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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알다 해를 살다 - 생명살이를 위한 24절기 인문학
유종반 지음 / 작은것이아름답다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입춘, 때마침 도착한 책을 집어들며 올해는 '제대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막연한 희망을 가로막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져 책장을 넘기는 일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늘은 절기를 통해 사계절뿐만 아니라 24절기와 72후, 더 나아가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마다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환경을 준비해놓는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생명들도 그 절기를 자기 절기로 만들기 위해 발 맞춰 준비해야 한다. (...) 왜냐하면 절기는 하늘(태양)의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하늘과 땅(인간, 생명)이 함께 만들어가는 협력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72쪽에서
입절기의 의미를 설명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 책을 집어들고 '제대로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말의 의미를 되짚어 보았다. 내가 '제대로 산다' 하는 건 어떻게 사는 것일까? 대도시, 아파트 고층에 살면서 물리적으로는 하늘에 가깝지만 땅과는 너무나 멀어져 있는 공간 안에 살면서, 절기와 조응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순간, 입춘이라며 들뜬 마음에 사들고 온 프리지아 한 다발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런 인위는 인간의 일방적인 절기 맞이일 수 있으므로.
아이를 낳고 함께 지내며,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다' 하는 생각에 여러 대안을 고려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시도 끝에 어느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우리에겐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은 떠날 수 없는 이 공간 안에서 우리 나름의 자연스러운 삶을 꾸려가자 다짐하던 차였다. <때를 알다 해를 살다> 출간 소식을 접하고 덥석 책을 집어들게 된 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책은, 충분한 고찰 없이 매뉴얼만을 바라는 수동적인 독자에게 일침을 가하듯, 계속해서 생각거리를 던지며 내가 선 지금-여기,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먼저 때를 알고 사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때이며, 내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 그 다음 나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으며 어떤 시대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고, 천지 자연 흐름인 절기와 하나뿐인 지구 생태계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사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128쪽에서
나의 때와 내가 속한 시대의 때, 내가 발디딘 터전의 때를 잘 알고 이들 간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막연히 생각했던 '제대로 사는 삶'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문제는 이들 간의 부조화, 간극이 너무 크다는 데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이 확장하다 어느 순간 멈춰본다. 끝없이 발산하다가 결국 나의 삶 자체와는 너무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씩, 차근히 따져보기로 한다.
이제 막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아이의 삶이 나와 남편의 삶과 맞물린다. 아이는 그동안 따스한 눈 이불을 덮고 겨울 땅 아래에서 튼튼하게 싹을 틔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곧 봄을 맞이할 것이다. 책은 봄을 제대로 맞이하려면 몸을 풀고, 마음을 풀고, 일을 풀어야 한다고 일러준다. 단단히 응축된 겨울의 또아리를 천천히 풀어보며,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성숙시켜 갈 시간을 꿈꾸듯 그려본다.
절기살이란 '지금 여기에서' 다른 생명과 서로 잘 소통하며 사는 삶이다. 과거에 붙들리지 말고 돌아오지 않는 미래에 희망을 걸지 말고 오직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다음은 절로 이어지고 맺어지기 때문이다. 나무가 잎을 낼 때 꽃과 열매를 생각하지 않고, 꽃이 필 때 열매를 미리 생각하지 않듯이. -54쪽에서
물론 인간이기에 앞일을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생각에 잠식당하지 않고 순간순간을 실제로 살아가기, 여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짐한다. 생생하게, 지금-여기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