부족했던 점을 깨닫고 우정으로 맺어진다. 그리고 골드문트는 지와 사랑의 조화인 마리아상을 제작하고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야기가 종결되어가는 부분에서 난 이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마음 속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우리 내면에 있는 지와 사랑의 모습이며 더 나아가 인간 내면의 양면성을 보여 주는 듯 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재회가 의미하는 것이 지와 사랑의 융합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골드문트가 죽기전에 조각한 마리아상이 그 형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만남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지와 사랑의 조화 또한 필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난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과연 내 내면 속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와 사랑 모두가 동등하게 자리하고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 쪽만이 심하게 결핍되어 있지는 않는지 난 내심 나의 그 동안 생활을 돌아보았다, 아니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내 심리적인 변동을 살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사랑'보다는 '지'에 그 중요성을 더 두고 있는 듯 했기에 난 내 자신에게서 실망과 동시에 그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는 데에 대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이 겉으로 말하는 것은 '지와 사랑'의 조화일 것이다. 지는 현명하지만 냉철하고, 사랑은 현명하지 않지만 따뜻하다. 그 둘은 언뜻 보기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로 대립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이 통일된다면 지의 냉철한 면을 사랑이 감싸줄 수 있으며 사랑의 현명하지 못한 면을 지가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다른 두 세계가 합해지면서 지혜롭고 아름다운 하나의 큰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과 악, 이성과 감성 등 인간 내면에 수없이 많은 두가지 갈래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참 모습을 일깨우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와 사랑, 진실과 아름다움이 하나로 통일되고 조화를 이룰 때의 모습이 비로소 참된 인간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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