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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여섯 시, 일기를 씁니다
박선희 지음 / 나무발전소 / 2023년 1월
평점 :
작가는 프롤로그에 이렇게 썼다.
써요. 그게 뭐든.
내가 답장해 줄게요.
수신인은 ‘무엇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허공을 딛고 서 있는 것 같은 당신’이다. 이 ‘당신’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이 책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자주 그렇든 가끔 그렇든 저런 마음, 저런 느낌 앞에 서곤 하는)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은 보내 적 없는 메일에 ‘답장’으로 쓴 단체 메일처럼 읽힌다. 보낸 적 없는 메일에 ‘답장’으로 온 단체 메일을 읽는데, 읽을수록, 어찌 된 일인지 내가 먼저 메일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이 깊어진다. 그러더니 이윽고는 수신인이, ‘당신’이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인 듯 여겨진다. 느낌과 확신의 딱 중간 정도만큼. 책 속 글들은 그렇게 공감의 영역을 살짝 넘어선다.
보낸 적 없는 편지로 받은 답장엔 어떻게 답장해야 하나? 어떤 답장을 해야 하나? 예의와 고마움 사이서 고민하던 중, 애초 편질 보낸 적 없었으니 답장도 답장 아닌 답장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해함을 버리고도 깊디깊은 시인, 울먹이지만 울지는 않는, 눈부시나 눈을 감게 하지는 않는, 돌아보게 하면서도 재촉하지는 않는, 안고 보듬고는 있던 자리에 가만히 되돌려놓는, 딱 알맞게 뜨겁고 딱 적당하게 선선한 그런 문장들을.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게 불행이 아니면 뭘까,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다. - 17쪽
너의 괴로움이 너의 괴로움으로 그치지 않고 너의 괴로움을 상상하기만 해도 괴로워지는 것, 적어도 내 사랑의 기준은 그렇다. - 20쪽
젊은 그들은 자체로 눈부신데 나이 든 그들의 아름다움에는 연마가 필요하다. - 23쪽
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넓어질 희고 깨끗한 나이테를 상상하니 우주가 세 배쯤 아름다워진 것 같다. 우주가 아름답기가 참 쉽다. - 75쪽
트리 옆에서 캐럴을 들으며 뜨개질을 하고 있는 더없이 평화로운 이 장면 속에 불안이 작은 파도처럼 철썩이는 건 나밖에 모르는 일. 그러니 우리는 ‘나는 너를 알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 77쪽
멈춰서 물끄러미 공기 속으로 들어가면 십중팔구 좋은 답을 얻게 된다. 행복이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 참 다행이다. - 90쪽
노래를 듣는데 노래 사이사이로 남편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이런 노래를 좋아했었지. 왜 담아두었는지 그 이유를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 174쪽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작은 빗방울, 여름 저녁의 공기, 스무 걸음에 한 번씩 간간이 스치는 풀 냄새 같은 것. 잊지 말아야지. 이 순간 내 마음에 솟아난 용기, 오늘의 공기 같은 것. - 189쪽
지난 금요일의 달은 무척 아름다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애가 탔다. 내가 애가 타거나 말거나 달은 홀로 계속 아름답다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사라지겠지. - 193쪽
당신이 머리 쓰다듬어 주었던 거 이제야 떠올린 거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새해 첫날이라고 응원처럼 꿈에 와 준 것도 고맙고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그냥 좋았어. 다시 만나서 그냥 좋았어. 나를 염려해 주고 있구나 느껴졌어. - 213쪽
나는 마음의 끝을 알고도 그것을 넘어서서 걸어가는 게 진짜 인생인 것 같다고 전날 밤새 뒤척이며 내린 결심을 말해주었다.- 229쪽
보낸 적 없는 편지로 받은 답장에 전하는 답장으로 옮긴 저 문장들은 책을 한 장씩 넘겨 찾은 게 아니라, 왼손으로 책 왼쪽 면을 잡고 오른손 엄지로 책 오른쪽 끝을 주르륵 흘리다 오른손 엄지에 힘을 줘 멈춘 곳에서 찾은 것들이다. 밑줄이 없을 때가 반 정도, 있을 때가 나머지 반 정도였는데, 모두 옮기기엔 너무 많아 오른손 엄지에 “처음, 중간, 끝 정도에서!”라는 명령어를 입력하고 ‘주르륵 흘리’는 작업을 다시 해 얻은 것들이기도 하고(‘끝 정도’가 좀 더 많은 건 그저 그러고 싶어서였다).
아무려나, 보낸 적 없는 편지로 받은 답장에 전하는 답장으로 옮긴 저 문장들이 답장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우기고 싶다. 답장 보냈노라고. 그러니 또, 답장해 달라고. 그 정도 염치없음은 ‘독자’의 권리니 꼭 또, 답장 전해 달라고. 그리 급한 건 아니니 천천히 보내도 되지만, 너무 오래는 싫다고.
이렇게 오랜만에 다음 책을 투정하는 독자가 되어본다. 고맙게도.
추신.
이 책이, 이 일기들이 ‘박선희’라는 사람의, 그리고 ‘지호’라는 아이의 슬픔을, 모두는 힘들겠지만, 많이, 아주 많이 거둬주었길 진심으로 바라고 믿어요.
걸어온 어느 곳엔가 후회를 놓아두었다. 같은 순간을 곱씹으며 그럴 걸, 이럴 걸 나늘 탓하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한 번뿐이니까.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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